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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어도어루스벨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원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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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친일청산 작성일16-01-06 16:3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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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국 지배를 원했는가? 가쓰라-태프트 비밀 협약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는 1904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재선에 성공했다. 루스벨트는 선거 유세에서 ‘공정거래(the Square Deal)’를 강조했다. 이는 루스벨트가 1902년 광산 파업 타결 후 대기업과 노조의 평화 공존이라는 이상을 묘사하면서 한 말이었다. 예컨대 기업과 노조의 대립 시 그걸 조정할 때에 역설하는 개념이 바로 ‘공정거래’였다. 이는 곧 그의 별명이 되다시피 했다.

 

재선 후 루스벨트는 열정적인 자연보호 운동을 벌였다. 그는 1905년 산림청의 권한을 강화하고 그 책임자로 지퍼드 핀촛(Gifford Pinchot, 1865~1946)을 임명했다. 루스벨트의 자연보호 정책에 따라 2500개의 댐 건설이 취소되고 1억 9천만 에이커의 광대한 숲이 국유림이 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국립공원은 2배로 늘어났고, 16개의 국립 명소와 51개의 야생 서식처가 생겨났다.

 

핀촛이 자연을 보호하면서도 ‘현명한 사용(wise use)’을 부르짖은 소극적 자연보호주의자(conservationist)인 반면, 루스벨트 행정부와 협력하면서도 갈등 관계를 빚곤 했던 존 뮤어(John Muir, 1838~1914)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를 원한 적극적 자연보호주의자(preservationist)였다. 1892년 뮤어의 주도하에 미국 최초의 전국 규모 환경 단체인 시에라 클럽(Sierra Club), 1905년 오더본협회(Audubon Society) 등이 창설되면서, 미국의 자연보호 운동은 이 두 갈래 흐름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된다.

 

‘자연보호의 영웅’ 루스벨트의 이중성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글레시어 포인트(Glacier Point)에 나란히 선 루스벨트와 존 뮤어. 루스벨트 행정부의 자연보호 운동에 힘입어 그의 임기 동안 국립공원이 2배로 늘어나고, 국유림 및 야생 서식처가 많이 생겨났다.

 

영웅주의와 카우보이 기질이 충만한 루스벨트가 단지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낭만적 발상으로 자연보호를 외쳤을까? 여기엔 무언가 다른 이유가 더 있을 것 같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루스벨트를 ‘자연보호의 영웅’으로 기리고 있지만, 박진빈은 “루스벨트는 단지 자연이 아름답기 때문에 보존하자고 한 것이 아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류사를 인종 간 투쟁의 역사로 인식했던 그는, 미국인이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우수한 인종이라고 믿었다. 로마→게르만→앵글로색슨으로 이어진 당대의 가장 우수한 인종이, 마침내 아메리카 대륙에 와서 거친 자연과 원주민을 상대로 투쟁하여,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최고의 품종 개량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이 우수한 인종이 나약해지는 징후를 보였는데, 루스벨트는 그것이 지나친 도시화의 결과라고 판단했다. 미국인을 미국인으로 만든 거친 자연과의 투쟁 기회가 줄어든 것, 그것이 바로 문제였다. 루스벨트는 공원이나 숲으로 캠핑을 가서 말을 타고 야생동물을 사냥하고 거친 자연을 경험하는 것이, 미국인의 야성을 깨우고 단련시켜 더 뛰어난 우성인자로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루스벨트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 철저한 사회진화론자였다. 그런 그는 1899년 일본 사상가 니토베 이나조(, 1862~1933)가 영문으로 발표한 [Bushido(무사도)]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이 책을 30권이나 사서 지인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사무라이 정신에 심취하는 동시에 친일()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는 1900년 8월에 뉴욕 주지사로서 부통령 후보가 되었을 때에 “나는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고 했을 만큼 일본에 편향적이었고, 이 편향성은 이후 내내 유지ㆍ강화되었다.

 

루스벨트는 인종적 차이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철저한 인종주의자였음에도 일본만큼은 황인종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1904년에는 “중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인종이라 말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당치도 않은 말이냐”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인종주의’에 ‘문명화’라는 또 하나의 기준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터키인들은 일본인들보다 인종적으로 우리(백인종)에게 더 가깝다. 그러나 터키인들은 우리의 국제사회(소위 ‘문명권’)에서 구제 불능의 회원인 반면 일본인들은 바람직한 신입 회원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본의 승리

 

“일본이 한국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는 루스벨트의 희망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에 대한 루스벨트의 태도는 처음엔 적대적이지 않았으나, 1902~1903년 러시아가 만주에서 병력 철수와 문호 개방 유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계기로 적대적으로 돌아섬으로써 한국에겐 재앙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미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1년 1월 러시아의 한반도 중립화 제안을 거절함으로써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1902년 1월 30일, 일본은 영국 런던에서 러시아에 대해 만주로부터 철병할 것과 한반도에 있어서의 일본의 지위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그 대신 일본은 중국에 대한 영국의 특수 권익을 인정했다.

