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기 9] 다시 가본 평양 3부 북중국경 중국측 조선족들의 목소리 3-2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흥노 작성일15-11-10 14:57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다시 가본 평양 3부
북중국경 중국측 조선족들의 목소리 3-2
이흥노(재미동포전국연합회 논설위원)
<다시 가본 평양>이라는 제목의 글은, 1부에서 재미동포이산가족들의 가족상봉에 대한 이야기, 2부에서 당 창건 70돌 행사 참관기, 그리고 3부에서 중국 쪽의 북중 국경도시를 돌아본 이야기로 나누어 실기로 한다.
옛추억을 더듬고자 연길시로
묵었던 호텔에서 일찍 보따리를 들고 옆에 있는 커피집으로 들어섰다. 러시아어로 커피집이라 크게 쓰여 있다. 로어를 해도, 영어를 해도 소용이 없다. 커피 종류가 많아 미국식커피라는 메뉴에 손가락을 올려놨다. 작은 커피잔일 뿐만 아니라 맛도 미국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훌딱 들어마시고 "방문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서둘렀다. 라진 해동직원의 지시대로 아침에 전화를 걸어 팍스 번호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 준비된 자료를 팍스로 보내겠다고 하니 오후에 보내란다.
오후가 될 때까지 <두부마을>이라는 조선족 식당 주인 안영준 씨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두부를 먹었다. 그만 배탈이 났다. 오후가 됐다. 팍스를 매 시간마다 보내려고 시도했으나 받질 않는다. 전화도 안 받는다.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망이 너무 크다. 끝내 라진-선봉행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가능한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연길에 있는 항공사로 가야만 한다. 평양에서 라진으로 직접 들어갈 수 없는 제도 때문에 평양에서 중국을 돌아서 라진을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것도 감수한체 중국을 거쳐 라진으로 들어가는 북중 국경 길목에서 제지당하고 말았으니 괴롭기 짝이 없다.
실망과 분노를 쓸어안고 연길시에 있는 항공사를 찾아간다. 심양→인천→워싱턴행 비행기 출발을 겨우 이틀 앞당겼다. 이틀 간 도문을 둘러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지개벽한 연길시는 자전거홍수가 아니라 차량홍수로 경적소리에 미칠 지경이다. 옛추억을 더듬고자 먼저 연변대학으로 갔다. 대학 바로 길 건너(기숙사 앞)에 90년대 초에 친하게 지나던 식당 아주머니를 만나기 위해서다. 왠걸 도시계획에 따라 옛건물이 철거되고 새로운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옛날에 있던 음식점은 간 곳이 없다. 대로변 건물 뒤로는 여관들과 음식점이 즐비하다. 유독 <조선족 모텔>이라는 간판이 눈에 뛴다.
조선족 모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선다. 주인이 바로 옆에 김밥집이 있다며 가보란다. 7년이나 서울의 어느 식당에서 일하고 돌아온 조선족 여인이 김밥전문식당을 한다고 귀띰해준다. 메뉴의 맨 위에 "진라면"이라는 게 있다. 2개를 시켰더니 라면 2그릇이 나온다. 서울에서 보는 한식들 메뉴가 벽에 붙어 있다. 연변대학에 유학하는 서울 학생들이 단골로 이용할 수 있어 자리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손님은 한족과 조선족이 절반씩이라 한다. 손님들의 대부분이 김밥을 먹는 게 특이하다. 이제는 김밥이 중국에서도 유행해진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서울의 음식문화가 특히 중국의 동북 3성에 많이 전파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변대학 바로 맞은켠에 있는 "한국식품점"에는 전부 남쪽에서 온 물건들이다. 라면 두 그릇을 해치우고 산책을 한다. 뒷골목은 옛날과 다를 바가 없이 지저분하고 어수선하다. 그러나 문명과 문화의 발달에 비례해 멀지 않아 뒷골목도 깨끗한 거리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간다. 숙소에 돌아와 주인 이종범 씨(50대 후반)와 다방면에 걸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조선족임을 강조한 간판을 달았는데,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연길에서는 오히려 조선족이라고 하는 게 더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 종업원이 전부 한족인 이유가 뭐냐고 물으니 조선족 젊은 사람들은 이런 데서 일을 안 하기 때문이란다. 거의 서울로 갔거나 베이징, 상해 같은 큰 도시로 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시골에는 노인들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쪽과 같은 현상이 여기서도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입에 거품을 물고 "초기 서울에 가서 돈을 번 조선족들은 재산을 굴리고 비교적 잘 가정을 꾸린데 반해, 요지음은 서울에 간 조선족들은 거의 가정파탄이 났다"고 언성을 높인다. 부부가 같이 서울에 간 경우는 다르지만 한 쪽이 간 경우는 태반이 절단났다"고 한다. 이씨는 자기의 모텔이 중국돈 1백만 유안이 넘는 가치라고 하면서 이제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게 취미라고도 한다. 지난달에는 동료사업가들 일행이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다면서 "평양은 정말 깨끗한 도시"더라고 한다. "평양에 가서야 통일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말도 한다.
