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168] 조국해방 70년과 한국의 공포정치를 다시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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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태영 작성일15-09-08 19:0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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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68] 제3세계 눈으로 식민지 한국 파헤친다.
조국해방 70년과 한국의 공포정치를 다시본다
이승만의 탄압정치 <특무대>를 계승한 무서운 손들:
박정희 <중앙정보원> 전두환<안기부> 이명박근혜 <국정원>
유태영 박사(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조국해방 70년, 분단70년 세월 동안의 한국 정치는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 미국식 민주주의 수호>라고 하는 미명으로 미국의 <지배정책>에 대한 <짝사랑 정치>를 보여 주었다.
그러면 미국의 <지배정책>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지배정책의 첫째는 미국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를 심화시키고 계속하는 <식민지 영구화 정책>이다. 둘째는 한반도의 남 과 북의 분단을 고착시키고 계속하려는 <분단영구화정책>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이러한 두 개의 정책을 70년 동안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이데올로기를 무기로 삼으면서 70년 동안이나 우리 민족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남북분단을 영구화하고 있는데 대하여 한국 민중들은 역사의식의 눈을 뜨고 미국의 야만적인 <식민지정책>과 <분단정책>에 항거하여 70년 동안 줄기차게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간략하게 70년 동안 미국의 식민지-분단정책에 맹종하면서 종속되어 있는 한국의 망국적인 역대 정권들을 살펴본다. 동시에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역대 독재정권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생사를 각오하고 투쟁한 민중들의 구국적인 항쟁의 역사를 간추려 살펴본다.
1.이승만 정권의 <특무대>와 김창룡
1948년 10월에 이승만 대통령이 신성모 국방장관을 불러 유능한 정보장교를 추천하라고 지시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정보국의 김창룡을 추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의 정보 업무 보고를 받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지금까지 미국 군사고문단의 보고만을 받고 있었는데 김창룡 정보장교의 보고를 받고 보니 이제야 올바른 보고를 받게 됐다.>라고 하면서 만족해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창룡을 방첩대와 특무대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김창룡은 누구인가?
김창룡은 만주에서 일본 관둥군 이등병으로 근무했으며 헌병 교습소 특수훈련을 받고 비밀사복정탐원으로 활약하여 일본군 오장이 됐다. 김창룡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에 충성하는 정보전문 군인이었다.
8.15 해방후에 김창룡은 한국군 육군 소위로 처음에 임관하였으나 일본군에서 정보활동에 공로를 세운 것을 인정받아 곧 대위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정보장교로 근무했다.
그런데 그때 <박정희 소령>이 남노당에 가입하여 <여순반란사건>에서 주동역활을 하다가 체포되었는데 김창룡 정보장교는 박정희 소령을 메우 엄하게 취급하여 심문을 하고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하지만 육군본부 정보국장인 백선업 대령을 비롯하여 일본군 출신 고급장교들이 한 목소리로 박정희 소령에 대한 구명운동을 강행하고 있었다. 김창룡 정보장교도 어쩔 수없이 박정희 소령 구명운동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으며 박정희는 무죄로 출옥했다.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로 불림을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는데 1951년에 나이 35살로 특무대장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 누구든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김창룡 특무대장에 의하여 <국제공산당>에 가담한 좌파분자라는 누명으로 죄인이 되고만다. 김창룡은 이승만을 반대하면 그 누구던 좌파로 만드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창룡 특무대장이 이승만 정권에 충성하면서 친구에 대한 의리도 없고 이권에 상반되는 경우에는 그 누구를 막론하고 <빨갱이>로 취급하는 습관이 극심하여 결국은 군부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1956년 3월 30일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 그런데 놀랍게도 김창룡은 특무대 직속 부하인 허태영 대령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왜 어찌하여 허태영 대령은 김창룡을 저격했나? 김창룡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공산당 1명에 선양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은 마구 살해하고 있었는데 이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 바로 김창룡에 대한 허태영 대령의 저격이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김창룡 특무대의 만행을 간략하게 간추린다.
ㄱ. 6.25 전쟁을 전후하여 순진한 국민들에세 <쌀 준다>라는 기만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 중에서 20만 명을 좌경불순분자라고 정죄하여 살해했다.
