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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4 장 8. 두만강을 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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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5-22 11:3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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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4 장 8. 두만강을 건너 

 

   


 

8. 두만강을 건너 

 

우리 아버지는 간도사람들이 투쟁력이 강하다고 여러번 말씀하시였다. 나도 5.30폭동과 8.1폭동까지 겪고나서 간도지방의 조선사람들이 뛰여난 혁명성을 가지고있다는것을 똑똑히 알게 되였다.

 

 

간도나 북부조선일대는 일찍부터 의병들과 독립군들의 활동무대로 되여왔다. 로씨야에서 일어난 사회주의10월혁명의 영향으로 맑스-레닌주의사조도 이 지역에 먼저 전파되였다. 간도일대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은 지도자들속에서 나타난 소부르죠아적조급성으로 하여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인민대중의 혁명적진출은 계속되고있었다.

 

 

그런것만큼 나는 감옥에 있을 때부터 일단 무장투쟁을 시작하게 되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와 간도일대를 중요한 전략적거점으로 삼을것을 결심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도 이 일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여왔다. 우리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북부국경지대와 함께 간도를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으려고 했다면 그들은 이 일대를 만몽을 침략하기 위한 전략적요충지로 삼으려고 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20세기초부터 동만에서 이러저러한 사건들을 야기시킨것은 그런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다리를 놓자는데 있었다.

 

 

1907년 8월에 일제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밑에 연길현 룡정에 군대를 침입시켜 거기에 《조선통감부파출소》를 설치하였고 1909년에는 중국반동정부를 꾀여 간도협약을 체결하였으며 나아가서는 길회선철도공사권까지 탈취하였다. 그후 룡정의 《조선통감부파출소》는 일본총령사관으로 승격되였다. 일제가 룡정에 총령사관을 설치한것이나 그아래에 다섯개나 되는 령사관분관까지 내온것은 간도에 와있는 조선사람들을 호강시키자고 한짓이 아니였다. 그들은 그런 령사기구외에도 각지에 경찰서들을 배치하고 조선인거류민회와 같은 주구단체들을 무수히 만들어 간도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사람들의 일거일동을 예리하게 감시하였다. 동양척식회사 출장소와 금융계도 이곳에 줄을 뻗치고있었다. 동만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완전히 일본제국주의의 조종하에 있었다.

 

 

이처럼 동만지방은 혁명과 반혁명과의 첨예한 대결장으로 되여가고있었다.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서는 백두산대수림지대와 함께 동만을 무장투쟁의 거점으로 삼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8.1폭동을 겪은 후 박두하고있는 일제의 만주침략의 징조를 이모저모에서 느끼고있던 나는 혁명성이 강한 동만인민들을 묶어세워 한시바삐 무장투쟁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가다듬었다. 그래서 동만으로 나갔다.

 

 

내가 처음 동만으로 나가겠다고 하니 우리 동무들은 만류하였다. 일제의 폭압기구와 정보망들이 거미줄처럼 늘여져있는 곳에 가는것은 섶을 지고 불속에 들어가는것과 같은 모험이라는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로동자, 농민들속에 들어가 혁명할 결심을 굳게 다지고 대담하게 동만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나의 활동은 주로 도시청년들과 학생들속에 중심을 두고 진행되였다고 할수 있다. 카륜회의에서 채택된 혁명로선의 요구에 맞게 투쟁을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끌어올리자면 우리들자신이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군중들속에 더 깊이 들어가 그들을 일제와의 항전에로 하루빨리 준비시키는것이 필요하였다.

 

 

국제당에서도 내가 동만으로 가는것을 지지하였다.

 

 

나는 먼저 돈화로 향하였다. 이 일대가 8.1폭동의 피해를 제일 많이 입었기때문이였다. 돈화는 이 폭동의 근원지였고 중심무대였다.

 

 

여기에는 일본군의 한개 수비대본부와 길림총령사관산하의 령사관분관이 있었으며 구동북군의 677련대본부가 있었다. 적의 폭압력량이 이처럼 조밀하게 배치되여있는 곳에서 8.1폭동과 같은 무모한 폭동이 일어난것은 이 일대에서 좌경모험주의자들이 많이 활동한 사정과 관련된다. 돈화는 반석과 함께 엠엘파의 본거지였으며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의 한개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박윤세, 마건과 같은 8.1폭동의 주모자들도 바로 이 고장에 활동기지를 두고있었다.

