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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역사관과 국정원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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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환 작성일13-09-13 17:3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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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역사관과 국정원 사태<칼럼> 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이승환  |  tongil@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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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9.11  11:4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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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역사전쟁’이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뉴라이트가 집필한 ‘교학사’의 역사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는 가운데, 여당의 한 실세가 역사전쟁에서 좌파에 승리해야 한다며 여당 국회의원 150여명이 참여하는 초매머드의 연구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역사라는 학문의 영역에 정치가 개입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과거의 수많은 사례에서 보듯이 학문의 영역에 정치가 개입하는 순간, 학문 해석은 정치에 의해 좌우되게 된다. 그래서 역사에 대한 평가와 해석이 정치화되는 순간 ‘학문적 논쟁’은 사라지고 정쟁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논쟁이 사라지고 ‘역사전쟁’이란 말이 회자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국가의 본질은 이념인가?

역사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학을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데 앞장선 것은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이다. 최근 한 뉴라이트 학자는 자신이 쓴 책의 사실상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국가의 본질은 이념이다. 국가의 성공과 실패는 결국 이념의 성공과 실패이다. 대한민국은 건국의 선각자들이 국가이념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 반면교사(反面敎師)가 공산주의 이념으로 향한 북한의 역사이다.”(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기파랑, 2013)

이런 입장에 동의하는 한 언론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광복 직후 문맹률 78%인 나라에서 자유민주주의 개념을 이해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됐을까요? 해방 정국의 대혼돈 속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갖은 책동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건 기적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멋모르고 좌우합작 정부를 세웠다가 하나같이 공산화되었습니다.”(<조선일보> 2013. 8. 27) 이 기자는 그런데도 대한민국을 공산화의 마수에서 구출해낸 이승만이나 박정희를 위한 동상이 대한민국의 상징공간 광화문에 없다는 사실에 개탄해마지 않는다.

이들은 아마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나라를 산업화의 반석에 세운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그들의 후예들에 대한 제대로 된 ‘예찬’을 할 수 없는 오늘의 사회와 학문 풍토에 깊은 불신과 분노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선각자들이 국가이념에서 올바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이들의 주장은 그저 그럴듯한 ‘주관적 단정’일 뿐 바로 모순에 직면한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1970년대까지 남한보다 잘 나갔던 북한이 그때까지는 이념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주장은 그 근본전제부터 논란이 될 수 있다. 한국 우익의 이념이 자유민주주의였다는 이들의 전제가 역사적 사실과는 너무 배치되기 때문이다.

한국 우익의 이념은 자유민주주의?

뉴라이트 스스로 말하듯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 바로 한국 우익의 역사였다. 한국의 우익은 출발부터 확고한 이념형 모델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대부분 이익중심과 정치공학, 그리고 기회주의에 근거하여 이합집산해왔다. 실제로 이들은 이익과 정치적 타산이 선다면 언제든 서슴없이 자유민주주의를 희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한국의 우익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념모델이나 그 파수꾼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역사적 경력에 그대로 나타난다.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반공을 명분으로 친일과 분단에 눈감았고, 세계사에 길이 부끄러운 ‘사사오입’ 개헌과 100% 득표율의 3.15부정선거를 자행하며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였다. 또 그는 정적인 한민당을 제어하기 위해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했지만, 그가 56년 선거에서 진보당 당수가 되어 무서운 정적으로 등장하자 증거도 없이 북한자금을 수수했다며 체포한 후 법원의 확정 판결 다음날 바로 사형에 처해버렸다. 필요하면 좌익도 이용하고 버린 것이다.

