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66] 한일협정 50년, 분단고착 70년은 애초 잘못 꿴 망국적 환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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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태영 작성일15-07-06 13:29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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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66] 제3세계의 눈으로 식민지 한국을 파헤친다
한일협정 50년, 분단고착 70년은 애초 잘못 꿴 망국적 환멸
친미친일 변절자 양아치 정치인들로 가득찬 이명박근혜 정권
유태영(재미동포전국연합회 고문)
일제 36년과 분단 70년의 망국적인 <친일파>와 <친미파>들이 지배하고 있는106년 동안의 한국의 역사는 실로 환멸의 길고 긴 세월의 연속이다.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는 변절자 사꾸라 박쥐 철새 정치인들이 기승을 부리며 계속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의 비극적 현실이다.
일본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동참하여 우리 민족에게 물질적 손실과 정신적 부패를 야기시킨 친일파들을 <망국적 매국노>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매국노 친일파 1세들이 체결한 <한일협정 50년>의 굴욕적인 비극이 친일파 제2세들과 3세들에 의하여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것을 분명히 규명하고 살펴 보아야 하겠다. 하지만 지면상 제한으로 극히 간략하게 요약한다.
1. 친일파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과 이완용의 추종자들
치욕적인 <한일합방>의 역사는 <을사5적> <정미 7적> <경술 9적>등 모두 21명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이들 21명 중에서 매사에 대표적으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이완용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하고 발표한 친일파 명단에 의하면 악질적 친일파5,207명으로 밝혀졌다. 이 악질적인 친일파들 5,207 중에서 역시 대표적인 친일파는 이완용이었다. 이완용은1907-1909년에 고종에게 왕위에서 퇴임할 것을 강요하여 <정미조약>에 서명하도록 음모를 꾸민 장본인이며 대한제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일본에게 넘겨주도록 작용했다.
이완용은 이조 대한제국의 왕족 출신으로서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눈치채고 <친로에서 친일>로 변신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도록 작용했다.매국노 변절자 이완용은 <한일합방 조약체결>에 대하여 <하느님의 뜻>이라고 망언을 했다. 이완용은 이렇게 살다가 1926년에68세의 나이에 페렴으로 일본 침략자의 품안에서 사망했다. 이완용의 사망에 대하여 그 때 당시 한국 민중들은 울분을 터뜨리며 <매국노 이완용 이 새끼는 절대로 사람이 아니다>라고 분노했다.
하지만 이완용의 추종자들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도록 죽음으로 보답한다>고 외치면서 1941년 8월 25일 결의대회를 개최하고 동참한 한국의 유명인사들이 120명이었다. 이들 120명중에 대표되는 유명인사로는 조선일보 방상훈, 중앙일보 홍진기, 동아일보 김학준이 있다. 문학계 이광수와 최현배, 최남선 교육계 김활란과 황신덕 그리고 군부에 박정희를 비롯하여 이 대표적인 친일파 군인들이 387명이 있었다.
이광수(1892-1950)는 소설, 시, 논설 등을 발표한 애국자로서 조선의 천재로 알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광수는1930년에 자발적으로 창씨개명을 주장했을뿐만 아니라 그는 일본 총독부가 작성한 비밀문서에 조선의 지식인38,000명을 살해하려는 비밀 살생부가 있다는 사실도 사전에 그러한 비밀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후부터 이광수180도 전향하여 친일언론인이 되어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등 반민족적 언론인이 되었다.
이광수는 기독교에 접근했지만 후에 반일 민족주의적 일부 양심적 기독교인들을 반대하여 불교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이광수는 1940년 일본 총독부가 발행하는 <경성신보>의 발행인 도쿠토미에게 개인적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의 내용에 <나 이광수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라고 기록됐다. 이광수는 대동아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위하여 <애국의 노래>를 작사했으며 최남선은 이광수와 함께 조선인 대학생들에게 일본군 학도병에 지원하도록 시국강연 유세를 했다.