 

 

돈화에는 당 및 공청, 반제청년동맹을 비롯하여 우리가 꾸려놓은 여러가지 혁명조직들이 있었고 진한장, 고재봉, 고일봉과 같은 믿음직한 동지들이 있었다.

 

 

나는 돈화에 가자 진한장의 집에 거처를 정하고 중국 산동옷을 입고 다니면서 폭동의 후과를 가시기 위한 활동을 벌리였다. 내가 길림에서 공청소조들을 도처에 꾸려놓을 때 중학교에 다니던 진한장도 돈화에서 우리 조직에 망라되여 활동하였다. 일제가 만주를 강점한 후에는 그가 오의성부대 총사령부에서 비서장으로서도 활약하고 동북항일련군에서 사단참모장, 사장, 방면군군장, 남만당위원회 서기 등도 력임하였지만 그때는 소박하고 조용한 공청원이였다.

 

 

진한장은 장울화와 같은 부자의 아들이였으나 혁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공청생활을 아주 성실하게 하였다. 진한장의 아버지는 큰 부농으로서 말도 몇백필씩 가지고있었고 총도 여러 자루 갖추고있었다. 집주변에 토성까지 치고있어 그 위풍이 간단치 않았다. 그는 롱담삼아 나에게 자기네는 원래 타도대상인데 집주변이 다 제땅이므로 남의 땅은 밟고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 집 땅이 딱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큰 부자였던것만은 사실이다.

 

 

진한장은 공산주의를 배워준 선배라고 하면서 나를 환대해주었다. 생활이 유족하다보니 그 집에서는 내가 공밥을 먹어도 아까와하지 않았다.

 

 

나는 진한장과 고재봉을 내세워 흩어진 조직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낮에는 중국옷을 입고 중국말을 하면서 동무들을 찾아다니였고 밤에는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면서 조직들을 복구하였다. 이렇게 폭동의 후과를 기본적으로 수습해놓은 다음 국제당에서 받은 위임대로 돈화에서 길동지구공청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후 고재봉을 비롯한 몇몇 공청원들이 나에게서 두만강연안의 도시와 농촌들에 나가 대중을 혁명화하며 당조직을 꾸릴데 대한 과업을 받아가지고 활동구역으로 떠나갔다.

 

 

나도 진한장에게 돈화중학교에 들어가서 공청활동을 하라는 과업을 주고 돈화를 떠났다.

 

 

내가 동만에 가서 맨 처음으로 들린 곳은 화룡이였다.

 

 

화룡에는 길림사범학교를 다닐 때 우리의 공청조직에 망라되여 활동하던 조아범이라는 중국동무가 있었다. 채수항과 같은 조선동무도 있었다. 이런 줄을 타고 들어가면 폭동의 후과도 수습할수 있고 조직들도 확대해나갈수 있을것이라고 타산하였다.

 

 

나는 먼저 대립자라는 곳에 가서 조아범을 만났다.

 

 

조아범은 8.1폭동의 후과가 대단히 크다고 하면서 폭동후 조선동무들이 다 어디에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아범은 감옥에 들어갔던 몇몇 동무들이 인차 석방될것 같으니 만나보라고 하였다.

 

 

며칠후 채수항이 련락을 받고 나를 찾아왔다. 그는 원래 룡정에서 동흥중학교를 다니던 사람이였다. 내가 육문중학교에 다닐 때 길림에 와서 사범학교에 적을 두고 공부를 하였는데 그때부터 우리의 영향을 받고 혁명사업을 시작하였다. 채수항은 길림의 청년학생들속에서 축구선수로 인기가 있었다. 그 당시 여러명의 화룡출신청년들이 길림에 와서 공부하였다. 김준이 룡정과 온성일대에서 우리에 대한 선전을 하였다면 채수항은 화룡과 종성지방을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의 혁명사상을 선전하였다. 그는 후에 현당서기로 사업하다가 《민생단》련루자로 몰려 억울하게 학살당한 김일환동무와 함께 공청도 조직하고 반제청년동맹, 농민협회, 반일부녀회와 같은 혁명조직들을 꾸려 여기에 수많은 군중을 집결시켰다. 연길폭탄제조의 명수로 소문난 박영순동무도 연길현의 팔도구광산에서 반제청년동맹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모처럼 꾸려놓은 조직들이 두차례의 폭동때문에 풍지박산이 되였다. 많은 핵심들이 잡혀가거나 지하로 들어갔고 얼마 안 남은 조직성원들마저 세련이 부족한탓으로 불안에 떨면서 어찌할바를 모르고있었다.

