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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4 장 6. 혁명시인 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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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5-20 11:2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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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2권 제 4 장 6. 혁명시인 김혁

 

   


 

6. 혁명시인 김혁 

 

혁명은 동지들을 얻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자본가의 밑천은 돈이지만 혁명가의 밑천은 사람이다. 자본가가 돈을 밑천으로 하여 치부의 탑을 쌓아나간다면 혁명가는 동지를 밑천으로 하여 사회를 변혁하고 개조해간다.

 

 

청년시절에 내 주위에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들가운데는 인정적으로 사귄 친구들도 있었고 투쟁과정에 뜻을 같이하면서 얻은 동지들도 있었다. 그 한명한명의 동지들은 모두가 억만금을 주고서도 바꿀수 없는 귀중한 사람들이였다.

우리 후대들이 혁명시인이라고 부르는 김혁도 바로 그런 동지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김혁은 나의 청춘시절에 지울수 없는 인상을 남긴 사람이며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때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오늘까지도 그를 잊지 않고있다.

 

 

 

내가 김혁을 처음으로 만나던 날이였다.

 

 

그날 한문시간이 끝나고 복도에서 상월선생과 이야기를 나누고있을 때 권태석이 뛰여와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려주었다. 한번도 보지 않던 사람인데 차광수라는 안경쟁이와 함께 정문에 서있다고 하였다.

 

 

과연 정문에는 얼굴이 녀자처럼 곱살하게 생긴 초면의 청년이 트렁크를 들고 서서 차광수와 같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그가 바로 차광수가 말끝마다 재사라고 자랑하던 김혁이였다. 그는 차광수가 자기를 소개하기도 전에 내앞에 손을 내밀고 《김혁이올시다!》하며 스스럼없이 악수를 청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자기 소개를 하였다.

 

 

내가 김혁에게 특별한 친근감을 느낀것은 차광수가 그에 대한 《광고》를 귀에 못이 박히게 한데도 있었지만 김혁의 얼굴모습이 김원우의 얼굴과 비슷하게 생긴데도 있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김혁형을 데리고 기숙사에 가서 한시간동안만 기다려주지 않겠소? 어지간한 시간 같으면 결강을 하겠는데 공교롭게도 상월선생이 담당한 문학시간이구만.》

 

 

나는 김혁에게 량해를 구한 다음 차광수한테 이런 부탁을 하였다.

 

 

《허허, 상월선생의 문학시간이라면 모두가 오금을 쓰지 못하니 성주도 장차 김혁이처럼 문학가가 되려는게 아니요?》

 

 

차광수는 안경테를 추어올리면서 롱을 하였다.

 

 

《김성주라고 문학가가 못된다는 법이야 없지. 그런데 혁명을 하자면 반드시 문학을 알아야 할것 같애. 어떻소? 김혁형, 그렇지 않소?》

 

 

김혁은 그 말을 듣자 환성을 올리였다.

 

 

《길림에 와서 이제야 귀맛이 당기는 말을 듣는구만. 문학을 떼놓고야 혁명을 론할수가 없지. 혁명 그자체도 문학의 대상이고 모체니까. 문학선생이 그렇게 인기있는 선생이라면 나도 만나고싶소.》

 

 

《그럼 후날 소개해주기로 합시다.》

 

 

나는 이런 약속을 남기고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을 끝내고 나오니 차광수와 김혁은 정문에서 불변자본이 어떻고 가변자본이 어떻고 하면서 그냥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두 친구의 음성에서 풍기는 열정은 나에게도 그대로 옮겨졌다. 나는 김혁을 타고난 열정가라고 격찬하던 차광수의 말을 되새기면서 좋은 동무를 또 하나 얻게 되였다고 속으로 기뻐하였다.

 

 

《숙소에 가서 기다려달라고 했는데 왜 그냥 여기에 서있소?》

 

 

김혁은 한쪽눈을 쪼프리고 금빛해살이 쏟아져내리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 좋은 날 바퀴처럼 집안에 들어가 박혀선 뭘하겠소. 이왕이면 여기서부터 길림거리를 하루종일 거닐며 이야기나 나눕시다.》

 

 

《금강산구경도 식후경이라는데 점심식사나 한 다음 북산으로 가든가 강남공원 같은 곳으로 갑시다. 김혁형이 상해에서 불원천리하고 우리를 찾아왔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식사도 안시키면 대접이 너무 소홀하지 않소.》

 

 

《길림에 와서 성주동무를 만나니 몇끼 굶어도 배고플것 같지 않소.》

 

 

김혁은 성미도 열정적이지만 언행도 활달하였다.