ㄴ, 여순반란사건은 어떻게 발생했나? 제주도에서 4.3 반정부 군중 폭동이 벌어졌는데 이승만 정권은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군병력 동원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1948년10월에 군인 2000명이 이승만 정권의 군병력 동원명령을 거역했다. 이것이 이른바 <여순반란> 사건이었다. 박정희 소령은 이 <여순반란> 사건에 있어서 주동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 소령의 전향으로 인하여 폭로된 사실은 사병, 하사관, 장교 등 4,749명의 군인들이 이승만을 반대하는 좌익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처형을 당했다.
ㄷ.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암살사기극>을 연출했다. 김창룡 득무대가 꾸민 허위적인 연극은1952년에 6.25전쟁 2주년 기념식에서 김시현과 유시태가 <불발탄권총>을 들고 이승만 대통령 뒤 3 미터까지 가까히 접근하여 대통령 <암살사기극>을 연출했다.
하지만 대통령 암살범인 김시현괴 유시태는 처음에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됐으며 그 후에 자유의 몸으로 석방됐다. 참 놀라운 정치사기극이었다.
김창룡 특무대 비밀공작으로 실제로 암살과 사형을 당한 애국자들은 1949년에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하여1959년에 조봉암 사형, 1947년에 여운영 암살과 서민호 총격 등 특무대 비밀공작에 희생된 사람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특무대가 저지른 반민족적 죄행들을 파헤쳐 밝힌다면 한국
의 현대사를 다시 기록해야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2.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김재규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5.16 군사 쿠테타가 발생한지 한 달 후1961년 6월10일에 김종필에 의하여 창설됐다. 김종필은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라고 육사 8기생의 권력을 과시했으며 <우는 애도 중앙정보부 온다 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라고 했다.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는 미국의 CIA를 그대로 모방하여 세웠다. 박정희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이유와 목적은 <무서운 곳이 반드시 하나 있어야 한다>라는 통치방법을 주장하면서 무섭고 절대권력을 소유한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것이었다.
1964년에 이르러 중앙정보부 비밀요원은 전국 방방곳곳에37만 명이 숨어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보유하고 박정희 군부정권의18년간 통치수단으로 삼고 있었다. 박정
희 군사정권이 18년간 통치하면서 저지른 <대형사고>들 중에서 가장 치욕적 사건들을 간추려 살펴본다.
ㄱ. 부산 김지태의 재산과 부일장학회 탈취
박정희는 쿠테타정권의 권력을 악용하여 제일 첯번째로 부산 김지태의 막대한 재산을 탈취했다. 김지태의 기본 재산은 3개 신문사와 문화방송, 부산의 땅 10만여 평 그리고 <부일장학회> 등 당시 3개 시중은행의 평가로8억5천만 원이었다고 한다.
<부일장학회>는 박정희-박근혜 가문의 소유물이 되어 <정수장학회>로 개칭했으며 정치적으로 막강한 힘을 오늘도 과시하고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고 김지태의 부인
송헤영과 김지태의5남 김영철의 눈물의 고백을 통하여 모든 것이 밝혀졌다.
박정희 정권이 김지태의 재산을 탈취하기 위하여 <자유당 시절 부정축재>라는 이유
와 <밀수범>이라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 중에 있는 김지태를 강압적으로 설득하여 박
정희 정권에게 모든 재산을 헌납하게 했으며 그 대가로 무죄석방을 약속했던 것이다.
ㄴ. 동베르린사건(1967년-1969년)
중앙정보부는 윤이상과 이응로 화백을 비롯하여 194명 학생들이 동베르린을 거점으로 하여 <대남적화통일 공작을 벌였다>라고 있지도 않은 사건을 조작했다.
오직 극악한 고문을 통하여<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허위자백을
통하여 203명에게서부터 받아냈다고 중앙정보부는 발표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실제로 간첩행위로 판명된 학생은 1명도 없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중앙정보부는 동베르린 간첩사건을 조작했나? 그것은 박정희 정
권이1967년 6월의 총선이 총체적으로 부정선거였는데 반공주의로 부정선거를 강행한 사실을 감추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동베르린 간첩사건을 조작했던 것이다.
ㄷ. 인혁당사건 (1974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정치 행태>를 반대하는 세력이 점차적으로 확장되는 것을 봉쇄하기 위하여 중앙정보부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위반자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선고 후 18시간 만에 급하게 사형을 집행했다. 또 영장발부도 없이1,024명 학생들을 체포했으며 그 중에 253명이 투옥되었다.