 

 

이런 실태는 나로 하여금 혁명가의 신념에 대한 문제를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카륜을 떠난 후 길림, 해룡, 청원, 교하, 할빈, 돈화를 거쳐 화룡까지 오는 과정에 나는 반혁명의 공세앞에서 겁을 집어먹거나 혁명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어버리고 동요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혁명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만인을 공감시키고 불러일으킬수 있는 정확한 혁명로선과 전략전술이 있고 자체의 혁명력량이 있다는것을 원리적으로 체득할 때에 생기며 투쟁을 통하여 굳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폭동을 선동한 사람들은 대중이 기치로 삼을만 한 강령이나 전략전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카륜에서 채택한 혁명로선은 아직 인민들속에 널리 침투되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채수항을 비롯한 몇몇 공청, 반제청년동맹 간부들과 함께 협의회를 열고 그들에게 카륜회의에서 채택된 혁명로선을 상세하게 해설해주었다.

 

 

그리고 투쟁을 통하여 검열된 신망있는 동무들로 지도핵심을 잘 꾸리며 파괴된 대중조직들을 시급히 복구하고 그 대렬을 부단히 늘일데 대하여 강조하였다. 두만강연안의 매개 현들에 혁명조직구를 내올데 대한 과업도 이때에 주었다.

 

 

폭동조직자들은 감옥과 교수대가 두려워 대중을 총검앞에 남겨두고 다 도피하였지만 우리는 폭동의 후과를 빨리 수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내가 산동옷을 입고 다녔기때문에 화룡의 동무들은 나를 《산동청년》이라고 불렀다.

 

 

내가 두번째로 찾은 곳은 왕청이였다. 내가 왕청에 들린 목적은 오중화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나에게 오중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것은 김준, 채수항동무들이였다. 그들이 길림에 들락날락할 때부터 나를 만나기만 하면 어디에 누가 있고 어디에 가면 무슨 일을 하는 누가 있는데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게 똑똑하다는 식으로 인물소개를 많이 하였기때문에 나는 길림에 있으면서도 간도일대의 사정을 비교적 환히 꿰들고있었다.

 

 

나는 그때 그들의 말을 유심히 듣고 그들이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기억해두었다.

 

 

좋은 사람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그가 어디에 있건 끝까지 찾아가 기어이 손을 잡고 동지로 포섭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인재가 모든것을 결정한다는것, 진정한 동지를 얼마만큼 많이 얻는가에 따라 혁명사업의 승패가 결정된다는 진리를 깨우쳐주었다.

 

 

동지 한명을 얻을수만 있다면 사흘을 굶어도 좋고 열흘을 굶어도 좋다는것이 그 당시 나의 심정이였다. 이런 심정으로 나는 왕청에도 들리였다. 채수항이 화룡에서부터 왕청 석현까지 나와 동행하였다.

 

 

나는 석현에서 오중화도 만나고 오중흡도 만나고 오태희로인도 만나보았다.

 

 

오태희로인네 집안은 보기 드문 대가정이였다. 로인네 네 형제는 원래 함경북도 온성군 고작골이라는데서 살다가 1914년경에 왕청땅으로 이사하였다. 그 네 형제의 자손들을 모두 합치면 수십명이 되는데 그들이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왕청과 온성땅에 쭉 널려살면서 혁명사업을 하였다. 그 당시 오중화는 왕청5구 당비서로 사업하였고 오중흡은 왕청현 춘화향 원가점에서 공청사업을 하고있었다. 오중화의 동생인 오중성은 왕청현 석현에서 공청활동을 하다가 1929년초에 온성군 풍리동으로 이사하여 보문학당 교원의 간판을 가지고 혁명사업을 하고있었다.