 

 

그때 내 수중에는 공교롭게도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데리고 돈을 내지 않아도 우리를 반갑게 맞아줄수 있는 삼풍려관으로 갔다. 그 려관집사람들이 마음씨가 고운데다가 국수를 잘 만들었다. 려관집어머니에게 사정이야기를 하니 국수 여섯그릇을 말아 한사람앞에 두그릇씩 내주었다.

 

 

김혁은 옹근 사흘밤이나 내가 기숙하고있는 방에서 나와 함께 밤을 새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나흘째 되는 날에는 길림일대의 실태를 파악하느라고 차광수가 있는 신안툰으로 갔다.

 

 

나는 첫 대면에 벌써 그가 불같은 열정을 지닌 사람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차광수가 덜렁덜렁한 사람이라면 김혁은 불같은 사람이였다. 평상시에는 녀자처럼 조용하고 얌전하게 굴다가도 일단 충격만 가해지면 쇠가마처럼 끓으면서 단김을 뿜는것이였다. 차광수처럼 동양 3국을 돌아다니면서 쓴맛단맛을 다 보았다는 풍운아였는데 그런 풍운아치고는 깨끗한 사람이였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견문도 넓고 리론수준도 높았다. 특히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은 사람이였다.

 

 

우리는 문학과 예술의 사명을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 때마다 김혁은 문학과 예술은 마땅히 인간에 대한 송가로 되여야 한다고 력설하였다. 그후 길림바람을 좀 쏘이고난 다음에는 견해를 발전시켜 혁명에 대한 찬가로 되여야 한다고 하였다. 문학관이 아주 혁신적이였다. 우리는 김혁의 이런 장점을 참작하여 그에게 한동안 군중문화계몽사업과 관련된 과업을 많이 주었다. 그가 연예선전대활동을 자주 지도한것도 그때문이였다.

 

 

김혁이 시를 잘 지었기때문에 우리 동무들은 그를 《에젠 뽀찌에》라고 불렀다. 그를 가리켜 《하이네》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김혁은 실지로 하이네나 에젠 뽀찌에를 그 어느 시인보다도 높이 평가하였다. 우리 나라 시인들중에서는 리상화를 제일 사랑하였다.

 

 

그가 좋아하는 시들을 보면 대체로 격조높은 문체로 엮어진 혁명적인 시편들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설에서는 주정이 강한 최서해의 작품보다 정서가 짙은 라도향의 작품을 더 좋아하였다.

 

 

우리는 김혁의 그런 취미를 두고 세상리치란 참으로 묘한데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우리 생활에는 서로 대조되는것들끼리 결합되여 잘 어울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차광수는 그런 현상을 가리켜 《음과 양의 결합》이라고 적절하게 비유하였다. 김혁의 경우에도 음과 양이 조화롭게 결합되여 남다른 문학적개성이 이루어진것이라고 하였다.

 

 

김혁은 어렵고 복잡한 혁명사업을 하면서도 짬을 내여 훌륭한 시작품들을 련이어 써내군 하였다. 우리의 혁명조직에 망라되여있던 길림의 녀학생들이 그의 시를 수첩에 베껴가지고 다니면서 즐겨읊었다.

 

 

김혁은 남들처럼 종이장을 놓고 썼다지웠다 하면서 시를 창작하는것이 아니라 첫줄부터 마지막줄까지 죄다 머리속에서 다듬다가 수정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면 비로소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고는 종이우에 옮기군 하였다.

 

 

그가 책상을 내려칠 때마다 시가 한편씩 나온다는것을 알고있는 우리 동무들은 《김혁이 또 알(시)을 하나 낳았군.》하면서 기뻐하였다. 김혁이 시를 탈고하는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공동의 경사로 되고있었다.

 

 

김혁에게는 공청생활을 하던 승소옥이라는 미모의 애인이 있었다. 몸매가 날씬하고 복성스럽게 생겼지만 정의를 위해서라면 단두대에라도 서슴없이 올라설 그런 기개와 담력을 가진 처녀였다.

 

 

승소옥은 공청조직생활을 아주 성실하게 하였다.

 

 

길회선철도부설을 반대하는 대중적인 투쟁이 벌어지던 그해 가을에 거리에서 그가 선동연설을 하는것을 들어보았는데 연설을 아주 맵시있게 하였다.