이광수와 최현배, 최남선뿐만 아니라 여성계의 김활란(1899-1970) 은 어떻했는가? 김활한은 미국에 유학하여 한국여성으로서 최초의 철학박사학위를 획득했으며 YWCA를 창설했다. 김활란은 이화 전문학당의 미국인 교장 밑에서 학감과 부교장을 역임했으며 1939년에 제7대 교장이 됐다. 하지만 김활란은 이화 전문학교 교장이된 이후부터 친일파로 급변하는 변절자가 되어 일본의 식민정책과 대동아전젱을 미화하고 지지하는데 맹열히 선두에서 활약했다.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김활란은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으며 <조선민족말살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김활란은 일제의 창시개명 정첵을 적극 지지했으며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의 승리를 주장하면서 내선일체 주장, 결전 부인대회,애국여성단 창설, 신사참배를 열성적으로 주장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화여대의 학장이 된 김활란은 1938년에 이화대학 학생400명을 동원하여 친일 <애국자녀단>을 창설하여 단장이 됐으며, <친일 여성애국단체>를 조직하여 모윤숙, 황신덕, 임영신, 노천명, 박순천 등 유명한 여성 지도자들을 끌어들여 <조선임전보국단체>를 조직하여 악명 높은 <정신대> <학도병> 모집동원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1945년 1월에 김활란은 <조선언론인보국회>를 조직하여 이사가 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김활란은 1945년8월 15일에 일본 천황이 미국에 황복하여 한국의 광복이된 후에는 또 어떻했는가? 김활란는 변절의 명수로서 1945년9월에 <미국 군정 한국교육위원회>의 임원이 됐으며 재빠르게 한국 YWCA를 재건하여 회장이 됐다. 김활란은 여성우익단체를 조직 동원하여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였으며 UN에서 한국대표로 활약하면서 남북분단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김활란은 열성적 기독교인으로 자처하여1957년에 이화대학 교직원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금란 전도대>를 조직했다. <금란>은 <김> < 란>의 합성어로서 김활란을 대표하는 단어이다. 1958년에 망우리에 <금란교회>가 청설됬으며 1971년에 김홍도 목사가 제3대 담임 목사로 취임했다. 한국 교계에서 악명 높은 3대 교회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이명박이 장로인 <소망교회> 그리고 김활란이 시작한 <금란교회>이다. 이 세 교회의 공통점은 수 만 명의 교인들과 최대의 부자교회로서 보수주의와 반공 반통일을 주장하여 교세를 기하급수로 확장시킨 것이다.
또 이3 교회의 공통점은 ㄱ) 세습문제 ㄴ) 공금횡령 ㄷ) 간통죄 의혹 등이다. 특히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 2006넌에 그의 아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해 세습 논란을 이르켰으며 교회 재정 횡령 배임죄로 사법부의 최종 유죄판결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간통죄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는2014년 10월에 사기미수죄로 징역2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구속됬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하에서 김홍도 목사는 원심파기를 받고 오직 <허위광고죄>만 유죄가 되어 석방 됐음으로 김홍도 목사는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라 박근혜의 보호를 받고 있다. 1945년 해방된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모순된 친일파 변절자들 중에서 대표자라할 수 있는 여성 김활란을 하나의 예로 지목했을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매국노 친일파 5,207명은 모두 다 대동소이의 민족반역의 변절자들이며 그들의 범죄행위는 모두 다 동질의 악질적 민족반역의 범죄행위들이다. 지면상 제한으로 군인출신의 친일파로 알려진387명중에서 대표자로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박정희는 일본군 만주 신경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된 후에 유군 제8사단에 소속되어 일본에 충성하는 장교로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애국적 열사들을 토벌한 악질적 민족반역행각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계속 감행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1947년에 귀국하여 대한민국의 육군 장교가 됐다. 그런데 박정희는 남로당에 입당하여 <여수순천반란사건>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이승만 정부의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본래부터 변절과 밀고의 기질을 소유하고 있던 박정희는 <조선 남로당>을 배신하여 남로당의 모든 비밀작전에 대하여 대한민국 정보부에 밀고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역시 일본군 출신인 백선엽 정보국장의 도움을 받아 구명에 성공하여 육군 장교로 원대복귀 됐다.
박정희는 6.25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새운 덕분에 육군 소장으로 진급되었다. 박정희는 1961년에5.16 군사쿠데타를 이르켜 정권을 장악하고 대한민국의 막강한 통치자가 되어 친일행각을 또 다시 시작했으며 미국의 승인 하에서 독재정치를 할 수 있었다. 박정희는1961-197년 장기집권을 하면서 3선개헌과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친일친미 정치를 했다. 심수봉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매일 밤마다 여자들을 즐기면서 반드시 일본 노래를 부르는 것이 평생의 정상적 습관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아버지 박정희에 대하여 청와대에서 함께 생활한 박근헤는 여자로서 아버지의 악질적 죄악을 모를 리가 없다.
1962년10월 20일에 박정희는 미극을 방문하는 도상에서 일본수상 이케다에게 친서를 보냈는데 그 친서의 전달자는 김종필이었다. <본인은 한일양국의 국교정상화가 조속히 호전되기를 바라며 현재 좋은 분위기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곧 성사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1951년10월에 이승만 정권이 처음으로 한일협정 예비회담을 사작한 이래 14년 동안 제7차 회담을 통해1965년6월22일에 <한일협정>을 성사시켰다. 한일 간에 근보적으로 해결해야만한 문제들이 그대로 미해결로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일제36년에 대한 보상청구권문제, 재일교포 강제추방과 법적 지위문제, 평화선 문제, 징용과 위안부정신대 보상문제, 독도문제 등을 그대로 남겨놓고 박정희는 굴욕적 한일협정을 체결했다.