하지만 지난 2002년에 28년 전의 인혁당 사건을 재심했는데 사형을 당한8명에게 무 죄가 밝혀졌으며 유가족들에게 보상금637억 원이 지불되었다. 그런데 박근혜는 <그 당시 법적으로 결론이 났던 사건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재판이었다>라고 하면서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의 독재정권의 인혁당 사건을 변호했다.
ㄹ. 1970년11월13일에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중앙정보부는 노동자들에게 <시키는 대로 일하고 주는 대로 받으라>고 강요했으며 이에 항거하면 사상이 불순하고 위험한 좌경이라고 매도하고 투옥시켰다.
노동자 전태일은 전체 노동자들을 위하여 <근로기준법>을 요구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해고를 당하고 실업자가 되어 학대를 받는 것뿐이었다. 전태일은 전체 노동자들을 위하여 최후의 수단방법으로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사르고 분신했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한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중앙정보부는 박동선을 통해 미국의 유능한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들에게 매년50-100만 달러의 뇌물을 비밀로 제공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했다.
왜 어찌하여 중앙정보부는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막대한 달러 뇌물을 제공했는가? 그 이유는 미국이 박정희 정권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하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ㄹ.김대중 납치사건
1973년8월8일에 중앙정보원 5명이 김대중을 일본 동경에서 납치하여 몇 시간 후에 동해바다 깊은 곳을 향하여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 CIA비행기가 공중에 나타나 김대중 구명을 지시했으며, 김대중은 드디어 구사일생으로 사건발생 후 129시간 만에 동교동 집 근처에서8월 13일 오후 10시 경에 풀려났다.
박정희는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하여 2년 동안 계속하다가 1975년7월 21일에 조사종결을 발표하여 결국 김대중납치사건을 땅속에 묻어버렸다. 하지만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에 자기자신이 비극적인 시체가 되어 땅속에 묻혔다.
김재규는 왜 어찌하여 박정희를 1979년 10월 26일에 궁정동 안가에서 저격했을까?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무려 200여 명의 여자들과 항상 즐기고 있는 타락한 대통령에 대한 분개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을까? 물론 그것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국은 필요하면 김대중을 동해바다에서 구출하여 살려놓았다. 하지만 미국이 더 이상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면 용도폐기를 결정하여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이용하여 박정희 <저격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 해내외 지식인들간에는 공개된 비밀로 되어 있다.
김재규가 거사 후에 너무나 안일한 태도를 취한 것은 <내 뒤에는 미국이 있다>는 것을 무언과 유언으로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재규는 박정희 저격 당일 오후 2시에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턴을 비밀리에 만난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다.
하지만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대한 당시 미국이 관련된 비밀문서는 완
전히 <비공개 문서>로 처리되고 말았음으로 사건의 진상은 비밀속에 꽁꽁 숨겨졌다.
뿐만 아니라 육영수를 저격한 문세광도 감옥에서 너무나도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나온 뒷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안 죽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수감생활을 안일하게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을 눈치챈 문세광은 형무소 목사에게 <혼도데스까?>, <아니 이것 정말입니까?>라고 비명을 터뜨렸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중앙정보부의 비밀정치와 이중삼중의 외세에 의한 반민족적인 비사는 끝이 없다.
3. 전두환 정권의 <안기부>와 백담사
1961년에 박정희가 창설한<중앙정보부>는 1981년1월 1일에 전두환이 <안기부>로 개칭했다. <안기부, 국가안전기획부>는 1999년까지 18년간 지속되었는데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의 3자연결이 최악의 망국적 독재정권 연장의 역사로 이것은 18년 동안 계속되어 왔었다.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 11기생이며 노태우, 김복동, 정호영 등 동기생들이 <하나회>를 조직했다. 전두환은 육사 학생시절에 육사 참모총장의 신임을 받아 그의 딸 이순자와 결혼했다.
