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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룡은 당활동가, 애국자로 영생의 삶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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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0-11 12:5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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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룡은 당활동가, 애국자로 영생의 삶의 살았다. 

 

편집국

 

우리민족끼리 사이트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71돌을 맞이하여 김삼룡의 부인 이옥숙의 글을 소개하였다.

 

김삼룡은 남로당 지하총책을 맡았으며 남녘뿐만 아니라 북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김삼룡은 코리아전쟁때 감옥에서 사형을 당하였지만 이옥숙은 월북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옥숙 글에 따르면 김삼룡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을 지냈으며 공화국영웅, 조국통일상을 받았다. 

 

김삼룡은 1948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련합전원회의에 참가해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났다.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의 중임을 받고 남녘에서 당 재건 및 확장을 위해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50년 6월 26일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처형당하기 직전 남긴 말이다. 

 

첫째는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전사된 기쁨이고 둘째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받으며 혁명사업을 해온 기쁨이며 셋째는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속에 살아온 기쁨이다.

 

이옥숙은 글에서 마지막으로 후대들에게 꼭 하고싶은 당부를 하였다. 

 

- 조선로동당은 우리 운명의 영원한 삶의 보호자이다.

- 당과 끝까지 생사운명을 함께 하라.

- 당앞에 다진 맹세를 끝까지 지키라.

 

전문을 소개한다. 

 


태양의 품에서 당활동가, 통일애국렬사로 영생하고있습니다

- 리옥숙 -

 

 

세월은 류수와 같이 흘러 제 나이 어느덧 100살을 넘어섰습니다.

 

가렬처절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몸소 우리 가족을 구원해주시고 렬사가족이라고 온갖 은정을 베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따뜻한 보살피심속에 이렇게 100살장수자가 되고보니 지나온 나날들이 어제일처럼 떠오릅니다.

 

10월의 하늘가에 창공높이 휘날리는 당기발을 바라볼 때면 식민지남조선에서 갈길 몰라 헤매이던 저의 남편(김삼룡)을 사랑의 한품에 안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내세워주시고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태양의 모습이 안겨와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의 남편을 뜨겁게 추억하시면서 김삼룡은 강의한 신념과 능숙한 조직력을 가진 당활동가였으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생을 바친 애국자였다는 최상의 믿음도 안겨주시고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공화국영웅, 조국통일상수상자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숭고한 동지애의 세계에 떠받들려 남편은 당활동가, 통일애국렬사로 오늘도 영생하고있습니다.

 

1

 

혁명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옳바른 령도자를 모시는것은 복중의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찌기 어느 한 문인은 혁명이 력사의 기관차라면 당은 혁명의 기관차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도 옳바른 령수를 모실 때만이 기관차로서의 사명을 수행할수 있습니다.

 

충청북도 충주군 염장면 룡산리(당시)에서 태여난 남편은 학창시절부터 맑스주의서적들을 탐독하면서 사회주의사상에 공감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6. 10만세 반일시위투쟁때는 동맹휴학에 참가하였고 졸업후에는 반일운동에 나섰다가 류치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류치장에서 풀려나온 후 옳바른 투쟁방략을 알고싶어 제노라하며 공산주의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만나보았지만 국제당의 승인을 받아 당을 재건한 후 큰 나라의 힘을 빌어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뿐이였습니다.

 

로씨야에서 사회주의10월혁명이 승리한 후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공산당들이 출현하면서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건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당의 지도성원들은 인민대중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을 교양하고 묶어세워 혁명투쟁에 불러일으킬 생각은 하지 않고 《상해파》, 《화요파》, 《서울파》, 《엠엘파》, 《서상파》 등 형형색색의 파벌을 형성하고 령도권쟁탈을 위한 파벌싸움으로 허송세월을 보냈습니다. 결국 혁명의 전위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일제의 야수적인 탄압에 의해 3년후인 1928년 끝내 해산되고말았습니다.

