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③ 박근혜와 최태민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박근혜 작성일13-05-17 22:49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이름 7개, 부인 6명, 승려 목사 ‘최태민 미스터리’
4면| 기사입력 2012-07-17 19:16 | 최종수정 2012-07-29 18:15
[한겨레] 2012 대선주자 탐구|박근혜③ 박근혜와 최태민
지난 40년 가량 박근혜(60)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최태민(1912~1994)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자주 따라붙었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가 총탄에 쓰러진 뒤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는 ‘새마음봉사단’을 대외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최태민과 함께 운영했던 단체다. 사이비종교 ‘교주’였다는 설도 있어 최태민의 전력이 불분명하던 터에, 아버지 박정희도 20대의 딸이 그에게 현혹됐다고 생각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대외 활동을 재개한 박근혜는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꾸린다. 동생 근령(58)과 대립했던 1990년 육영재단 분란의 배경에도,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56)의 전횡 논란이 있었다.
1998년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최태민의 사위(최순실의 남편) 정윤회(57)가 비서실장이란 호칭을 달고 등장한다. 2004년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면서 정윤회는 종적을 감췄지만, 2007년 경선 때도, 지금도 그가 박근혜의 비선 조직을 이끌며 핵심 측근으로 활약중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유신말기 새마음봉사단 함께 운영
교계에선 “사이비” 구설수
“부인 6명·이름 7개”
박 “의혹 제기됐지만 실체 없었다”
■ ‘6명의 부인, 7개의 이름’
최태민은 흔히 목사로 불린다. 1975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뒤부터 생긴 호칭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며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사자료’를 보면, 그는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태민은 1942~45년 황해도경의 순사였다. 해방 뒤 남쪽에 둥지를 튼 그는 이름을 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 대전, 인천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최태민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최태민은 1951년 군을 떠나며 이름을 봉수로 바꾸고,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엔 김아무개씨와 결혼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했다. 곧장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고, 이름을 퇴운으로 바꿨다. 1년여 뒤 김씨와의 문제가 잠잠해지자 산에서 내려와 부산에서 전 부인 임아무개씨와 다시 결합했다. ‘수사 자료’는 임씨가 5번째, 김씨는 6번째 부인이라고 표기했으나, 1~4번째 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월간조선>(2007년 7월호)은 별도의 자료를 인용해 최태민이 6명의 부인으로부터 모두 3남6녀를 두었다며 가계도를 제시한 바 있다.)
임씨와 결합한 뒤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한 최태민은 2년 만에 교장을 그만두고, 이후 몇가지 직책을 지냈다. 1965년엔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했다. 도피중이던 1969년엔 공해남이란 가명으로 등장해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고,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다.
■ 박근혜와의 만남
최태민이 박근혜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최태민은 1974년 육영수 사망 직후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형욱 회고록>은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른바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이다. 최태민은 이를 부인했다. 그는 <가정조선>(1990년 10월호) 인터뷰에서 “‘현몽’ 등의 말이 대학 교육을 받은 박(근혜)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라며 “‘현몽’이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다. ‘위로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는 말로 끝맺었다”고 말했다. 박근혜도 현몽설을 부인했다. 어쨌건 박근혜는 1975년 3월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최태민은 외부 활동을 적극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를 만난 뒤,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는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목사 직을) ‘돈 주고 샀다’는 것이 교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나 이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다. 분명한 한가지는,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태민’이라는 ‘마지막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즈음이다.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한다.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최태민에 대한 ‘수사자료’엔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봉사단 관계자는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도 했다.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소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민정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는 1977년 9월 직접 최태민을 심문했다. 이른바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이다. 대통령 서재에서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백광현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는 설도 있다. 박정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검찰에 넘긴 뒤 검찰 판단에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0·26 때까지 박근혜의 옆을 지켰다.
‘박정희 친국’ 뒤에도 살아남아
전두환 시절도 육영재단 등 활동
박 “어머니 돌아가신뒤 힘들었을 때
바로설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
■ 10·26 뒤 합수부 조사받고도 박근혜 곁에
10·26 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최태민을 언급한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대통령은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을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올려놓았다.”
최태민은 합수부가 진행하는 수사를 받는다. 전두환의 지시로 수사를 맡았던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고 말했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해산 당한다.