 

 

오중화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화룡에 있는 사립화성학교 교원을 하였다.

 

 

나는 그때 석현에 가서 오중화동무에게 대중을 혁명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혁명가가 되고 그다음에는 가족과 마을사람들을 혁명화해야 한다는것을 거듭 일깨워주었다.

 

 

 

오중화는 그후 가정혁명화를 잘하였다. 그의 가까운 형제들과 친척들가운데서 10여명이 충실한 혁명가로 활동하다가 희생되였다. 그가운데서 오중화, 오중성, 오중흡과 같은 훌륭한 공산주의자들이 배출된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석현에서 일을 끝낸 나는 그달음으로 온성지구에 건너갈것을 결심하였다. 서도지방에서 태여나 어린 나이에 이국살이를 시작한 나에게는 두만강이남의 륙읍일대에 대한 파악이 별로 없었다.

 

 

륙읍일대는 리조때 벼슬자리에서 쫓겨난 량반들이 정배살이를 하던 고장이였다. 곡식이 바르고 기후가 엄혹한데다가 우두머리들의 구박과 학대가 심해서 변방수비에 동원된 군사들이 여기에 왔다가도 인차 다른 고장으로 달아나버리군 하였다. 벼슬자리를 하는자들도 이 일대의 관리로 가라고 하면 다들 끔찍해하였다. 그들은 임명장을 받은 다음에도 여기에 오기가 싫어서 이구실저구실을 붙여가며 서울거리에서 빈둥거렸다. 봉건통치배들이 그것때문에 500년동안 내내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나는 김준이 륙읍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상들은 이 땅을 불모지라고 잘 돌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피땀을 바쳐 이 일대를 혁명의 요새로 만들어보자고 말하였다. 이런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여기에 사람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온성으로 말하면 우리의 영향밑에 1920년대말부터 김준, 채수항, 오중성과 같은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한 고장이였다. 우리는 벌써 그때 조선혁명을 발전시키는데서 백두산지구와 온성을 비롯한 두만강연안의 륙읍일대가 가지는 위치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일대를 항일혁명전쟁을 위한 전략적거점으로 꾸릴 계획을 품고있었다. 국내혁명을 새롭게 앙양시킬 돌파구도 바로 여기에서 열어놓으려고 하였다. 그 당시 온성지구에서는 100~150명의 청년들이 룡정에 가서 공부하였는데 그들이 방학때마다 고향에 돌아오면 우리와의 련계가 깊은 김준, 오중성과 같은 선각자들의 지도밑에 이 일대에 길림바람을 불어넣었다. 온성에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과 반제청년동맹의 지부들이 조직되여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국내에로 세력을 뻗칠수 있는 좋은 발판이였다. 이 발판을 타고 온성지구에 우리의 사상이 적지 않게 흘러들어갔다.

 

 

내가 온성지구에 나오게 된것은 국내에 당조직도 내오고 카륜회의방침을 실현하기 위한 대책도 세워 전반적조선혁명을 확대발전시키자는것이였다.

 

 

석현에서부터 우리와 동행한 오중화의 사촌동생이 먼저 우리가 간다는것을 련락하기 위하여 오중성이 있는 풍리동으로 건너갔다.

 

 

우리는 온성군 남양대안인 회막동 어느 골안어귀에서 련락을 받고 온 오중성동무와 그밖의 조직성원들을 만났다. 오중성과는 그때 처음으로 상봉하는셈이였다. 형인 오중화보다는 허우대가 크고 성격이 호방한 사람이였다. 오중화는 자기 동생이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시도 잘 읊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밤에 배를 타고 조용히 두만강을 건넜다. 오중성은 노도 걸싸게 잘 저었다. 어둠속에 묻힌 산야를 바라보느라니 5년만에 조국땅을 다시 밟는 감격으로 가슴이 울렁거려 견딜수 없었다.

 

 

나는 남양상탄에서 배를 내린 다음 오중화에게 나라를 독립하고 이 강을 건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였다.