영일동맹 직후 러시아는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한반도로 군대를 파견해 일본과 충돌을 빚게 했다. 아직은 러시아와 맞붙을 자신이 없었던 일본은 충돌을 피하기 위해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양분해 각각 영향력을 행사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39도선 분단안을 제시해 담판은 결렬되었다.

 

1904년 1월 26일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Nikolai Ⅱ, 1868~1918) 는 알렉세예프 극동 총독에게 친필 서명이 든 전문을 보내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일본이 먼저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일본이 먼저 개전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대한제국의 남해안 혹은 동해안으로 상륙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 만약 38선 이북 서해안으로 상륙병과 함대가 북진해오면 적군의 첫 발포를 기다리지 말고 공격하라.”고 긴급 지시했다.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연합함대가 여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향해 돌연 어뢰 공격을 감행했다. 러시아 함대는 큰 손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잃었다. 바로 그날 일본은 동시에 인천 제물포 해상에서 러시아 군함 2척을 기습 공격해 격침시켰다. 일본은 이틀 뒤엔 2월 10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여순항의 모습.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은 만주 여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향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는 이틀 뒤인 2월 10일 이루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러일전쟁은 1905년까지 만주에 2백만 이상의 병력이 집결된 대전쟁이 되었다. 당시 러시아와 일본의 군사력을 비교해보면, 러시아가 전반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러시아의 병력은 1백만이 넘었으며 34만 5천 명의 예비 병력과 더불어 동원 체제에 들어가면 450만 명을 추가로 동원할 수 있었다. 해군력은 51만톤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에 이은 세계 4위였으며, 4개의 주요 조선소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정규 병력 18만에 예비 병력 67만 명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해군력은 26만톤이었고 조선소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은 하나로 뭉친 반면, 러시아는 둘이었다. 러시아는 차르 체제가 망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레닌(Vladimir Illich Lenin, 1870~1924)으로 대표되는 혁명 세력의 내부 도전에 직면해 안팎으로 두 개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05년 1월 2일 일본은 여순(뤼순)을 점령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완전히 깨트리는 데에 성공했다. 일본군이 밀착포위 공격을 가한 지 240일만이었다. 레닌은 1905년 1월에 쓴 <여순항의 함락>이란 글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기뻐할 모든 이유를 갖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의 군사적 목표는 대체로 달성되었다. 진보적이며 선진적인 아시아는 후진적이며 반동적인 유럽에게 치유될 수 없는 일격을 가했다. 10년 전 러시아를 우두머리로 하는 이 반동적 유럽은 일본에 의한 중국의 분쇄에 의해 불안해졌다. 그래서 유럽은 연합하여 일본으로부터 그의 승리의 최고의 열매를 빼앗아버렸다. 그럼으로써 유럽은 여러 세기 동안 정당화된 아시아 인민의 착취에 대한 우선적이며 일차적인 권리를 지켰던 것이다. 일본에 의한 여순항의 재정복은 반동적 유럽 전체에 대한 일격이다. …… 러시아 인민이 아니라 러시아 절대주의가 창피스런 패배를 겪은 것이다. 러시아 인민은 절대주의의 패배에 의해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러일전쟁의 종군 기자들이 묘사한 조선의 모습은?

 

러일전쟁은 국제 뉴스의 전쟁이기도 했다. 전쟁 당사국 일본은 80여 명의 특파원을 파견, 전황을 시시각각 타전했다. 일본군의 압록강 도하 작전을 참관한 외국인 기자는 총 13명이었는데, 국적별로는 영국 3명, 미국 3명, 프랑스 2명, 이태리 1명, 독일 2명, 오스트리아 2명, 스위스 1명이었다.

 

러일전쟁 종군 기자단에는 캐나다인으로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The London Daily Mail)>지에서 파견되었던 매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 [톰 소여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Twain, 1835~1910), <샌프란시스코 이그제미나(The San Francisco Examiner)>지에서 파견된 잭 런던(JackLondon, 1876~1916)도 있었다. 런던은 20세기 초 미국 최고의 사회주의 작가로 명성을 떨친 인물인데, 그는 1904년 3월 5일자 일기에서 한국인을 다음과 같이 조롱했다.