 

당이란 사상과 리념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뭉친 사람들의 정치적조직체인데 대중적지반을 마련하지 못한 당이 어찌 존재할수 있었겠습니까.

 

(진정 나를 이끌어줄 지도자는 없단 말인가?)

 

고민과 번뇌속에 날과 달을 보내던 남편에게 마침내 인생을 빛내여줄 태양의 해발이 비쳐들었습니다.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시고 새형의 혁명적당조직을 내올수 있는 초석을 쌓으신데 토대하여 주체19(1930)년 7월 3일 첫 당조직-건설동지사를 결성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무장투쟁을 조직전개해나가시는 한편 두만강연안의 북부조선일대와 만주의 여러 지역에 당조직들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힘있게 밀고나가시였습니다.

 

한몸의 위험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온성에까지 나오시여 국내 첫 당조직을 결성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25(1936)년 5월 5일 전민족을 하나의 강력한 정치적력량으로 묶어세워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뒤집어엎고 조국해방을 이룩하기 위한 첫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체인 조국광복회를 창건하시고 김정숙녀사를 비롯한 항일혁명투사들을 국내에로 파견하시였습니다.

 

능숙한 지하공작으로 국내당조직들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정력적으로 이끌어가시던 김정숙녀사께서는 그때 조직을 확대강화하기 위해 주병포, 리인모동지들을 서울로 보내시였습니다.

 

그들로부터 위대한 수령님의 당창건방침과 조국광복회창립선언을 받아안은 남편은 《김일성장군님, 장군님은 도탄속에 신음하는 우리 겨레를 구원해주실 민족의 태양이십니다.》라고 격정을 터치였습니다.

 

그날부터 저의 남편은 서울지역에 지하당조직을 내오고 각계각층을 반일민족통일전선아래 묶어세우기 위한 투쟁을 힘있게 벌렸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함께 지하당을 조직하고 그들과 함께 군중속에 들어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해설해주었습니다. 마침내 서울에 좌익로조가 결성되였으며 산하 조직들이 태여나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태창직물공장 로동자들의 총파업과 각 로조들의 파업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로동자들의 파업을 지휘하면서 그는 김일성장군님의 로선은 곧 진리이며 승리라는것을 뼈에 사무치게 절감하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서울콩그룹(서울 공산주의그루빠)을 확대해나가던 남편은 일제특무들의 감시에 걸려 그만 체포되였습니다.

 

감방에서 박달동지로부터 백두산청년장군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와 항일투사들의 투철한 혁명정신에 대해 전해들은 남편은 끝까지 혁명가의 지조를 지킬 결심을 더욱 굳히였으며 옥중에서 비밀조직을 뭇고 그들을 전민항쟁에로 불러일으켰습니다.

 

그에 대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삼룡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징역살이를 할 때 옥중에서 공산주의자써클을 조직하고 일제의 전향강요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리였다고, 그 조직에 망라되였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내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우리의 령도를 받아들였고 나중에는 전민항쟁에 합세하였다고 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안아오신 조국해방과 함께 남편은 마침내 감옥에서 풀려나오게 되였습니다.

 

그날 저는 남편과 함께 서울서대문형무소가 떠나갈듯 《김일성장군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진정 우리 수령님은 갈길 몰라 헤매이던 저의 남편에게 삶의 광명을 안겨주시고 당활동가의 첫 걸음을 떼여주신 위대한스승, 삶의 은인이시였습니다.

 

2

 

해방후 남조선정국은 참으로 복잡다단하였습니다.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는 7개 도, 12개 시, 131개 군에 조직되였던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군정통치를 실시하였습니다.

 

게다가 해방과 함께 서울로 모여온 어중이떠중이들이 저마다 《혁명가》, 《지도자》로 자처하면서 세력권쟁탈에 피눈이 되여 돌아쳤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 저의 남편은 조직선을 통해 위대한 수령님께서 주제34(1945)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을 창건하시였다는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습니다.

 

그날 남편은 민족분렬의 위기를 구원해주실분은 오직 김일성장군님 한분뿐이라고 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 삼가 편지를 올리였습니다.