 

 

오중화는 내 말을 긍정하며 자기도 두만강을 건늘 때면 매번 그런 감정에 잠긴다고 하였다.

 

 

남양상탄마을을 지나 남양산으로 오르는 고개길에 들어선 우리는 오중성이 미리 마련해놓은 초막에 들어가 온성지구 혁명조직들의 활동정형과 군중들의 동향을 료해하였다.

 

 

온성사람들이 대중조직을 내오는데서 거둔 성과가 적지 않았다.

 

 

나는 한주일동안 국내지하혁명조직들의 사업을 지도하였다. 그 과정에 온성지구 혁명가들이 국내도처에 많은 조직들을 내오기는 했지만 그 조직을 확대발전시키는데서 심한 소극성을 범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파악이 있는 몇몇 정수분자들로 조직을 꾸린 다음에는 문을 닫아매고 그 대렬을 늘이지 않는것이 이 일대에서는 보편적현상으로 되고있었다. 이런 원인으로 하여 조직들은 광범한 대중속에 깊이 뿌리를 박지 못하고있었다.

 

 

1929년 봄에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의 산하조직으로 무어진 온성공청도 몇몇 안되는 성원들로 울타리를 높이 두르고 대중속에 들어가지 않고있었다. 지방회니, 진흥회니, 신간회니, 당재건파니 하는 여러가지 단체들과 파벌들이 경쟁적으로 청년들을 끌어당기고있는 실정에서 나쁜 바람이 조직에 흘러드는것만이라도 막아보려고 전전긍긍하면서 현상유지나 하고있는 형편이였다.

 

 

내가 풍리에서 만난 어떤 공청일군은 원쑤들의 책동이 심해지니 사람들이 통 곁을 주지 않는다고 하였고 또 어떤 공청일군은 청년동맹이나 신간회에 관계한 청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였다. 풍인동농민협회 책임자로 일하고있던 전장원이란 사람은 자기 친척들가운데 구장, 면장, 순사질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때문에 그 줄을 타고 적들의 마수가 혁명대렬에 뻗쳐올가봐 은근히 신경을 도사리면서 가까운 친척이라 해도 적의 통치기관에서 복무하는 사람들에게는 곁을 주지 않고있었다.

 

 

이것이 다 대중을 믿지 않는 표현이였다.

 

 

이런 페단을 없애지 않고서는 온성지구에서 새로운 정세의 요구에 맞게 혁명을 심화발전시킬수 없었다.

 

 

혁명가의 일생은 대중속에 들어가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할수 있고 혁명의 실패는 인민대중의 힘을 믿지 않고 인민대중속에 들어가지 않는데서부터 시작된다고 할수 있다.

 

 

나는 오중성에게 간절한 심정으로 말하였다.

 

 

출신이 좋은 몇몇 사람들만으로는 혁명을 할수 없다. 대중을 대담하게 믿고 그들을 위해 조직의 문을 넓게 열어놓아야 한다. 형형색색의 간판을 가진 청년단체들이 저마다 청년들을 끌어당기고있는데 이런 때일수록 공청조직은 피동에 빠지지 말고 적극적인 공세를 벌려 많은 청년대중을 전취해야 한다. 청년동맹이나 신간회조직들에 관여했던 청년들, 당재건파분자들에게 붙어다니거나 무의식적으로 리용당하고있는 청년들도 잘 깨우쳐주고 이끌어주어 한사람한사람씩 우리편에 쟁취해야 한다.…

 

 

전장원동무에게도 적기관 복무자들과의 사업에서 나서는 전술적원칙들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혁명을 하는 사람은 가문에 구장, 면장, 순사가 있다고 놀라거나 축잡혀서는 안된다. 동무는 오히려 그러한 친척관계를 타고 적통치기관에 들어가서 왜놈들의 말단통치기구를 마비시켜놓고 판을 크게 벌릴 잡도리를 해야 한다. 온성을 비롯한 륙읍일대를 무장투쟁의 전략적거점으로 꾸리자면 대중을 혁명화하는것과 함께 적통치기관 복무자들을 대담하게 전취해야 한다. 적기관 복무자들을 전취하는 사업에서 한번 경험을 쌓아보라.