박근혜는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간다. 최태민도 다시 등장한다. 박근혜는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3년 뒤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번째 딸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 ‘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 됐다. 분란은 1990년 11월15일 박근혜가 동생 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물러나는 박근혜는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최태민은 이후 서울 역삼동 자택에 칩거한 것으로 전해지며, 1994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노환으로 세상 떴으나
5번째 딸의 남편 정윤희씨
박 ‘미래연합’ 창당때 비서실장
최태민, 사후에도 여전히 ‘그림자’
■ 대이은 ‘충성’
최태민 사후에도 그의 그림자는 박근혜 곁에 남았다.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가 박근혜의 정계 입문 때부터 등장했다. 그는 ‘비서실장’으로 불렸다. 2002년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도 자리를 지켰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가 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2004년 6월~2006년 5월에는 국회 입법보조원으로 등록했다. 박근혜의 정치 입문 초기에 정윤회와 여러 차례 직접 만났던 한 전직 기자는 “최순실은 박근혜가 장충동에 살던 시절부터 말동무로 지낸온 것으로 들었다”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박근혜 의원실의 보좌진을 구성한 것도 정윤회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박근혜는 2007년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정윤회의 등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구에 국회의원으로 처음 나왔을 때다. 개인적으로 캠프를 차려 선거를 치르려니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상대 후보가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실세의 기세가 등등했고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윤회씨가 돕겠다 해서 순수하게 도운 것이다. 그게 인연이 돼 국회의원 됐을 때 입법보조원으로…, 이후 당 대표 때 그만뒀다.”
2007년 7월 이명박 캠프에선 ‘박근혜의 국회 보좌진이 최태민과 친인척 관계다’, ‘박근혜 캠프의 홍윤식 전문가네트워크 위원장과 정윤회가 밀접한 관계다’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전자에 대해선 해당 보좌진이 즉각 부인했고, 후자에 대해선 홍윤식이 최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금까지 정윤회를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다. 각종 의혹에 대해선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었다. 한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나”라며 일축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다시 대통령에 도전하는 오늘도 정윤회의 이름은 여의도를 떠돈다. 친박 내부에선 친박끼리 “내가 모르는 보고서가 올라간다”며,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반대파는 박근혜나 친박의 결정이 이상하다 싶어서 또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한겨레>는 각종 의혹에 대한 해명을 듣고자 6월부터 다양한 경로로 정윤회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7년 경선 시기부터 많은 기자들이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성공한 바 없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 2012 대선주자 탐구 기획연재 보기
■ 최태민 수사 자료?
1980년 전두환 지시로 수사…2007년 한나라 경선서 흘러나와
최태민 1990년 유일한 인터뷰 “이름 7개씩이나? 터무니 없다”
최태민(사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육영재단 분규 때다. 당시 기사를 보면, 최태민의 나이가 69살, 71살, 78살로 들쭉날쭉이다. 그때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방증이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재규가 항소이유보충서에서 10·26 사태의 한 동기로 최태민·박근혜씨의 관계를 거론하고, 그의 비행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이 ‘정리’를 권유하자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특별조사를 지시했다. 지금까지 그의 신상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대부분 당시 수사 결과에 근거한 것”이라며 최태민의 전력과 박근혜와의 관계를 다뤘다. 이 ‘수사자료’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가, 2007년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물위로 떠오른다. <신동아>는 2007년 6월 “중앙정보부가 작성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최태민 관련 수사보고서인 ‘최태민 관련 자료’를 최근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같은달 27일에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후보였던 이해찬의 누리집 게시판에 ‘안기부’라는 이용자가 신동아 자료와 같은 제목의 피디에프(PDF) 파일을 올려놓았다.
최태민의 유일한 인터뷰인 <가정조선> 1990년 10월호에서, 그는 수사자료에 대해 “1977년에 작성된 수사기록이다. 수사 결과 내가 기소된 뒤 기소중지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던 게 아니라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6번의 결혼, 7개의 이름’에 대해서도 그는, “이름이 7개씩이나 된다는 것은 터무니 없다”며, 해방 뒤 38선 이남으로 오면서 호적 정리가 되지 않아 이름과 결혼 기록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최태민 쪽은 1977년 9월 본인이 위출혈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사실상 병실에 감금된 상태에서 수사가 진행돼, 기록도 강압에 의해 작성됐다고 주장했다. 김외현 기자
4면| 기사입력 2012-07-17 19:16 | 최종수정 2012-07-29 18:15
[한겨레] 2012 대선주자 탐구|박근혜③ 박근혜와 최태민
지난 40년 가량 박근혜(60)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최태민(1912~1994)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자주 따라붙었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가 총탄에 쓰러진 뒤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는 ‘새마음봉사단’을 대외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다. 최태민과 함께 운영했던 단체다. 사이비종교 ‘교주’였다는 설도 있어 최태민의 전력이 불분명하던 터에, 아버지 박정희도 20대의 딸이 그에게 현혹됐다고 생각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80년대 후반 전두환 정권이 끝나고 대외 활동을 재개한 박근혜는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인 근화봉사단을 꾸린다. 동생 근령(58)과 대립했던 1990년 육영재단 분란의 배경에도,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56)의 전횡 논란이 있었다.