 

남편의 편지를 받아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는 감옥에서도 굴하지 않고 견결히 싸운 사람이라고 하시며 친서까지 보내주시였습니다.

 

우리는 그때 서울시내에 있으면서도 비밀상관계로 떨어져 살았는데 하루는 그가 불쑥 저를 찾아와 《여보, 내 오늘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친서를 이 두손으로 받았소. 그분의 영상이 이 눈앞에 안겨오고 그분의 말씀이 귀전에 막 들려오는것만 같소!》라고 말하는것이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흥분한 남편을 처음 보았습니다.

 

위대한 수령님의 친서를 받아안은 남편은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는 한편 남조선의 지역당을 합당하기 위한 사업으로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뛰여다녔습니다.

 

그러던 주체37(1948)년 8월 어느날 대낮에 그가 저의 하숙집에 나타났습니다.

 

의아해하는 저에게 남편은 《여보, 내 이번엔 김일성장군님을 직접 만나뵈왔소. 평양에서 말이요.》 하면서 눈굽을 적시는것이 아니겠습니다.

 

사연인즉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련합전원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왔던것입니다.

 

회의에서 탁월한 선견지명으로 조국통일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편에게 새로 조직된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의 중임을 맡겨주시였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남편은 위대한 수령님께 다진 맹세대로 위험에 처한 당조직을 수습해나가는 한편 지리산, 태백산일대에서 어려운 난관을 겪고있던 유격대를 지원해주기 위한 사업을 전개해나갔습니다.

 

그러던 주체39(1950)년 3월 그는 그만 적들에게 체포되게 되였습니다.

 

남편이 체포되였다는 소식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침식도 잊다싶이 하시며 성명을 통해 합법적으로 김삼룡을 구원하기 위한 긴급대책을 세워주시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상(당시)의 성명이 발표되고 이어 여러 정당, 사회단체들의 성명서와 개별적인사들의 담화가 신문과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였습니다.

 

감방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남편은 북녘하늘을 우러러 《장군님,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습니다.

 

하기에 그는 법정에서 《만일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김일성장군님께서 주신 과업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한것이다. 때문에 나의 죄를 따질분은 오직 우리의 수령이신 김일성장군님뿐이시다.》라고 추상같이 웨쳤습니다.

 

최후의 시각을 앞둔 시각 남편은 동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크게 세가지 일을 기쁘게 생각한다.

 

첫째는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전사된 기쁨이고 둘째는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를 받으며 혁명사업을 해온 기쁨이며 셋째는 수령님의 믿음과 사랑속에 살아온 기쁨이다.

 

나는 최후를 앞두고 크게 세가지 일이 마음에 걸린다.

 

첫째로 통일의 광장에서 위대한 수령님께 감사의 큰절을 올리려 하였는데 이를 실현하지 못한것이다. 둘째는 위대한수령님을 내 인생을 다할 때까지 높이 받들어모시려 하였는데 너무도 일찍 가는것이며 셋째는 이날 이때까지 수령님의 신임과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고 걱정만을 끼쳐드린것이다.》

 

남편의 신념을 더는 꺾을수 없다고 생각한 적들은 1950년 6월 26일 새벽 그가 더는 말할수 없게 총탁으로 턱을 내리친 다음 소나무에 결박해놓고 학살했습니다.

 

남편의 최후를 보고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것이 확실한가고 거듭거듭 알아보신 후 해방된 서울에서 그 동무를 만나보려고 하였는데… 하고 더 말을 잇지 못하시고 손수건을 눈가에 가져가시였다고 합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가 일군들에게 김삼룡의 시신을 꼭 찾아내여 장례를 잘해주자고 간곡하게 당부하시였습니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이 오고가던 전쟁의 불길속에서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한 어려운 전투가 벌어졌으며 주체39(1950)년 8월에는 해방된 서울에서 장례식이 엄숙히 거행되였습니다. 그날 저는 수령님의 그 은정에 눈물이 앞을 가리워 남편의 마지막모습조차 제대로 볼수가 없었습니다.