 

 

수첩에 김혁의 시를 베껴가지고 다니면서 제일 애송한 녀학생도 바로 승소옥이였다. 그가 시도 잘 읊고 노래도 잘 부르고 연설도 잘하는데다가 계절에 관계없이 늘 하얀 저고리에 깜장치마를 입고다니였기때문에 승소옥이라고 하면 길림시내 청년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생활을 언제나 열정적으로 감수하고 시화해온 김혁은 사랑도 역시 열렬히 하였다. 청년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하면서도 사랑을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인간성도 없고 인간다운 생활도 없으며 인간다운 사랑도 없는것처럼 말하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우리들중 많은 사람들은 혁명을 하면서 사랑을 하였고 탄우속에서 가정도 이루었다.

 

 

방학철이 오면 우리는 김혁과 승소옥에게 몇가지 군중공작과업을 주어 고유수로 보내군 하였다. 고유수에는 승소옥의 집이 있었다.

 

 

그들은 군중들과의 사업을 하는 여가를 타서 종종 버들숲이 무성한 이통하강변에 나가 산책도 하고 낚시질도 하였다. 김혁이 낚시질을 할 때면 승소옥은 옆에서 고기도 따주고 미끼도 끼워주었다. 경치좋은 북산과 송화강반에서 그리고 이통하기슭에서 혁명과 더불어 그들의 사랑도 나날이 무르익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승소옥의 아버지 승춘학이 그들의 사랑을 달가와하지 않는것 같았다.

 

 

승춘학은 삼광학교의 전신이라고 할수 있는 창신학교의 설립자이며 교장이였다. 몇해동안 쏘련에 가서 연해주지방을 돌아다니며 공부도 하고 문명의 맛도 본 사람인것만큼 그때로서는 상당한 정도로 개명한 인물이였다. 우리가 고유수에 가서 창신학교를 삼광학교로 개조하고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놓은 대중조직들을 공산주의조직, 혁명조직들로 개편할 때에도 그는 우리가 하는 일에 선참으로 리해를 표시하고 적극적으로 방조해주었다.

 

 

이런 사람이 자기네들의 사랑에 랭담한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남아장부인 김혁이지만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승소옥의 어머니는 김혁을 좋은 사위감이라고 생각하였기때문에 딸이 그와 교제하는것을 눈감아주고 남편앞에서도 은근히 두둔해주었다. 그후 오랜 기간 김혁의 사람됨을 면밀하게 주시해오던 승춘학도 결국은 그가 훌륭한 혁명가임을 알고는 딸의 의향을 따르게 되였다. 승춘학이 그들의 약혼을 허락한 날 김혁과 승소옥은 사진을 찍었다. 그 당시 승소옥이네 집에는 사진기도 있었다.

 

 

김혁이 희생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상태에 빠진 승소옥은 이통하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려고 하였다. 우리 동무들이 강변에서 그를 끌어내다가 겨우 진정시켜놓았다.

 

 

승소옥은 그후에도 혁명활동에 성실히 참가하다가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필자인 최일천의 안해가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 시집을 갔다. 비록 계모가 되여 남의 아이들을 기르는 한이 있더라도 김혁과 같은 혁명가와 일생을 같이하겠다는것이 녀성으로서의 그의 리상이였다.

 

 

김혁의 불같은 성격은 혁명실천에서 충실성으로 표현되였다. 그는 높은 책임성과 충실성을 지닌 혁명가였다. 나보다는 나이가 다섯살이나 우이고 일본에 가서 공부도 한 사람이였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내지 않고 우리가 주는 과업을 언제나 성실하게 받아들이였다. 그래서 나는 김혁을 각별히 아끼고 사랑하였다.

 

 

김혁은 1928년 여름부터 차광수와 함께 류하현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의 지도로 고산자동성학교에 사회과학연구회(특별반)가 나오고 반제청년동맹지부가 조직된것도 이무렵이였다.

 

 

그때 김혁은 인류진화사와 세계정치지리, 문학, 음악과목의 강의를 담당하였다. 고산자의 청년학생들속에서 그의 인기가 대단하였다.

 

 

내가 감옥생활을 마치고 동만쪽으로 나갈무렵에 김혁은 고유수와 길림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조직이 준 과업을 집행하고있었다. 나는 돈화로 가면서 그에게 서면으로 강동, 길림, 신안툰의 혁명조직들을 지도하면서 새 출판물발간을 준비하라는 일거리를 더 맡기였다.