 

“한국인들은 이미 그들을 점령하여 지금은 주인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상전인 ‘왜놈’들을 몸집으로 훨씬 능가하는, 근육이 발달된 건장한 민족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는 기개가 없다. 한국인에겐 일본인을 훌륭한 군인으로 만들어주는 그러한 맹렬함이 없다. …… 정말로 한국인은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중에서도 의지와 진취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가장 비능률적인 민족이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 당시 서양인들의 기록을 보면 일본은 선진적이고 문명화된 민족으로, 조선은 무기력하며 자립 능력이 없는 게으른 민족이라고 몹시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비단 런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승리를 알린 러일전쟁 종군 기자들의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조선에 큰 타격이 되었다. 이와 관련, 송우혜는 “무력하고 무능한 지도자와 제 집마저 버리고 도망치는 백성……. 이렇게 부정적으로 형성된 나쁜 이미지와 국제적 여론, 그리고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손잡을 곳 하나 없었던 고립된 나라 대한제국. 그 같은 보도 경쟁으로, 세계 각국의 시민층에까지 대한제국과 국민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국제적으로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국운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05년 1월, 루스벨트는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 1838~1905)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 번 휘두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자신을 위해서도 스스로 하지 못한 일을, 자기 나라에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을 위해서 해주겠다고 나설 국가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아웃룩 매거진(Outlook Magazine)>의 편집장 조지 케난(George Kennan, 1845~1924)도 루스벨트의 친일 성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케난은 1905년에 출간한 [나태한 나라, 한국]에서 조선인을 나태하고 무기력하며, 몸과 옷차림이 불결하고 아둔하며, 매우 무식하고 선천적으로 게으른 민족이라고 악평을 늘어놓은 인물이었다.

 

케난은 개인적으로도 루스벨트의 친구이자 이른바 ‘루스벨트 사단’에 속한 인물이었던 바, 그가 발행하는 잡지는 루스벨트가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유일한 잡지였다. 케난이 잡지 기사를 통해 한국을 “자립할 능력이 없는 타락한 국가”라고 묘사하자, 루스벨트는 케난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에 관하여 쓴 당신의 첫 번째 글은 정말 마음에 든다”고 동감을 표시했다. 1905년 8월 루스벨트는 “나는 이전에 친일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보다 훨씬 더 친일적이다.”라고 실토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다

 

 

 

러시아 선박을 공격하는 일본 해군. 각국의 외교전쟁이기도 했던 이 전쟁에서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반면,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의 소극적 지원 탓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은 각국의 외교력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외교전쟁이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지원한 반면, 독일과 프랑스가 러시아 지원에 소극적이었던 것이 러일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루스벨트는 독일과 프랑스가 일본에 개입한다면 미국은 당장 일본 편에 가담하겠다고 두 나라를 위협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캐롤 쇼(Carole C. Shaw)가 2007년에 출간한 [외세에 의한 조선 독립의 파괴(The Foreign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는 루스벨트가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전쟁 비용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사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지금까지 일본 학계는 이와 관련해 미국의 유대인 은행가 제이콥 쉬프(Jacob H. Schiff, 1847~1920)가 전쟁 비용을 조달했다는 내용만을 거론했지만, 이 책은 3000만 달러를 지원한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를 비롯하여 존 피어몬트 모건(JohnPierpont Morgan, 1837~1913) 등 미국의 6개 재벌이 일본에 차관을 지원한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조달한 일본의 전쟁 비용은 약 7억 엔(현재가 14조 원 상당)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의 2세인 쇼는 “100여년 전 우리(미국)가 ‘공공의 선’이란 미명하에 작은 나라(대한제국)의 국권에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해보라”며 “미국인 한 사람으로서 사죄의 뜻을 표하고 싶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러일전쟁이 사실상 일본의 승리로 귀결되자 루스벨트는 자국 식민지인 필리핀 시찰 명목으로 육군 장관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 1857~1930)를 일본으로 보내 7월 29일 일본 총리이자 임시로 외상도 겸하고 있던 가쓰라 다로(, 1848~1913)와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게 했다. 이 밀약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을 일본이 지배함을 승인한다”고 규정했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해주고 대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했다. 이는 약 20년 후인 1924년 역사가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 1883~1949)의 루스벨트 문서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당시 미국의 육군 장관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훗날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미국의 제 27대 대통령이 된다.

일본의 총리대신이자 외상이었던 가쓰라 다로.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통해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시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눴던가? 한국인으로선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망언들이 오갔다. 가쓰라는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된 행태가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폈고, 태프트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는 것이 동아시아 안정에 직접 공헌하는 것이라며 맞장구쳤다. 영국도 8월 12일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하고, 대신 일본은 영국의 인도ㆍ버마 등의 지배를 두둔하였다.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들의 비난과 저주를 받기에 족한 음모를 획책하고 그걸 실행에 옮겼지만, 한국의 엘리트 계급이 그로부터 꼭 배워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Oblige: 엘리트의 사회적 책무)’의 실천이다. 훗날 루스벨트는 전투기 조종사이던 막내아들이 1918년 프랑스 공중전에서 전사하고, 큰아들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전사함으로써 1ㆍ2차 대전에 아들 하나씩을 잃은 아버지가 된다. 오늘날 루스벨트가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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