[연재-120] 계몽기가요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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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준무 작성일15-11-17 14:5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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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20] 계몽기가요는 귀중한 민족문화유산-2
리준무(재미동포동부지역연합회 회장)
계몽기가요는 일제 식민지시기의 특수한 사회적환경 속에서 나온 것인만큼 많은 제한성을 안고 있었다. 이 때의 노래들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반일민족해방투쟁의 대열에 민중들을 끌어들이지 못했고, 또한 우리 민족 앞에 절박하게 나섰던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취급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있었다.
이때 창작되어 나온 노래들은 음악적인 면에서 다양성이 좀 부족한 측면이 있었는데 서정적인 면에 너무 치우치게 되다보니 애조(哀調)를 띈 슬픈 노래들만 쏟아져 나오는 기현상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제는 창작가들이 조국의 해방을 갈구하는 민중의 요구를 노래에 잘 반영하지 못했던 점이다. 창작가들이 인민대중의 시대적 요구를 간파하지 못하고, 민중이 원하는 진취적이고 투쟁적인 노래들을 창작해내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있었다.
이렇듯 항일투쟁의 대열에 민중을 묶어세우고 계몽해 나가야 할 창작가들이 민중의 열화같은 요구를 인식하지 못하고 무사안일하게 대처했던 것은 그들이 가진 세계관적 미숙성에도 이유가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자유롭게 터놓고 표현할 수있는 창작여건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세와 사회환경하에서 작가들의 창작의욕은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으며, 일반 대중들은 일제가 허용하는 염세적이고 퇴폐적인 그야말로 노래같지도 않은 것들을 노래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진보적이고 투쟁적인 가요를 많이 내놓지 못했던 이유를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탓으로만 돌리려는 창작가들의 생각을 민중들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탄압을 이유라고 하는 그들을 신념이 투철하지 못한 기회주의적이라고까지 비판을 하였다. 어쨋던 건전한 가요를 많이 창작해내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 큰 오점으로 남아있다.
이런 이유(염세적, 퇴폐적인 가요)를 들어, 역사적 고찰도 없이 계몽기가요를 천박한 유행가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고 부정적으로 대했더라면 우리 나라 음악사에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계몽기음악을 잃어버리게 되는 심각한 후과를 초래하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계몽기가요가 대대적으로 보급되었던 “카프”시기부터 해방이 될때까지 기간에 문화적 공백이 생겼을 것이다. --“카프”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을 말하는 것인데, 1925년을 전후하여 무산계급의 삶을 소재로 한 신경향파문학, 프로문학 등을 “카프”문학이라고 하였다.—그래서 김정일위원장은 김일성주석의 뜻을 받들어 계몽기가요를 장려하고 부르게 하여 이런 공백을 메꾸도록 하였던 것이다.
계몽기가요의 선전보급사업의 중요성
김정일위원장은 계몽기가요 보급사업은 나라의 문학예술사를 더욱 풍부히 하고 빛내이기 위한 중요한 사업이라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민족의 유산을 똑바르게 계승하면 역사가 빛나게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역사에 공백이 생기고 문화적 혼란기를 맞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 중요성을 누누히 설명하였다.
계몽기가요를 올바르게 평가하고 바르게 계승하면 해방전에 창작된 항일혁명가요와 함께 해방직후에 창작된 가요들이 연결되어, 나라 음악사에 전혀 공백이 생기지 않고 전통의 맥이 반듯하고 품격이 세워진 음악사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공백을 그대로 둔 역사를 후대들에게 물려 주어선 안될 것이라고 신신당부 하였다. 계몽기가요를 인정하고 널리 부르게 장려 하였던 것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가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하고 가장 친근한 예술이기 때문에 계몽기가요의 보급사업은 대단히 중요한 문화사업으로 되었다. 이렇게 계몽기가요의 보급사업은 민중의 정서생활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민족성과 주체성을 살려나가는 데에서도 그 역할은 말할 수 없이 컸던 것이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의 정서도 풍부해지고 노래에 대한 욕구도 높아만 갔다.