 

 

얼마후 돈화에서 일을 마치고 카륜으로 돌아가는 길에 김혁을 찾아갔더니 그는 우리가 준 과업을 착실하게 수행해나가고있었다. 내가 옥중에서 무르익힌 생각과 카륜에 가서 할 사업내용을 이야기했더니 그는 흥분해서 자기도 당장 나를 따라 카륜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나는 카륜으로 오되 맡은 일을 다 수행한 다음 천천히 뒤따라오라고 하였다. 김혁은 몹시 서운해하면서도 내 말대로 신안툰에 그대로 눌러앉아 새 출판물발간준비를 다그치였다. 그런 다음에야 카륜에 왔다.

 

 

카륜회의가 있은 후 우리는 새 출판물을 발간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시키였다. 새로운 혁명로선이 일정에 오르고 그 실현에로 대중을 조직동원할 사명을 지닌 첫 당조직이 세상에 태여난 조건에서 그 사상적대변자의 역할을 수행할수 있는 출판물을 발간하는것은 한시도 미룰수 없는 절박한 과업으로 나섰다.

 

 

김혁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있었으므로 카륜에 와서도 밤잠을 자지 않고 출판물에 낼 원고를 썼다. 그의 제의에 따라 새 출판물의 제호를 《볼쉐비크》로 달았다.

 

 

우리는 《볼쉐비크》를 잡지형식으로 만들어 대중을 혁명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면서 물질적준비를 충분히 갖춘 다음 점차 신문형식으로 크게 만들고 부수도 늘이기로 계획하였다. 1930년 7월 10일에는 마침내 《볼쉐비크》 창간호가 세상에 나왔다.

 

 

이 잡지를 공청, 반제청년동맹지부들과 여러 반일혁명조직들, 조선혁명군 소조들에 배포하였으며 우리가 장악하고있는 학교들에도 보내여 교재로 리용하도록 하였다. 내가 카륜에서 한 보고를 해설하는 글도 그 잡지에 실리였다. 카륜회의방침을 소개하고 선전하는데서 《볼쉐비크》가 참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처음 얼마동안 월간잡지형식으로 발간되던 《볼쉐비크》는 그후 발전하는 혁명정세와 독자들의 요구에 따라 주간신문으로 되였다.

 

 

김혁은 《볼쉐비크》의 첫 주필로서 카륜을 떠날 때까지 원고집필로 밤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불덩이같은 정열가여서 좀처럼 휴식이라는것을 몰랐다.

 

 

그러다가 그는 조선혁명군 소조를 책임지고 할빈으로 갔다. 김혁이 할빈에 파견된것은 1930년 8월초였다. 길림, 장춘, 류하, 흥경, 회덕, 이통일대에서 주로 활동해온 그에게 있어서 할빈은 생소한 고장이였다. 나도 이 도시에 대해서는 별로 파악이 없었다.

 

 

우리는 길림에 있을 때부터 할빈을 중시하였다.

 

 

이 도시의 주민구성을 보면 로동계급이 많았다. 로동계급속으로 들어가자면 장춘이나 할빈과 같은 큰 도시들에 대담하게 진출하여 우리의 력량을 키워야 했다.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과 중동철도를 공격한 군벌의 배신적인 반쏘행위를 반대하는 투쟁과정이 보여준바와 같이 할빈의 로동계급과 청년학생들은 혁명성이 강하였다. 이런 고장에 가서 줄만 잘 늘이면 많은 군중을 조직에 묶어세울수 있었다.

 

 

우리가 할빈을 중시한것은 거기에 국제당련락소가 있는 사정과도 관련된다. 내가 길림육문중학교에 조직한 공청과 련계를 가지고있던 국제당산하의 공청조직도 할빈에 있었다. 국제당과의 련계를 가지자면 어차피 이 도시에 우리의 통로를 내고 할빈을 우리가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는 곳으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혁을 할빈에 보낸 중요한 목적은 할빈일대에서 우리의 혁명조직을 늘이는 한편 국제당과의 련계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김혁이 그때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우리가 주는 임무를 흔연히 받아들이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에게 국제당에 보내는 소개신을 써준 사람은 김광렬(김렬)이였다.

 

 

김혁은 떠나면서 내 손을 붙잡고 오래도록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가 주는 과업이라면 경중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부리나케 해제끼는 사람이였지만 단독임무를 받아가지고 떠나갈 때에는 매번 그렇게 쓸쓸해하였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여럿이서 함께 하는것을 좋아하였다. 그가 제일 싫어하는것은 고독이였다.