1998년 국회의원이 된 뒤에는, 최태민의 사위(최순실의 남편) 정윤회(57)가 비서실장이란 호칭을 달고 등장한다. 2004년 박근혜가 당 대표가 되면서 정윤회는 종적을 감췄지만, 2007년 경선 때도, 지금도 그가 박근혜의 비선 조직을 이끌며 핵심 측근으로 활약중이라는 소문이 무성하다.
유신말기 새마음봉사단 함께 운영
교계에선 “사이비” 구설수
“부인 6명·이름 7개”
박 “의혹 제기됐지만 실체 없었다”
■ ‘6명의 부인, 7개의 이름’
최태민은 흔히 목사로 불린다. 1975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종합총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뒤부터 생긴 호칭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를 거치며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사자료’를 보면, 그는 불교 승려가 된 적도 있었고 천주교 세례를 받기도 했다. ‘태민’이란 이름도 각종 가명을 포함해 7번째 이름이다.
1912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최태민은 1942~45년 황해도경의 순사였다. 해방 뒤 남쪽에 둥지를 튼 그는 이름을 상훈으로 바꾸고 강원도, 대전, 인천에서 경찰로 일했다. 이후 최태민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육군과 해병대에서 ‘비공식 문관’으로 일했다.
최태민은 1951년 군을 떠나며 이름을 봉수로 바꾸고, 대한비누공업협회 이사장, 대한행정신문사 부사장 등을 지냈다. 전쟁이 끝난 뒤 1954년엔 김아무개씨와 결혼했다가, 김씨가 그를 여자 문제로 고소하자 부산 금화사로 도피했다. 곧장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고, 이름을 퇴운으로 바꿨다. 1년여 뒤 김씨와의 문제가 잠잠해지자 산에서 내려와 부산에서 전 부인 임아무개씨와 다시 결합했다. ‘수사 자료’는 임씨가 5번째, 김씨는 6번째 부인이라고 표기했으나, 1~4번째 부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월간조선>(2007년 7월호)은 별도의 자료를 인용해 최태민이 6명의 부인으로부터 모두 3남6녀를 두었다며 가계도를 제시한 바 있다.)
임씨와 결합한 뒤 경남 양산에서 개운중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한 최태민은 2년 만에 교장을 그만두고, 이후 몇가지 직책을 지냈다. 1965년엔 천일창고라는 회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유가증권 위조혐의로 서울지검이 그를 입건하자 도피했다. 도피중이던 1969년엔 공해남이란 가명으로 등장해 서울 중림동 성당에서 영세를 받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는 등 사이비 종교 행각을 벌였다. 불교, 기독교, 천도교를 종합했다는 교리를 내세웠고,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또는 ‘태자마마’라는 호칭을 자처했다.
■ 박근혜와의 만남
최태민이 박근혜를 처음 만난 것이 이 무렵이다. 최태민은 1974년 육영수 사망 직후 박근혜에게 편지를 보냈다. <김형욱 회고록>은 편지 내용을 이렇게 전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 네가 왜 모르느냐. 너를 한국, 나아가 아시아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 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
이른바 ‘현몽(죽은 이가 꿈에 나타남)’이다. 최태민은 이를 부인했다. 그는 <가정조선>(1990년 10월호) 인터뷰에서 “‘현몽’ 등의 말이 대학 교육을 받은 박(근혜) 이사장에게 먹혀들 것 같아요?”라며 “‘현몽’이나 정식으로 접견 신청 내용 따위는 쓰지 않았다. ‘위로 말씀을 전하며 기회 있으면 한번 만나주시길 바랍니다’는 말로 끝맺었다”고 말했다. 박근혜도 현몽설을 부인했다. 어쨌건 박근혜는 1975년 3월6일 최태민을 청와대로 불러 대화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최태민은 외부 활동을 적극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근혜를 만난 뒤, 최태민은 목사 안수를 받는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목사 직을) ‘돈 주고 샀다’는 것이 교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나 이 사실이 확인된 적은 없다. 분명한 한가지는, 목사 안수는 받았지만 신학대학이나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적은 없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태민’이라는 ‘마지막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즈음이다.