1979년 10월에 박정희 사망 후에 군부세력을 주도하고 있던 전두환은 김대중을 가택연금했으며1980년9월에는 김대중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김대중에 대한 전두환의 불법적 연금과 사형선고에 분개한 광주 민중들이 1980년5월18-27일에 자연적으로<광주민중항쟁>을 일으켰다. 전두환은 38선 전방의 군부대를 불법적으로 동원하였으며 광주민중들을 향하여 발포명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은 1980년 8월에 서울 장춘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대의원회>를 개최하여 경쟁자 없이 11대 대통령에 당선됬다. 그리고 1981년 2월에는 개정된 새 헌법에 따라 역시 장춘체육관에서 선거인단의 90.6%의 지지로 제12대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조건부로 축하했는데 그 조건부는
<사거리180km 이상과 탄두 무게 453kg이상을 개발하지 않겠다>라는 약속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1987년까지7년동안 집권을 했으며 1987년 4월13일에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첫째, 야당의 어거지 때문에 개헌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으며 88 올림픽 후에 고려하겠다. 둘째, 나의 대통령 후임자는 노태우 후보자이다. 선거 없이 그냥 정권을 이양하겠다. 전두환의 대국민 성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극이었다.
전두환 7년, 노태우 5년, 김영삼 5년, 17년간의 <안기부>불법 통치를 간주려 본다.
ㄱ. 실효성이 전혀 없는 <금강산 땜>과 <평화의 땜>을 정권안보용으로 선전했다. 서울을 삽시간에 쓸어버린다고 안기부는 선전하여 땜 건설 속임수로 수천억 원을 낭비했다.
ㄴ. 1987년의 <수지 김 간첩사건>은 안기부의 조작이었다. 1987년 1월에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에 윤태식이 나타나 <수지 김 여간첩사건>을 보고했다. 하지만 사실은 윤태식이 부부싸움 끝에 부인을 살해하고 처벌을 회피하려고 자기 부인은 <여 간첩>이었다라고 거짓말로 허위보고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윤태식의 허위보고를 사실인 양100%악용하여 윤태식을 서울로 압송하여 공식 기자회견을 통하여여 <수지 김 여간첩사건> 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당시 싱가포르 정부는 한국 안기부의 음모를 꺾을 수 없었음으로 모른척 했다.
ㄷ. 삼청교육대는 전두환이 새로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사회정화라는 명칭으로1980년 8월 4일에 발표했으며 반정부활동에 의심이 되는 일반 시민과 학생들 39,000 여명을 강제로 4주간 <순화교육>을 받도록 했다.
웃기는 이야기는 박근혜의 남자로 알려진 문제의 <최태민>이 삼청교육을 받도록 강원도로 끌려갔다. 박근혜는<전두환 오빠>에게 간청하여 최태민은 즉시 서울로 돌아왔다.
ㄹ. 박종철 고문치사, 이한렬 사망, 권인숙 성고문 그리고 6월항쟁이 계속되었다.1987년 1월 14일에 서울대학생 박종철을 전기고문, 물고문을하여 남영동 분실에서 사망했다.
안기부는 박종철 사망을 은폐하여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했다. 이한렬은 경찰이 데모하는 학생들을 향해 쏜 체류탄에 맞아 사망했다.
28년 전1987년에 많은 학생들이 사망했는데 그때 당시 특히 박종철의 고문사를 담당했던 검사는 박상옥 검사이었다. 그런데 박근혜는 박종철 사망을 은폐했던 박상옥을 2015년에 <대법관>으로 임명했다.
1986년 서울대학교 학생 권인숙은 위장취업을 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었다. 하지만 권인숙은 부천 경찰소에 연행되어 문기동에게 조사를 받던 중 수 치스러운 성고문을 당했다. 권인숙은 개인의 부끄러움을 초월하여 민주화운동에 대한 정의감을 존중히 여김으로써 과감하게 경찰의 야만적 성고문 사실을 언론에 폭로했다.
1987년 6월 10-29일에는 전국적으로 <6월 민주화항쟁>이 전개되었다. 전두환은 집권 말기에 민주주의 선거를 거부하고 노태우에게 간접선거를 통하여 정권이양을 한다고 발표했다. 그럼으로 전두환-노태우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던 것이다.
6월항쟁의 승리로 인하여 전두환-노태우가 주장하는 <대의원 간접선거>음모는 철회되었으며 공명하고 정당한 민주주의 선거제도가 드디어 시행됐다.
하지만 이게 웬말인가?
김대중-김영삼의 단일화가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6월항쟁에서 쟁취한 민중의 승리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감영삼 양 김의 불화 속에서 기회주의를 마음껏 이용한 노태우는 KAL기 폭파사건을 조작 이용하여 1987년 선거에서 양 김을 따돌리고 승리하였으며 제13대 대통령으로 1988년에 취임했다.