1965년 11월12일에 김종필은 일본의 집권당 총제 오노와 외무상 오히라를 통하여 <청구권문제>를 마무리 지었는데 무상3억불, 유상 2억불, 민간 차관1역불을 골자로 한 굴욕적 <한일협정>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일제 36년간 침략에 대한 보상이 절대로 아니며, 징용과 정신대에 대한 몸값을 담보로한 정치자금을 박정희 정권이 구걸한 것 뿐이며 김종필을 앞세운 검은 뒷거래뿐이었다. 1965년6월 22일에 체결한 <한일협정>에는 일본의 <한국식민지 36년>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일언반구도 없었으며 박정희는 일본에게 오직 면죄부를 발행한 것뿐이었다.
오늘 박근혜는 한일협정 50주년을 맞아 일본 아베 정권이 오는 8월에 공개하는 <이베 담화> 에서 <일제의 36년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표현을 사실상 제외하겠다>라는 입장을 미리부터 밝히는데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그저 묵묵부답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박근혜는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가 50년 전에 체결한 굴욕적이며 망국적인 한일협정을 체결한데 대하여 새로운 전략적 가능성은 전혀 없이 50년 전의 어두운 그림자를 또 다시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2. 변절자 386세대들로 가득찬 이명박근혜 정권 어이할고
3.1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선언문을 썼던 최남선을 비롯하여 이광수와 김활란 등의 별절의 역사는 1990년에 김영삼이 전적으로3당합당으로 사실상 연결 됐다. <호랑이를 잡기 위하여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고 변명하던 김영삼의 변절정치행각은 용공주의 시비를 무기삼으면서 민주화 운동의 도덕성을 근본적으로 파괴시켰다. 김영삼은 문민정권의 말로에 직장에서 쫓겨난 노숙자들을 양산하는 것뿐이였다. 김영삼의 변절을 계승한386서울대 출신 양아치 정치인 선봉자는 김문수이다. 김문수는 변신의 대가로 도저히 얻을 수 없었던 국회의원 자리를 손쉽게 획득했다. 김문수는 자신을 고문하던 정형근과 함께 김대중 정권을 괴롭히는데 동부서주하고 있었다.
김문수의 변절을 뒤따르는 386 서울대 출신 대표적인 사람은 이재호, 장기표, 전용학, 김민석, 등이 수 백 명이 있으며 그들은 민중에 대한 신뢰를 포기했다. 서울대 출신들이 빠지고 있는 변절의 논리함정은 엘리트주의다. 자신들이 무지몽매한 대중들을 이끌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관통한 그들의 학생운동권이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긴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김대중과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과거의386 세대들이 민주화운동을 우상화하면서 지금은 이명박근혜 정권하에서 돈과 이권과 기득권 줄서기를 하고 있으니 386세대를 오늘 우리 사회에서 몰아내야할 지경에 처해 있다.
박정희 타도와 김대중 만세를 웨치던 386 세대들이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을 신으로 떠 받드는 기회주의적 양아치 변절자들이 되고 있다. 이러한 386변절자들은 오늘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화해와 민족통일을 위한 시대적 사명과 과업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이 양아치 변절자인 것을 의식적으로 부인한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70, 80, 90년대에 쟁쟁한 대학생들로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위장취업을 하면서 군부정권과 투쟁하던 양심적 대학생들이6,000-8,000명 이상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횐머리가 희긋희긋해진 중년이 되어 큰 운동은 하지 못 하지만 여전히 삶의 현장에서 젊은 날의 정의로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들이 이제는 학부모가 되어 사춘기 자녀들에게 정의를 말하고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라고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변절한 일부386세대 정치인들은 어떠한가? 일부 386세대들은 보수화된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되고 있으면서 자기를 운동권출신 진보주의자라고 규정하는 것초차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이석기 위원을 국회에서 축출 투옥하는 박근혜 정권의 폭정을 열성적으로 찬동 지지하고 있다.
이들 변절자 날아다니는 철새386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도덕성과 진실성을 상실한 실망스러운 민족 반역집단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변절한 양아치 386날아다니는 철새정치인들에게 이제는 더 이상 ‘386의 소중한 명패’가 주어지지 않는다. 도대체 날아다니는 철새 386 기회주의 변절자 양아치 정치인들은 누구인가? 지면상 제한으로 편이상 일간 신문지들에서 자주 오르고 있는 386 이전과 이후 정치인들의 명단을 살펴 본다. 독자들의 판단으로 잘못된 기록과 그리고 누락된 많은 386 변절자들의 이름들을 삭제 또는 추가해주기를 바란다.
