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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성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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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황태성 작성일13-07-16 01:5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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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인생의 멘토가 한 사람 있었다. 상주 출신의 황태성((1906-1963년 12월 14일)이었다. 박 대통령보다는 10살 정도 나이가 많았고, 중형((仲兄)인 박상희와는 막역한 사이로 박상희에게 중매를 선 것도 황태성이었다. 중매를 선 여인은 후에 김종필의 장모가 된다.

그의 간단한 이력은 아래와 같다.
1921년 경성제일고보 입학
1924년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
1925년 연희전문학교 상과 입학, 퇴학처분 받음
1927년 김천지역에서 신간회 활동
1929년 광주학생운동 경성지역 총지휘자로 활동하던 중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2년 복역. 출옥후 김천에서 재활동
1935년 일본경찰에 검거. 3년6개월 복역
1944년 건국동맹 전라남북도 책임자로 활동
1945년 조공 활동
1948년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 북한 무역상 서리 역임
1961년 8월 30일 5.16후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남북통일 협상 위해 밀사로 남하
1961년 12월 20일 중앙정보부가 간첩죄를 적용해서 체포
1963년 12월 14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

박정희는 어릴 때부터 황태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들어갈 때 그 문제에 대해 황태성을 찾아가 상의했고, 자신의 신상에 관한 것을 일일이 자문받으러 황태성을 찾았으며 해가 바뀔 때마다 세배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박정희는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만주로 갈 때도 황태성과 상의했다. 황태성은 “어디 가든지 자신을 위해 단련한다면 좋겠다”는 뜻에서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1946년 5월 의기소침해 돌아온 박정희에게 권 입대와 남로당 활동을 권유한 것도 황태성이었다. 입당 보증인이 바로 그였다고 한다. 황태성은 1946년 '대구폭동'이 일어난 후 수배됐고, 이후 월북했다. 월북 후 황태성은 1953년 '박헌영,이승엽사건'이 일어나자 남로당 출신을 위한 '강습소'에 입소해 교육을 받은 후 무역상 서리로 활동하다 건강이 좋지 않아(폐 수술) 물러났다.

두 사람은 15년이 지난 1961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박정희 의장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황태성이 밀사로 내려온 것이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박정희의 성향을 알아보기 위해 북에 있던 박정희와 관련된 인물을 다 소집해 토론을 했고, 결론이 나지 않자 밀사를 내려보내기로 결정했고, 이때 황태성이 밀사를 자청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남조선에서 군사쿠데타가 났을 당시 김일성 수상은 쿠데타 주체의 과거경력과 관련해 어떤 가능성을 내다보고, 쿠데타의 성격이 무엇인지, 박정희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그래서 김일성 수상은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 가운데 박정희와 잘 아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때 내가 자진해서 내려가겠다고 나섰다.’

1961년 8월 건강이 좋지 않아 업혀서 휴전선을 넘은 황태성은 30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가 내려와 밝힌 임무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5·16 직후 군사정권이 북으로 공작원을 파견한 진의를 파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961년 7, 8월경 남쪽의 군사정부가 국제문화협회 소속의 이정현이라는 사람을 북쪽에 보내 서부전선에서 영관급 군인으로 이루어진 남북협상회의를 갖자고 제의했다는 북 내부에서 이 문제를 검토한 결과 제안의 진의를 확인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황태성에게 이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서해 용매도에서의 비밀접촉은 실제로 진행됐고, 그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이 1992년에 특종보도했다). 둘째는 남쪽의 제안이 진실이라면 외세의 간섭 없이 민족간의 대치상태를 종식시키고 평화적인 통일을 하자는 뜻을 전달하고, 이를 위해서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남북에 비밀무역대표부를 설치하자는 안을 가지고 왔다. 셋째는 박정희 의장에게 모종의 중대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고 밝혔으나 그 정보가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황태성은 박정희 의장과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왕학수 고려대 교수(당시 최고회의 기획위원)와 박정희 의장의 형수인 ‘조 여사’를 내세워 접촉을 시도했다. 얼마 후 중정 사무실에서 요원들을 만났고, 다시 며칠 후인 10월 24일 정보부 사무실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출두했으나 그날로 구속됐다. 그는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거쳐 육군본부 내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재판기간에 박정희와 김종필 중정부장을 만났다, 만나지 않았다 논란이 있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황태성 본인은 할 말은 다 했다고 했다. 1963년 대통령선거 기간에 야당이 황태성문제를 정치이슈화했고, 대통령 취임식 사흘전인 1963년 12월 14일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중정부장이었던 김형욱이 확정판결을 미루던 박정희 대통령을 압박해 사인을 받았다고 한다.

황태성이 사형당했을 때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하며 황 선생 사진을 주니까 사진을 보면서 “황태성 선생도 세월은 못 이기시는구나. 많이 늙으셨구나” 했다고 한다.
황태성과 박정희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뒤 박정희 대통령은 광복절 축사에서 처음으로 평화통일론 내놓았다.
일제강점, 해방과 분단, 남북대결 등 격동의 한국근현대사에서 얽히고 설킨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이념으로만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정창현 교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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