ㅁ. 1987년 KAL 858기 폭파사건은 전두환 안기부 최고 최대의 음모조작사건 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KAL기 폭파음모사건으로 승객95명과 승무원20명이 실종됐는데 안기부는 북한의 공작에 의한 폭파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런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안기부는 오직 김현희를 북한이 보낸 폭파범이라고 주장하면서 김현희를 곧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날이 대통령 선고 바로 하루 전이었다. 반공주의에 심리적으로 마비가 되고 세뇌된 사고방식으로 수십 년 동안 살고 있는 보수주의적 대중심리에 대하여 안기부는 마음놓고 대통령 선거용으로 KAL기 폭파사건을 이용했던 것이다.
안기부는KAL기 폭파범으로 체포한 김현희는 죄인이 아니라 영웅적 천사처럼 우대
하고 있으며 김현희는 결혼하여 호화롭게 살고 있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전두환 전임 대통령 덕분으로 대통령이 된 큰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까? 그것은 통상적으로 표출되는 전임자의 부정축재의 폭로인데 특히 전두환의 부정축재는 상상을 초월한 태산같은 천문학적 거액의 부정축이재다. 노태우 대통령의 수단과 방법은 전두환을<백담사>로 보내는 <짜고치는 꼬스톱>이었다.
ㅂ.1993년 2월 25일에 <민주화운동 반역자>로 낙인이 찍힌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김영삼은 <대통령병에 걸린 중환자>로서 전두환이 창당한 민정당과 박정희-김종필이 창당한 공화당 그리고 감영삼의 민주당 등 3당을 합당하여 1990년 2 월에 <민자당> 을 창당하여 민주화 운동을 배반하고 망친 전과자이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비열한 수단과 방법으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민주화 세력의 여론 때문에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들을 투옥하여<사형선고>의 엄포를 연발했다.
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4월에 전두환-노태우에게 무기와 17년 징역형을 내렸으며 그 다음 1997년12월20일에 특별사면을 내리고 22일에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무죄로 석방했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된 후에 너무나도 만족하여 측근들에 말하기를 <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안기부”가 팔요하제예>라고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했다고 한다.
4. 이명박근혜 정권 <국정원>과 천안함-세월호 사건
이명박근헤 정권은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하여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미국측 견해로는 절대로 그렇치 않다. 왜냐하면 미국은 김영삼의 오락가락하는 불투명한 대북정책에 항상 골머리 아파했는데 오히려 김대중-노무현은 미국을 안 심시켰다. <햇빛정책>은 <미군철수정책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여 미국의 호의를 획득했던 것이다.
노무현은 <미국에 사진이나 찍으려 기지 않겠다 >라고 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한 <자주외교>는 실종되었으며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푸들>로 전락했다라고 평가 되고 있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동일한 주장을 했는데 <통일 이후에도 동북아 지역 균형자로서 미국이 한국에 계속하여 주둔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하여 미국을 안심시켰던 것이다.
<잃어버린 10년>을 주장한 이명박근혜의 <국정원>은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안기부>의 악행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오히려 더 극악에 이르고 있다.
1999년 1월에 김대중 정권이 <안기부>를 해체하고 <국정원>을 새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명박근혜 정권하에서의 <국정원>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국정원은 획득한 정보를 정부에 보고하지 않고 직접 해석하고 분석하여 정치에 관여함으로서 정권의 헌정질서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은 청와대를 국정원의 분소로 만들어놓고 통치를 하고 있다.
국정원이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반민족적이며 반통일적인 행태들을 간주려 살펴본다.
ㄱ. 이명박은 1996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지만 부정부패를 저지른 죄행으로 재판을 받던 중에 국회의원을 자진사퇴하고 미국으로 뺑소니를 했으며 2000년 1 월에 김경준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경준은1999년 2월에 이명박을 만났다고 주장한다.
이명박과 김경준은 한국에서1999년 4월에 동업자로 BBK를 창설하여 5,200여 명의 소액투자들에게 도합 수배억 원의 피해를 끼침으로서 자살자들이 발생하는 재난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명박은 2007년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자가 됐는데 BBK사건의 의혹이 부상하자 이명박은 미국으로 도망하여 수감 중에 있는 김경준을 한국으로 소환하는 것을 적극 반대했다.
