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논란, 시원하게 해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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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주민보 작성일13-10-19 16:23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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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논란, 시원하게 해결하자 | ||||||
[통일문화 만들어가며](198) 친일파들의 작품을 대하는 방법 | ||||||
기사입력: 2013/10/20 [00:55] 최종편집: ⓒ 자주민보 | ||||||
[편집자 주: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대한 가치판단과 본지의 편집방향은 무관합니다. 다만 필자가 소개하는 북에 대한 정보를 통해 남북이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올해 가을에는 이상스레 광복 전 음악인 홍난파(1898~1941)가 자꾸 눈과 귀에 들어온다. 먼저는 9월에 작곡가 류재준(43)씨가 홍난파를 기리는 난파음악상의 제46대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수상을 거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류 씨는 홍난파의 친일 행적을 알게 된 이상 난파음악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면서 그 상의 공정성과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난파음악상이 제정된 1968년 이래 수상 거부는 처음이었는데 변경된 수상자 소프라노 임선혜(37)씨도 거부하는 바람에 난파기념사업회가 난처해났단다. 10월에는 “재미동포아줌마”로 소문난 신은미 씨가 조선(북한)의 정방산에 가서 성불사를 관광하다가 친일파인 홍난파가 작곡한 “성불사의 밤”을 불러도 좋을지 갈등을 겪었으나 정방사의 주지는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그 노래를 부르더라는 경험담이 《오마이뉴스》에 실렸다. 조선의 젊은 가이드는 그 노래를 전혀 모르던데 주지는 잘 알더라는 묘사, 그리고 조선사람이 왜 그런 사람의 그런 노래를 거리낌 없이 부르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북에서는 친일청산을 철저히 했기에 어쩌고 등)들이 흥미로웠다. 필자가 아는 바로는 일반 조선사람들은 홍난파의 친일경력을 잘 알지 못하거니와 관심도 별로 없다. 사실 한국에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원회가 홍난파를 2009년 친일 인사 명단에 올리지 않았더라면 그를 친일파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홍난파의 유족들은 친일파등록에 반발해 행정소송을 냈었고 어떤 사람들은 홍난파가 심하게 얻어맞은 다음에 전향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과정이야 어떠하든지 홍난파가 1930년 후반 들어 친일단체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친일 가요를 작곡했고 1940년 매일신보에 일제에 음악으로 보국하자는 내용의 기고를 하는 등 친일 행적을 분명히 남겼다. 게다가 광복 전에 세상을 뜨다나니 자신의 처사를 뉘우칠 기회도 없었다. 하기야 명이 길어 친일행위를 반성하거나 뉘우칠 기회를 충분히 가진 자들조차 한국에서는 뻔뻔스레 살아온 경우가 많으니까 홍난파가 광복 후에 뉘우쳤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일찍이 돌아간 건 아무래도 아쉽고 후세학자와 연구자 및 대중들에게 수많은 물음표를 남겼다.
1990년 윤이상음악연구소가 펴낸 《통일노래 100곡집 우리의 소원은 통일》(사진)은 “조국 북반부에서 창작된 노래들”, “조국 남반부에서 창작된 노래들”, “해외에서 창작된 노래들”, “조국의 민요들”, “해방전에 창작된 노래들” 등 5부류로 나뉘어졌는데 홍난파의 작품은 《고향의 봄》, 《봉선화》, 《봄처녀》, 《그리움》, 《사공의 노래》, 《성불사의 밤》등 6수가 수록되었다. 1995년 평양출판사가 펴낸 《민족수난기의 신민요와 대중가요들을 더듬어》(최창호 편찬, 아래 사진)에는 홍난파의 작품이 7수 수록되면서 창작시기도 밝혔으니 《봉선화》(김형준 작사, 1920년), 《사공의 노래》(함호영 작사, 1921년), 《봄처녀》(리은상 작사, 1925년), 《그리움》(리은상 작사, 1920년대말엽), 《성불사의 밤》(리은상 작사, 1920년대말엽), 《옛 동산에 올라》(리은상 작사, 1920년대말엽), 《사랑》(리은상 작사, 1920년대말엽)이다.
홍난파는 그래도 민족의식이 강한 작품들을 썼고 또 구타를 못 이겨 친일했다는 설이나마 있으나, 그런 설도 없이 그저 한때 괜찮은 작품들을 내놓았다가 일제치하에서 지저분하게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편안히 보낸 윤극영 같은 인물도 있다. 그렇다 해서 그 작품들을 부정하겠는가? 위에서 거든 뒤의 두 책에는 윤극영의 작품들도 상당하다. 그리고 조선의 문학예술작품들에서 윤극영의 《반달》을 인용한 경우가 아주 많다. 윤극영이 지은 《고드름》이 변해서 혁명가요 《여성해방가》로 되었고 항일혁명시기 거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건 필자가 [통일문화 만들어가며] 114편 “친일경력 윤극영, 항일에 기여”(www.jajuminbo.net/sub_read.html?uid=9076)에서 소개한 바이다. 인물들의 경력을 꼬치꼬치 캔다면 이 세상에 남을 만한 작품이 얼마 없을 것이다. 인물과 작품을 갈라서 보고, 작품들도 좋고 나쁨을 갈라서 대하는 게 올바른 처사겠다. 첫째, 친일경력이 확실한 사람들은 그 이름을 따서 기리는 이러저런 상들을 만들지 않는 게 좋고, 수상자로 지명된 사람들은 수상을 거부하는 게 올바른 처사겠다.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상을 만들면 자연스레 그 사람됨과 경력과 결부시켜 생각하니 말이다. 둘째, 친일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도 친일과 상관 없는 작품들은 대중이 자유로이 부르는 게 좋겠다. 하기야 너무 낡거나 내용이 빈약한 작품들은 부르라 해도 부를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셋째, 친일경력을 가진 사람들의 친일작품들은 자료들을 잘 보존해두고 전문연구인들이 연구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 또한 대중도 필요한 경우에는 조상들이 어떤 친일작품을 만들었느냐 알 수 있도록 전문자료모음집을 만들어두는 게 좋겠다. 그래야만 후세의 거울로 되니 말이다. 넷째, 친일경력이 확실한 사람들이 친일작품을 반일, 항일작품으로 둔갑시킨 경우에는 그 진상을 밝히고 반일, 항일작품으로 높이 평하지 않는 게 좋겠다. 조두남의 일방적 주장으로 신화가 만들어진 《선구자》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노래자체는 부를 만 하더라도 그 무슨 반일투사가 가사를 갖다줘서 노래가 나왔다는 따위의 창작시기부터 작사자의 신분, 내용에 이르기까지 거짓말로 일관된 신화는 깨버려야 하고 또 널리 알려야 한다. 물론 이런 처사가 한국에서 제대로 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북한”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에 나온 혁명가요 《적기가》가 “북한가요”로 정의되고, 한국의 음악인 백자 씨가 자신이 작사, 작곡했음을 밝힌 《혁명동지가》도 “북한혁명가요”로 정의되어, 어떤 사람들이 그런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자체가 죄명으로 간주되는 게 한국의 현실이 아닌가. 노래 한 수를 부르기도 자유롭지 못한 현실! 통일이 이뤄져야만 뿌리를 뽑을 수 있겠다만, 지성인들이 앞서서 통일문화를 만들어가면 기막힌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을 것이다.(2013년 10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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