(무순) 이철승, 김영삼, 김덕용, 김문수, 김경재, 손학규, 장기표, 이재호, 홍준표, 서청원, 권노갑, 한화갑, 박준영, 한광옥,심재철, 신지호, 김진표, 홍정욱, 변희재, 김성식, 김승규, 권택기,김영우,김용태, 신상범, 정태근, 진성호, 허현준, 원유철, 박상규, 이근진, 김윤식, 강성구, 안동선, 오장섭, 김영배, 김영환,홍진표, 류근일, 이성현, 김성호, 정청래, 이인영, 김승남, 허인회, 고진화,우상호, 이기우,김태년, 김원길, 조해진,전여옥, 홍사덕, 김민석, 김무성, 박성현, 김원길, 이완구, 이재선, 이양희, 함석재, 전용학, 송영길, 오영식, 김태경, 강기정, 조정식, 백원우,이광재, 최재성, 이부영, 원희룡, 권영진, 진성호 등이다.
그리고 특별히 추가하는 두사람, 변절의 굿판타령하는 <김지하>와 이명박근헤의 대통령직을 적극 지지하고 찬동한 소설가 황석영을 빼놓을 수 없다. 오늘 대한민국의 순진한 민중들은 수많은 변절자들의 이유있는 변명을 들으면서 속아왔다. 하지만 변절과 배신자 철새들로 가득찬 오늘 이명박근혜 정치권은 안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미국이 조정하고 관리하고 있는 ‘청와대의 사병’들이 되고 있을 뿐이다.
386철새 양아치 정치인들의 변절의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세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돈 때문이다. 많은 386정치인들이 뉴라이트로 변절하였는데 그들은 민주당에 빌붙어서 더 이상 고생하기 싫어졌다. 한나라당에서 환영환대의 손을 내미는데 이제는 좀 배부르게 살아보자라는 생계형 경제적 변절자들이 되고 말았다.
둘째, 명예 때문이다. 많은 386 운동권 출신 학생들이 오로지 정치적 사명감 때문에 운동권에 속해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그들 중에는 운동권 학생이라고 하는 우월감(엘리트)에 사로잡힌 행위로서 민중들보다 자기 자신은 우월하다는 분위기에 편승한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남보다 높은 자리를 원했는데 한나라당 쪽에서 제시하는 높은 자리가 명예욕을 총족시킬 수 있었다.
셋째, 미국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 주한미국의 정치적 파워의 컨트롤이 한국의 386운동권에게 근본적으로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주한미국대사관이 미국 CIA의 치밀한 공작을 펼침으로써 한국의 386 정치권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한-미동맹은 그 무엇이던지 한국의 정치권의 지각변동을 일으켜 야권을 분열 파괴시키고 친미적 여당을 집권당으로 육성시키고 있다.
미국 외교부에 6,000명이 근무하면서 세계적 대외정첵을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관리하는 인원이 20여 명이 있다고 한다.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많은 20여명이 한국의 386세대 정치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햇별정책-국민의정부-참여정부에 대한 분열공작에 성공하여 이명박근혜 정권을 출범시키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주한미국대사의 운동권 분열공작에 대한 한 예를 들어 본다. 2002년에 ‘효순미선사건’ 이후에 미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당시 버시바우 주한미대사는 지방 대학을 포함하여 모든 대학 강연을 하였으며 인터넷 대회를 꾸준히 계속하고 있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미국의 패권이 일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에 주한 미국대사관은 세련된 치밀한 조직적 수단으로 한국의 386 세대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386 세대의 변절의 대부분은 소련이 붕괴한 후에 부상한 미국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급변하는 국제적 정치의 변혁기에 발생했다. “청와대 회의를 마친뒤 한 두 시간에 그 내용이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하여 미국에 보고된다.” 이것은 총체적으로 미국의 골치덩어리386 세대에 대한 분열 매수 공작이 어느 정도 였는가를 잘 말해준다.
이 글을 긑 맺으며,
오늘 386새대에 속하는 변절자 정치인들이 박근헤 정권을 몰아내고 퇴출시키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거추장스러운 인물들이 되고 있다. 이명박을 위하여 4대강 전도사 역할을 하던 이재호 스타일의 정치인들, 박근혜 정권에 편승하여 엉뚱하게 대통령 망상증에 걸린 김문수 주변에서 우글거리는 변절자들, 스스로 제무덤을 판 김민석 형태의 변절자를 비롯하여 수 없이 많은 변절자들 때문에 우리 민족은 분단 70년을 맴도는 제자리 걸음을 오늘도 하고 있다.
하지만 지칠 수는 있어도, 그칠 수 없는 조국의 민족통일의 길에서 국내와 해외의 민중들은 역사적 사명감에서 절대로 물러나지 않는다. 끝. (유태영, 7/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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