 

 

온성에 갔을 때의 일가운데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것은 김준, 오중화, 오중성동무들과 함께 미포면 월파동철도부설공사장에서 로동자들을 만나던 일이다.

 

 

일제는 1929년초부터 두만강연선에서 철도부설공사를 다그치였다. 삼남지방을 비롯한 국내각지와 간도에서 1,000여명의 인부들이 모여들어 월파마을에 개풍거리라고 부르는 번잡한 주민지구를 만들어놓았다. 길회선철도부설공사장에 가있던 인부들도 이 거리에 밀려들어 벌이를 하느라고 고역을 치르었다.

 

 

나는 길림에 있을 때 그 소식을 듣고 김준을 만나 월파동에서 철도부설공사가 벌어지고있다면 로동자들속에 뚫고들어가 조직을 꾸려보라고 하였다.

 

 

김준동무도 한번 해볼만 한 일이라고 하면서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후 그는 나와 약속한대로 온성에 들어가 월파동에서 로동청년회와 반제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내가 철도부설공사장에 들어가겠다고 하자 온성동무들은 놈들의 경계가 심하니 그것만은 단념해달라고 하였다.

 

 

그때 그들은 《국제당파견원이 왔다.》고 하면서 내 신변을 보호해주느라고 여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이 나에게 《국제당파견원》이라는 직함까지 붙이면서 호위조직을 면밀하게 해준것은 국내에서 혁명가들에 대한 일본경찰의 감시와 경계가 그만큼 심하였기때문이였다.

 

 

물론 나도 조선에 나오면 매사에 조심해야 하며 경각성을 높여야 한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러나 나는 로동자들속에 들어가서 당장 큰일은 못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손을 잡고 힘이 될수 있는 말을 한마디라도 해주고싶은 심정이였다. 내가 그때까지 청년학생들과의 사업을 해온것은 다 로동계급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다리를 마련하자는것이였다. 우리의 종국적목적은 로동계급을 내세워 조선혁명을 개척하고 완성하자는것이였다. 로동계급의 해방을 강령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위해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칠것을 맹세한 그날부터 우리는 얼마나 조선의 로동계급을 그리워하였던가.

 

 

나는 공사장에 들어가 하루반동안 로동자들과 함께 자갈도 부리고 모래도 나르고 《함바》(로동자숙사)밥도 먹어보았다.

 

 

김준은 나를 연길에서 공부를 하다가 학비를 보태려고 온 동무라고 소개해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내가 로동자들속으로 들어간것이 아주 유익하였다고 생각한다. 《함바》나 공사장에서 내가 본것은 몇푼의 품삯을 벌기 위해 아득바득 애쓰는 로동자들의 비참한 군상만이 아니였다. 나는 거기서 투쟁을 갈망하는 로동자들, 자기들의 운명을 지켜주고 개척해줄수 있는 옳바른 길을 찾아 헤매는 로동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은 나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내 가슴은 로동계급의 행복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싶은 열망으로 불탔다.

 

 

나는 그때 철도부설공사장에서 온성출신의 항일투사들인 최춘국, 최봉송동무들과도 처음으로 낯을 익히였다.

 

 

최춘국은 숙사로 나를 안내하면서 자기가 남포군으로 일하는 동안 비밀리에 화약을 모아두었는데 공사가 완공되는 날 그것으로 차굴을 폭파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에게 지금 형편에서는 차굴을 폭파하는것과 같은 모험을 하는것보다 조직을 튼튼히 꾸리고 로동자들을 의식화, 조직화하는것이 더 절박하니 화약은 두었다가 앞으로 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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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6 장 2. 마지막 모습
[Reminiscences]Chapter 4 5. The Korean Revolutionary Army
[사진으로 보는 노동신문] 5월 31일(일)
[제목으로 보는 노동신문] 5월 31일(일)
유투브로 보는 조선중앙텔레비젼 보도 5월 30일(토)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6 장 시련의 해 1. 남 만 으 로
[Reminiscences]Chapter 4 4. The First Party\\organization&md…
[논평] 문재인정부는 역사의 범죄자를 모조리 처벌해야 한다.
값높은 삶의 초석-애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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