 

 

시인이 고독을 자주 체험해보는것도 문학수업을 위해서는 나쁘지 않을텐데 왜 동무는 그것을 그렇게도 두려워하는가고 언제인가 물었더니 김혁은 지난날 울분을 안고 세상을 떠돌아다닐 때에는 고독도 하나의 좋은 길동무였는데 그런 생활을 끝장낸 다음부터는 싫어진다고 솔직히 고백하였다. 그는 강동에서 몇달동안 외롭게 지내다가 카륜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밤을 밝히며 일하는 재미를 좀 볼만 하니까 또 헤여지게 된다고 하면서 못내 아쉬워하였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어린아이들을 달래듯이 말했다.

 

 

《김혁이, 혁명을 하자니까 이런 리별도 있는것이 아니겠소. 할빈에 갔다오면 우리 동만에 나가서 같이 일해보자구.》

 

 

김혁은 쓸쓸하게 웃었다.

 

 

《성주, 할빈의 일은 걱정하지 마오. 어떤 일이 있어도 조직에서 준 임무를 수행하고 웃으면서 동무들곁으로 돌아오겠소. 앞으로 동만에 나갈 때에는 맨 선참으로 나를 불러주오.》

 

 

그것이 김혁과의 마지막리별이였다.

 

 

그와 헤여지고보니 내자신도 마음이 허전해졌다.

 

 

우리의 선이 처음으로 할빈에 뻗치기 시작한것은 1927년말부터였다. 그 당시 길림제1중학교에서 고학을 하던 몇몇 학생들이 조선민족을 모독하는 강의를 한 반동적인 력사교원과 대판싸움을 하고나서 할빈으로 들고뛴 일이 있었다. 그 학생들가운데는 우리의 지도를 받아오던 류길학우회 성원들도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할빈에 가서 조직을 내올데 대한 과업을 주었다. 그들은 할빈학원, 할빈고등공업학교, 할빈의학전문학교에 다니는 조선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인학우친목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였으며 이 조직의 골간들로 1928년 가을에는 반제청년동맹 할빈지부를, 1930년초에는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할빈지부를 결성하였다. 우리는 방학때마다 한영애를 파견하여 할빈의 조직들을 지도하였다. 길회선철도부설반대투쟁이 만주를 휩쓸 때 할빈의 청년학생들이 그에 호응하여 큰 규모의 투쟁을 벌릴수 있은것은 바로 이 조직들이 은을 냈기때문이였다.

 

 

할빈의 혁명조직들에는 끌끌한 청년들이 많았다. 지금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으로 사업하고있는 서철동무도 그때 할빈의 공청지부에서 일하였다.

 

 

김혁을 책임자로 한 조선혁명군 소조가 도착하였을 때 할빈의 공기는 매우 살벌하였다. 학우친목회나 독서회와 같은 합법적조직들까지도 지하에 들어가야 할 형편이였다. 공청을 비롯한 비합법적조직들은 철저히 자기를 위장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김혁은 할빈동무들과 함께 조직을 지켜내고 조직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도를 토의하였다. 그의 제의에 의하여 이 도시의 모든 혁명조직들은 여러개의 조로 분산되여 지하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김혁은 무장소조원들과 함께 부두로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을 비롯한 각계각층 군중속에 깊이 들어가 카륜회의방침을 정력적으로 해설하였다. 그는 능숙한 조직적수완과 담력을 가지고 청년들을 교양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기층당조직을 내오기 위한 준비사업과 무기를 확보하기 위한 사업도 힘있게 밀고나갔다. 적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가며 국제당련락소와의 련계도 지어놓았다.

 

 

할빈의 일을 추켜세우는데서는 김혁의 공로가 컸다. 그는 혁명의 한개 지역을 담당한 책임자답게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다가 할빈도리의 비밀련락소에서 불의에 달려드는 적들과 총격전을 벌리던 끝에 최후를 결심하고 3층에서 뛰여내렸다. 그런데 강철같은 육체가 그의 뜻을 배신하였다. 김혁은 자결에 성공하지 못한채 적들에게 붙잡혀 려순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박해에 시달리다가 옥사하였다고 한다.

 

 

김혁은 우리 혁명대오에서 백신한과 함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삶과 젊음을 바친 첫 세대의 대표자의 한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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