이렇게 날로 높아가는 근로대중들의 정서적 요구를 원만히 충족시켜 주자면 민중들이 일상생활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노래들과 누구라도 쉽게 어울려서 즐길수 있는 춤과 군중무용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는데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청년들의 문화생활과 정서생활에는 혁명적인 노래나 전투적인 노래도 있어야 하겠지만 생활적이고 정서적인 노래들도 많이 필요하다는 점을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당당하게, 우리노래를 부르며 세계로
창작가들이 청년들의 다양한 요구가 있는대도 이를 방치해 버린다면 그들의 정서는 결핍증에 걸릴수 밖에 없고 정체가 불분명한 노래에 감염되는 기현상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주의를 환기 시키었다. 계속하여 김정일위원장은 우리의 주체적 문화를 발전시키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우리민족제일주의정신’으로 무장하고 모든 것을 다 우리식대로 당당하게 해 나간다면 제국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세계화》바람은 발 붙일 수 없게 된다고 가르쳐주었다. 계몽기가요는 가사가 서정적이고 생활적이며 선율이 통속적이어서 사람들이 쉽게 부를 수 있게 되어있는 장점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남과 북 사이에 교류가 점차 활발해지자 남과 북 사이에 공동으로 추진하는 행사들이 점차 많아지게 되었다. 이런 통일행사가 열릴 때마다 한마음이 되어《아리랑》과 같은 민요와 《고향의 봄》과 같은 계몽기가요들을 함께 부르며 아주 친숙하게 어우러질 수 있었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이런 경험들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을 귀중히 여기고 민족성을 같이 지켜 나가게 된다면, 엉켰던 오해도 풀리고 끊어졌던 혈맥도 다시 이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1980년대에 남과 북이 처음으로 고향방문단을 서로 교환했던 적이 있다. 그때 북의 예술단은 서울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성공리에 공연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런데 북의 예술단이 떠나간 뒤 불미스러운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KBS방송국 측에서 예술계의 권위자라는 인사를 데려다 놓고 좌담회라는 것을 벌렸는데 그 권위자는 북의 예술단을 험담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평을 간단히 요약해 보면 북의 예술은 소련식으로 경직되어 있고,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어서 우리민족의 입맛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폄하하였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교류가 활발해지자 남에서 많은 민족음악가들이 평양을 찾아오게 되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로 북에서는 소련식 음악만하고 민족음악은 소홀히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게 사실이냐고 따지더라는 것이다. 이들은 북에 대해 좋지않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이런 그들에게 북은, 평양음악무용대학을 비롯해 민족예술을 연구하는 기관들을 모두 보여주고 특별히 연주회까지 열게 해주었다. 전통악기는 물론이고 현대화된 개량악기로 옛날곡과 현대곡을 능수능란하게 연주를 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북의 체계화되고 발전된 민족음악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이북의 음악수준이 자기들보다 몇십 년이 더 앞서있다고 솔직이 고백하더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편향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려고 김정일국방위원장은 다부작 예술영화《민족과 운명》을 만들 때에도 장면에 맞게 계몽기가요를 많이 이용하도록 하였으며 《카프》작가편에는 그 당시 창작가의 한 사람이었던 홍난파와 그의 노래《봉선화》를 취급할 수 있도록 조치도 해주었다.
계몽기가요의 발굴과 보급선전
계몽기가요는 조국통일을 불러오는 협력자라고 할 수 있다. 계몽기가요는 남과 북, 해외에 사는 우리동포들을, 사상과 정견의 차이를 뛰어넘어《우리민족끼리》의 이념아래 서로 단합시키고 조국통일위업 실현에 모두 떨쳐나서게 할 수 있는 큰 감화력을 갖고 있는 민족의 자산이기 때문에 계몽기가요의 보급선전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하고, 발굴사업도 중단하지 말고 밀고 나가야 한다. 고증도 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사업도 멈추지 말고 추진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하면 민족음악이 더욱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계몽기가요와 계몽가요는 엄연히 창작 보급된 시대적 배경과 사상주체적 내용이 서로 다르게 구분되어 있다. 계몽가용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애국문화운동의 영향 밑에 나온 노래들을 말하며 당시에는 창가라고 하였는데 후에 문예학자들이 계몽이라는 말을 붙여 계몽창가 혹은 계몽가요라고 하였는데 《학도가》 《문맹퇴치가》 《금주가》 등이 여기에 속한 노래들이다.
계몽기가요는 일반적으로 진보적인 음악유산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는 일제의 군국주의 야망 실현에 이용된 친일적인 반동가요도 적지 않았다. 특히 퇴폐적이고 염세적이며 허무감을 주는 노래도 많았는데 이런 것들은 절대로 부르지 말도록 해야한다고 하였다.
창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올바른 평가
계몽기가요에 대한 글을 쓰려면 가요가 가지는 주체사상적, 음악형식상의 특징, 일제탄압하에서의 구체적인 창작 경위, 계몽기가요와 전통적인 민족음악과의 관계에 대하여 글을 쓸 수가 있겠는데, 당대 사회역사적조건과의 연관속에서 그 진보성과 음악사적의의, 제한성을 바로 분석 평가하려면 주체적입장과 역사주의적 원칙을 잘 지켜야한다고 강조하였다.
계몽기가요의 창작과 보급에 기여한 예술인들에 대해 잘 평가해야 한다. 조령출이나 리면상은 잘 알아도 박영호나 안기영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해방전에 박영호가 《번지없는 주막》의 가사를 썼던 사실이나 《그리운 강남》이나 《작별》같은 명곡을 작곡한 사람이 안기영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박영호는 전쟁때 종군작가로 활동하다가 전사했고, 안기영은 평양음대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활동하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은 해방전에 창작되고 보급되었던 계몽기가요를 두고 북의 것이요, 남의 것이요라고 하는 것은 절대 옳지 않다고 질책하면서, 좋은 계몽기가요들을 골라서 재형상하여 보급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 하였다. 편곡할 때는 당시의 시대감이 살아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원래 소편성으로 했기 때문에, 악기편성을 너무 요란하게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편곡에서 너무 많은 악기를 사용한다면 원래의 맛을 살릴 수도 없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노래의 기분을 살린다고 별나게 과장해서 부르는 일이 없어야 된다고 하였다. 그래야 저질스럽지 않고 사람들에게 감흥을 줄 수가 있다고 하였다. 소리(라디오)방송과 TV방송으로 계몽기가요를 내보낼 때는 노래와 관련된 설명을 곁들이면 사람들의 이해도 빨라지고 일제 치하에서 당했던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음악 발전에서 있었던 우여곡절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논문《계몽기가요는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산이다》를 보면 그 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나를 깨닫게 된다. 《노래 하나를 불러도 우리의 것을 즐겨 부르고 춤을 추어도 우리의 장단에 맞추어 추면서 활기에 넘치고 낙천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한 메시지를 후대들은 절대 흘려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남과 북은 거부감이 전혀 없는 계몽기가요를 스스럼없이 부르면서 서로 힘을 모으고, 서로를 아끼면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기필코 우리민족끼리의 힘으로 이루어 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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