박정희는 더욱 극적이다. 다카키 마사오(후에 오카모도 미노루로 개명)라는 창씨개명을 가졌던 관동군 중위 박정희는 일제 패망과 함께 무장 해제되자 광복군을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장준하로부터 ‘기회주의자’로 면박만 당하게 된다. 또 자신의 친일경력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남로당에 가입한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 이후 그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뒤 같은 일본 육군 출신의 정일권, 백선엽 등에 의해 구명 받아 한국전쟁 시기에는 소령으로 군에 복귀하였고, 전쟁 후에는 미국에서 고등군사교육을 받았다. 1961년에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그는 중앙정보부를 통해 비밀리에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산업화를 위해 단행한 대일청구권 협상이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모두 장면정권이 작성한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집권 이후 그는 권력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김대중납치사건, 장준하 암살 의혹, 그리고 체육관선거를 헌법화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 등으로 철저히 자유민주주의를 압살하였다.

이런 이승만과 박정희의 역사에서 이념적 일관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을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지킨 선각자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역사에서 이념은 언제나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권력을 위해 때로 친일과 분단을 선택하였고,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반공’은 그를 위한 가장 좋은 명분이었다.

‘역사전쟁’과 국정원 사태

뉴라이트 세력의 기존 역사학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사실 그들 스스로의 극우 냉전주의적, 반공주의적 학풍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뉴라이트 역사관의 뼈대를 이루는 인식과 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헌정파괴의 역사를 미화하던 과거 극우세력의 당파적 역사해석을 부활시킨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일부 정치세력들이 뉴라이트를 앞세워 역사를 더욱 이념화하고 정치수단화 하는데 매달리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지만 역사를 일부 집단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정치화와 이념화의 장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문제의 국정원 댓글사태에 비하면 어쩌면 매우 ‘신사적 행위’에 해당할 지도 모른다. 국가기관이 현재의 역사해석에 개입하여 특정세력에 유리하도록 선거여론을 조작한 행위는 ‘역사전쟁’이 아니라 ‘범죄적’ 역사개입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6·25가 북침인지 남침인지 혼동하고, 천안함이 (북한이 아닌) 다른 세력에 의해 공격 받은 것으로 아는 젊은이가 많”기 때문에 ‘젊은 세대의 올바른 국가관’을 위해서 국정원의 여론개입이 반드시 필요한 활동이었다며 불법 선거개입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전쟁 전 민간인을 사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더라도, 실전에서 적군이 민간인을 방패삼아 대항하다 보면 민간인 피해도 생길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는 대목에서는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발언은 1948년 4.3제주항쟁 당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당시 국방경비대 9연대장 박진경의 발언)며 아무런 재판이나 절차 없이 무차별하게 양민들을 학살한 비극적 사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정치화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여론에 대한 국가기관의 공작적 개입을 추진한 것이 이른바 ‘국정원 사태’의 본질이다. 이는 그 자체로도 이미 범죄적 행위이다. 더구나 불법적 선거개입 행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올바른 국가관 선도를 위한 여론개입 과정에서 불가피했다는 주장을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권력이 국민들로부터 유리되는 것이 가장 큰 범죄이다. 권력으로부터 국민을 배제하기 위해 국민의 눈과 귀를 조작하는 것은 더 큰 범죄이다. 한국 현대사의 모든 비극은 국민의 눈과 귀를 막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오만과 독선’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오만과 독선’은 반드시 자유민주적 헌정질서의 파괴를 불렀고, 이런 헌정파괴가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을 불러일으킨 비극의 원천들이었다.

이승환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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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은 1958년 경북 포항에 태어나, 고려대 경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정치학 석사)을 거쳐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승환은 통일맞이 정책위원장, 열린정책연구원 정치아카데미 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시민평화포럼 공동대표이며, 또한 민화협 집행위원장,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지난 15년여에 걸쳐 남북 민간교류 활동을 전개해왔으며,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6.15남북공동행사 등을 진행해왔다.

그가 쓴 글로는 “문익환, 김일성 주석을 설득하다”(창작과비평, 통권 143호, 2009), “6월항쟁 20년, 남북 및 북미 관계의 변화와 통일담론”(창작과비평, 통권 137호, 2008), “2000년 이후 대북정책담론 연구”(북한대학원, 2008) 등이 있다.

개인 블로그 http://blog.naver.com/lsh2k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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