하지만 여론에 못이겨 할 수 없이 김경준을 소환하여 투옥했다. 김경준은 MAF-AM 파파파스를 통해 불법적으로 거액의 돈세탁을 한 것이 폭로되어 충격을 줬다. 이것은 오히려 보다 더 크게 놀러운 사실은 이명박이MAF의 회장이며 실소유자로서 김경준 돈세탁의 공범자인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의 법원은 중법자 이명박에게 최종적으로 재판의 <승소자의 행운>을 안겨 주었다.
ㄴ. 천안함 침몰원인을 끝까지 감추고 있는 국정원이 이제는 진상을 진실대로 밝혀야 한다. 오죽하면 북한이 천안함 침몰 5주년에 <공동조사>를 제안했을까? 국정원이 제 아무리 침몰의 원인을 감추려 해도 날이 갈수록 국제사회에서 거짓으로 밝혀지고 있으므로 한국의 큰 망신꺼리가 되고 있을 뿐이니 이명박근혜 정권은 이제라도 천안함 침몰의 진상을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
ㄷ. 이명박의 4대강 의혹을 국정원이 더이상 감출 수 없다. 이명박의 이른바 <사자방> 의혹이 있다. “사대강 의혹, 자원외교 의혹, 방산비리 의혹” 등 세가지 의혹들을 총칭한 것이다. 그런데 <사자방>으로 인하여 발생한100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국가의 손실을 회수하기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사대강 사업으로 인하여 물고기 떼죽음, 녹조발생, 큰빗이끼벌레 번창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과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정원은 4대강사업의 실패를 주장하는 사업계의 전문가들과 환경단체들을 <종북주의 단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ㄹ.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가 없었더라면 박근혜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제 18대 대통령 선거에 국정원이 불법적으로 개입하여 <전자개표>로 선거결과를 조작했다는 것은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사실들로 입증되어 왔음에도 이 사건들은 음지에서 잠자고 있는 형편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을 18년간 지배하여 한국을 암흑 속에 가두웠 놓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역사상 최악의 불법수단과 조작으로 국정원을 이용하여 제 18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알게 되었는데 이 불법사건들은 검찰당국이나 사법당국에 의해 공정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사회 부조리로 증명되고 있다.
박근혜를 국정원 <댓글 대통령>이라고 정죄하는 이유가 무었인가? 그것은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인터넷에 수만 건에 달하는 <박근혜 지지댓글>을 유포했기 떼문이다.
국정원 인터넷 부정선거 조작 총책임자인 원새훈은 뻗치다가 결국 <공직선거법위반>이라는 범죄로 파면되었다. 하지만 인터넷 부정선고 조작에 의하여 당선된 박근혜는 끄떡하지 않고 오늘도 대한민국의 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다.
국정원이 대선을 위하여 <해킹프로그램>을 이탈리아에서 처음 도입한 것은 2012년 2월 6일이었다. 그러니까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자로 운동을 사작한 시기와 동일한 시기에 국정원이 <인터넷 해킹프로그램>을 이탈리아에서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이 이탈리아에서 구입한 <해킹프로그램>의 위장명칭은 <5163>이다. 왜 어찌하여 <5163>인가? 그것은 <516>은 박정희가 쿠테타를 일으킨 날자를 뜻하며, <3>은 박정희가 새벽3시에 한강철교를 넘었다는 숫자를 조합해서 만든 위장명칭이라고 한다.
국정원이 이탈리아에서 구입한 <해킹프로그램>의 값은 얼마인가? 2012 -2015년까지 6차에 걸처 구입한 총지불액 은 약10억2천171만 원이라고 한다. 국정원이 구입한 <헤킹프로그램>은 댓글, 모바일, 컴퓨터를 비밀로 활용하여 선동과 감시 등을 통하여 박근혜 정권을 창출했으며 오늘은 정권유지용으로 게속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ㅁ.세월호의 진실을 감추는 국정원은 국민을 기만하는 많은 정치적 비밀을 품고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자랑하면서 세계10위 권의 문명국들에 속한다고 과시한다.
하지만 2014년 4월 16일 오전8시경에 진도 근처의 해상에서 세월호가 침몰하여 승객 476명 중 296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된 지1년 6개월이 지난 오늘에도 박근혜 정권의 국정원은 사고원인의 규명을 요구하는 민중의 소리를 외면하고 오히려 사상이 불순한 반정부 좌경의 위험성이 있다고 공갈협박을 하고 있다.