연길에서 도문으로
이미 훈춘, 연길을 봤으니 북중 국경도시인 도문을 둘러보는 게 보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도문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급행열차로 심양으로 간다는 계획을 짰다. 심양 <칠보산호텔>에 투숙해서 소문난 평양냉면을 즐기고 이튿날 여유롭게 인천행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문기차역 가까이에 있는 여관으로 들어섰다. 한족 여관이긴 하나 하루밤만 지내면 심양으로 간다는 생각을 하고 이층 방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공동 화장실과 욕조실을 보니 도무지 맘에 안들어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을 했으나 미리 치룬 여관비를 되달라고 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끝내 주저앉고 말았으나 후회가 막심하다.
일단 보따리를 방에 두고 시내 관광을 하고저 역전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쪽으로 간다. 택시 운전사들이 중국말로 서로 모시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우리말로 어딜가느냐고 묻는 택시기사가 있다. 다짜고짜 그 택시에 올라타고 <도문강공원>으로 가자고 했다. 도문강이 북중 국경인데, 여기에 도문강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면 북의 <남양>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90년대 초, 이곳에서 남양을 바라봤을 때엔 조용한 시골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오늘 보는 <남양시>는 어제의 시골이 아니라 고층건물들이 꽤 많이 보이는 도시의 풍모를 갖추고 있는 듯하다. 90년대엔 다리입구 중국측 세관이민국 쪽은 보잘것없는 작은 제방에 불과했었다.
그 당시 이 제방 (언덕)에는 북측 남양을 보기 위해 설치된 유료 만원경이 여럿 있었다. 만원경을 통해 <남양>을 바라보는 모습이 나의 마음을 착잡하고 괴롭혔던 기억이 새롭다. 분단의 현실을 이곳에서도 목격하는 게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예전에 보이던 유료 만원경은 간데없고 지금은 이곳이 훈륭한 공원으로 변해 있다. 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붐빈다. 도문시를 돌아보니 훈춘, 연길에 비해 매우 낙후됐다는 인상을 준다. 국경도시인 만큼 전망은 있어 보이나 발전이 매우 늦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운전사와 같이 평양에서 운영하는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그 식당을 찾아나섰지만, 찾을 길이 없다. 90년대 초, 도문에 있는 평양식당에서 맛있게 음식을 먹은 기억이 있기 때문에 찾아나섰다. 그러나 이미 문을 닫은지가 오래라는 것을 알았다. 훈춘과 연길에는 있다고 하나 거기를 갈 형편이 못된다.
우선 내일 가는 도문→심양 급행열차표를 사는 게 급해서 매표소로 달려간다. 조선족 운전기사가 우리말이 좀 서툴러 소통에 문제가 있었는지, 내일이 아니라 모래 떠나는 급행표를 산 것이다. 내일 떠나는 기차표가 필요하다고 했으나 이미 매진되고 없어 모래 떠나는 기차표를 샀다는 것이다. 기절할 노릇이다. 모래는 심양에서 인천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 날인데, 운전사가 옆에 있으니 욕도 못하고 환장할 지경이다. 황급히 완행열차표라도 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방도가 나온 것이다. 완행은 무려 14시간 이상 걸려서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나 저녁에 떠나는 인천행을 탈 수가 있다. 도무지 중국 쪽에서는 계획되로 되는 게 없다. 끝내 <칠보산호텔>에서 하루밤 즐기며 맛좋기로 유명한 평양냉면을 먹을 수가 없게 됐다. 오랜 시간 친절하게 안내한 조선족 기사에게 수고비를 섭섭치 않게 지불하고 해어졌다.
배는 고프나 중국 음식점에서 풍기는 독특한 냄새 때문인지 입에 맞질 않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기막힌 생각이 하나 떠오른다. 군고구마 두 개를 사가지고 여관으로 들어선다. 고구마란 분도 있고 달아야 제격인데, 도문의 것은 물고구마에 달지도 않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나의 끼니라 만족할 수 밖에 없다. 고구마 하나를 먹고 잠이 들었다. 밖에서 어떤놈인지 요란하게 노크를 한다. 겁이 나서 숨을 죽인다. 그런데 약 1시간 후, 다시 노크 소리가 요란하다. 옛날 생각이 문듯 떠오른다. 미국서 공부할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고 미주리주의 세인트 루이스라는 도시로 갔다. 값이 싼 YMCA호텔에 들었다. 이 호텔은 좀 과장하면 투숙객이 전부 동성연애자들이다. 그런데 밤이 새도록 문을 때리고 발로 차니 겁에 질려 죽을번 했다. 문을 열어주는 날에는 강강을 당할 수 밖에 없으니 문을 안에서 있는 힘을 다해 떠밀고 버티는 바람에 다음날 팔을 움직일 수 없었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11-10 14:58:57 새 소식에서 복사 됨]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