최태민 목사는 ‘대한구국선교단’을 발족하고 스스로 총재에 취임한다. 5월 임진강에서 연 ‘구국기도회’에는 2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박근혜도 참석했다. 최태민의 즉석 제안으로 박근혜는 명예총재로 추대됐다. 이후 박근혜는 구국선교단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1976년 구국선교단은 ‘구국봉사단’으로, 2년 뒤인 1978년엔 다시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꾼다. 바로 박근혜의 퍼스트레이디 경력의 핵심인 새마음운동의 본산이다.
최태민에 대한 ‘수사자료’엔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 고문격인 최태민이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 정계, 경제계, 언론계 등 각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봉사단 관계자는 “한마디로 미니 청와대였다”고도 했다. 최태민 주위에선 각종 이권 개입과 횡령, 사기 및 융자 알선 등 권력형 비리, 그리고 온갖 여성과의 스캔들 의혹이 들끓었다.
소문은 박정희 전 대통령 귀에도 들어갔다. 민정비서실과 중앙정보부 보고를 잇따라 받은 박정희는 1977년 9월 직접 최태민을 심문했다. 이른바 ‘친국’(임금이 직접 죄인을 심문함)이다. 대통령 서재에서 진행한 친국엔 중정의 김재규 부장과 백광현 국장이 동석했다. 박근혜도 참석해 “그런 일 없다”며 최태민을 옹호했다는 설도 있다. 박정희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검찰에 넘긴 뒤 검찰 판단에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태민은 새마음봉사단의 명예총재(총재는 박근혜)를 맡는 등 10·26 때까지 박근혜의 옆을 지켰다.
‘박정희 친국’ 뒤에도 살아남아
전두환 시절도 육영재단 등 활동
박 “어머니 돌아가신뒤 힘들었을 때
바로설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
■ 10·26 뒤 합수부 조사받고도 박근혜 곁에
10·26 뒤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최태민을 언급한다. “본인이 결행한 10·26 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총재 최태민, 명예총재 박근혜양으로 되어 있는 구국여성봉사단 문제이며, 본인은 최 목사의 부정행위를 상세히 조사해 박대통령에게 보고했지만 박대통령은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을 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최태민 목사를 명예총재로 올려놓았다.”
최태민은 합수부가 진행하는 수사를 받는다. 전두환의 지시로 수사를 맡았던 당시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신동아>(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최태민을) 강원도로 보내 활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하게 자숙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강원도에 그리 오래 두지는 않았다. 구체적 비리 혐의는 기억나는 것이 없고, 그가 기업체로부터 돈을 뜯어낸 것으로 확인된 게 얼마나 되는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박근혜의 연루 의혹은 없었다.”고 말했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강제해산 당한다.
박근혜는 육영재단과 영남대 등을 통해 사회활동을 이어간다. 최태민도 다시 등장한다. 박근혜는 19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3년 뒤 1986년부터 육영재단의 어린이회관에선 최태민의 전횡이 입길에 올랐다. <여성중앙> 1987년 10월호를 보면, 최태민에게 우선 보고를 해야 이사장(박근혜) 결재를 받을 수 있었으며, 최태민의 5번째 딸 최순실도 회관 운영에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무렵 재단 잡지사 기자들의 파업과 직원들의 농성도, 모두 ‘외부 세력’이라고 표현된 최태민·최순실 부녀의 간섭이 원인이 됐다. 분란은 1990년 11월15일 박근혜가 동생 근령에게 이사장직을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물러나는 박근혜는 “내가 누구에게 조종받는다는 것은 내 인격에 대한 모독”이라며 최태민의 전횡 의혹을 일축했다.