아프라카 제3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인 정치적 행태를 한국 국정원은 오늘도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다.
세월호 생존자들의 정확한 증언에 따르면 <쿵하는 소리기 들린 직후부터 세월호가 좌현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라고 밝히 증언했다. 이러한 간단명료한 증언을 근본적으로 봉쇄해 버리고 국정원은 애꿎은 <유병헌의 가짜 시체놀음>으로 나라와 국민을 혼란 속으로 유도하고 있다.
국정원의 발표는 그 어느 것이나 국민의 의심을 부추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새월호 침몰 속에서 <왜 어찌하여 우리를 구하지 않았어요?>라고 질문을 던지는 세월호 침몰 사망자 어린 학생들에게 우리는 끝까지 진실규명을 통해서 대답을 해주어야 하겠다.
이 글을 끝 맺으며,
이명박근혜 정권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는 <잃어버린 10년>이다. 그러면 8.15 해방 후 70년에서 <잃어버린10년>을 제외하고 남는 60년은 도대체 어떠했는가? 이60년은 <중앙정보부, 안기부, 국정원>이 통치한 기간인데 <못살겠다 갈아보자> 를 외친 것이 바로 이 60년 동안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 60년 동안에는 <6.25전쟁>이라는 3년이 있었다. 이 3년 동안에 미국의 폭격을 지휘하였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뻔뻔스럽게 말하기를 <3년 동안에 우리는 뭐 20%에 달하는 인구를 죽였으며… 북한에 있는 모든 마을들을 불태웠으며 남한에 있는 것도 다 태워 버렸다>라고 그때의 한국의 비극을 생생하게 회고히면서 증언했다.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말이 너무나 뻔뻔스러워 대꾸도 하기 싫은 말들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하나도 틀린 말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의 무차별한 폭격으로 남과 북 전체 인구의20%에 해당하는 522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한 통계자료는 밝혔다.
미국의 침략적 잔혹한 학살행위는 한국에서만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래
미국의 제3세계에 대한 식민주의 침략에 의하여5,000-5,500만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은 이유는 오직 미국이 주도하는 가짜 자유를 위해서 싸움을 유발시킨 내전들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국에 대하여 <해방자>라고 하는 불변의 위치를 70년 동안 고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남-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패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미일 3국동맹>을 체결하였으며 한국에서는 <분단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미국의 아시아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은 <전시작전권>을 주한미군사령부에게 완전히 넘겨 주고 있다. 하지만 주한미군사령부는 아무 권한이 없으며 <미 태평양사령부>가 모든 작전권을 가지고 배후에서 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주한 미군의 군사력을 최첨단 무기로 교체하여 최강의 군사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은 태평양 중시작전에 따라 중동과 다른 나라지역의 첨단의 무기들을 주한미군에게 이전 보급하여 막강한 전투력을 보완 강화 하고 있다.
미 태평양사령부의 작전 지휘 하에 있는 주한미군의 군사력을 최첨단 무기로 보충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이 세계 제일의 군사력으로 북한을 언제든지 침공할 수 있다는 <공갈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러면 이와같은 미국의 <공갈의 메시지>에 대하여 <북한의 반응>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의 속담으로 표현을 한다면 <이열치열>의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핵은 핵으로 대응하고, 인공위성은 인공위성으로 대응하는 것이 곧 <이열치열>이다.
6.25 전쟁때 미국의 핵무기를 대항하여 인민군 보병들이 소총을 들고 싸우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기고 승리한 역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고난의 전쟁을 되풀이 하지 않는다고 조선은 미국을 향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다.
2012년에 조선인민군은 열병식에서<이온 추진비행체 5대>를 비행 제시하여 인민군의 위력을 제시했다. 미국은 조선이 벌서 10년 전부터 플라스마 스탤스 전투기를 실전배치하고 있는데 놀란 적이 있었다. 조선은 2015년에 <수중탄도탄>시험발사에 성공하여 세계적으로 군사력을 입증했다.
이제 미국이 조선의 소형화된 핵무기는 물론이고 우주무기 전자이온의 기술 등 실증된 조선의 군사과학에 굴복하여 결국 <북미평화협정>을 맺을 날이 임박해 오고 있음을 감지한다.(끝)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09-08 19:02:35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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