최태민은 이후 서울 역삼동 자택에 칩거한 것으로 전해지며, 1994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노환으로 세상 떴으나
5번째 딸의 남편 정윤희씨
박 ‘미래연합’ 창당때 비서실장
최태민, 사후에도 여전히 ‘그림자’
■ 대이은 ‘충성’
최태민 사후에도 그의 그림자는 박근혜 곁에 남았다.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가 박근혜의 정계 입문 때부터 등장했다. 그는 ‘비서실장’으로 불렸다. 2002년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을 때도 자리를 지켰다. 박근혜가 한나라당 대표가 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곁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 2004년 6월~2006년 5월에는 국회 입법보조원으로 등록했다. 박근혜의 정치 입문 초기에 정윤회와 여러 차례 직접 만났던 한 전직 기자는 “최순실은 박근혜가 장충동에 살던 시절부터 말동무로 지낸온 것으로 들었다”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박근혜 의원실의 보좌진을 구성한 것도 정윤회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박근혜는 2007년 후보 검증 청문회에서 정윤회의 등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1998년 보궐선거에서) 대구 달성구에 국회의원으로 처음 나왔을 때다. 개인적으로 캠프를 차려 선거를 치르려니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상대 후보가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실세의 기세가 등등했고 위협적인 상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윤회씨가 돕겠다 해서 순수하게 도운 것이다. 그게 인연이 돼 국회의원 됐을 때 입법보조원으로…, 이후 당 대표 때 그만뒀다.”
2007년 7월 이명박 캠프에선 ‘박근혜의 국회 보좌진이 최태민과 친인척 관계다’, ‘박근혜 캠프의 홍윤식 전문가네트워크 위원장과 정윤회가 밀접한 관계다’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전자에 대해선 해당 보좌진이 즉각 부인했고, 후자에 대해선 홍윤식이 최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지금까지 정윤회를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른다”고 말했다.
박근혜는 최태민에 대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말한다. 각종 의혹에 대해선 “의혹은 많이 제기됐지만 실체가 없었다. 한가지라도 사실이었다면 내가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겠나”라며 일축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다시 대통령에 도전하는 오늘도 정윤회의 이름은 여의도를 떠돈다. 친박 내부에선 친박끼리 “내가 모르는 보고서가 올라간다”며,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반대파는 박근혜나 친박의 결정이 이상하다 싶어서 또 정윤회 라인을 의심한다. <한겨레>는 각종 의혹에 대한 해명을 듣고자 6월부터 다양한 경로로 정윤회와의 접촉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7년 경선 시기부터 많은 기자들이 그를 만나고자 했지만 성공한 바 없다. 김외현 기자 oscar@hani.co.kr
▷ 2012 대선주자 탐구 기획연재 보기
■ 최태민 수사 자료?
1980년 전두환 지시로 수사…2007년 한나라 경선서 흘러나와
최태민 1990년 유일한 인터뷰 “이름 7개씩이나? 터무니 없다”
최태민(사진)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육영재단 분규 때다. 당시 기사를 보면, 최태민의 나이가 69살, 71살, 78살로 들쭉날쭉이다. 그때까지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방증이다. <월간중앙>(1993년 11월호)은 ‘박근혜-최태민, 20년 커넥션’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김재규가 항소이유보충서에서 10·26 사태의 한 동기로 최태민·박근혜씨의 관계를 거론하고, 그의 비행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이 ‘정리’를 권유하자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특별조사를 지시했다. 지금까지 그의 신상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대부분 당시 수사 결과에 근거한 것”이라며 최태민의 전력과 박근혜와의 관계를 다뤘다. 이 ‘수사자료’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다가, 2007년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물위로 떠오른다. <신동아>는 2007년 6월 “중앙정보부가 작성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최태민 관련 수사보고서인 ‘최태민 관련 자료’를 최근 입수했다”며 그 내용을 상세히 전했다. 같은달 27일에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경선 후보였던 이해찬의 누리집 게시판에 ‘안기부’라는 이용자가 신동아 자료와 같은 제목의 피디에프(PDF) 파일을 올려놓았다.
최태민의 유일한 인터뷰인 <가정조선> 1990년 10월호에서, 그는 수사자료에 대해 “1977년에 작성된 수사기록이다. 수사 결과 내가 기소된 뒤 기소중지되거나 불기소 등으로 처리됐던 게 아니라 아예 그냥 없었던 일로 처리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6번의 결혼, 7개의 이름’에 대해서도 그는, “이름이 7개씩이나 된다는 것은 터무니 없다”며, 해방 뒤 38선 이남으로 오면서 호적 정리가 되지 않아 이름과 결혼 기록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최태민 쪽은 1977년 9월 본인이 위출혈로 병원에 입원중일 때 사실상 병실에 감금된 상태에서 수사가 진행돼, 기록도 강압에 의해 작성됐다고 주장했다. 김외현 기자
추천 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