 

그를 늘 마음속에 안고계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의 높은 연단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당 및국가활동가인 김책동지, 강건동지, 허헌동지, 김삼룡동지를 비롯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아끼지 않은 당원들과 애국자들을 잃었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생애의 마지막시기에 집필하신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삼룡은 강의한 신념과 능숙한 조직력을 가진 당활동가였으며 나라와 민족과 공산주의위업을 위해 한생을 바친 애국자였습니다.》라고 남편의 공적을 다시금 높이 평가해주시였습니다.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남편은 당활동가, 애국자로 영생의 삶을 지닐수 있었습니다.

 

3

 

조국과 민족을 위한 공적도 대를 이어 내세워주는 품이 있어야 영원히 빛날수 있는 법입니다.

 

최근 남조선의 한 언론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은 1990년 김삼룡을 남조선혁명가 반렬에 올리고, 조국통일상, 공화국영웅칭호 등을 수여했다.》라고 소개했습니다.

 

저의 남편을 리현상, 성시백, 박정호와 같은 남조선혁명가들의 전렬에 내세워주시고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해주신 우리 장군님이십니다.

 

저는 지금도 주체79(1990)년 2월 9일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이날은 남편의 생일 80돐이 되는 날이였습니다. 그날 우리 가족은 뜻밖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 저의 남편에게 보내주신 생일상을 받아안게 되였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저는 생전도 아닌 사후에 생일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사진을 부여안고 《여보, 장군님께서 당신의 생일을 맞으며 친히 생일상을 보내주셨어요, 당신은 가지 않았어요.》라고 흐느끼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로부터 얼마후 조국해방 45돐을 맞으며 조국통일상이 제정되였을 때에도 남편에게 조국통일상을 안겨주시였으며 저와 자식들을 어버이수령님앞에 내세워주시였습니다.

 

주체82(1993)년 1월 21일이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저는 세딸과 함께 그이께서 계시는 금수산의사당(당시)으로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헤여졌던 딸자식을 오래간만에 만난듯 우리들이 삼가 올리는 인사를 다정히 받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먼저 사진부터 찍자고 하시며 처음에는 저와 세딸을 동시에, 다음은 따로따로 자신의 곁에 세우시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으시였습니다.

 

저의 건강상태에 대하여 알아보신 후 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고 하나하나 물으시고나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들을 식탁으로 이끄시였습니다. 수령님께서는 저에게 언감자국수는 처음일것이라고, 모두 많이 들어야 자신의 마음도 기쁘다고 하시며 친어버이의 사랑을 부어주시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남조선혁명가유가족들을 만나니 정말 기쁘다고, 자신께서는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싸우다 우리곁을 떠나간 남조선혁명가들을 영원히 잊을수 없다고 하시였습니다.

 

그 순간 저의 눈가에는 남편을 잃고 흘러온 나날들이 어제일처럼 떠올랐습니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적들에게 남편을 잃은 우리 가정을 구원해주신분은 우리 수령님이시였습니다. 김삼룡의 가족을 찾기 위한 대책을 친히 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해주도록 하시고 옷과 생활필수품, 거액의 돈까지 마련해 보내주시였습니다. 그리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승용차까지 보내 저희들을 데려오시여 최고사령부가까이에서살게 해주시였습니다.

 

정전후 일부 편협한 사람들이 저의 남편에 대해 좋지 못한 소리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수령님께서는 김삼룡은 자신께서 완전히 파악이 있는 사람이라고, 김삼룡은 우리 당에서 믿고 아끼던 사람이라고 하시며 몸소 그를 보증해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사랑 그대로 우리 가족에게 온갖 육친의 정을 다 베풀어주시였습니다.

 

자식들이 아버지의 생전의 념원을 꽃피우라고 나라의 중요 초소에도 세워주시고 제가 생일 70돐을 맞을 때에는 친히 생일상까지 보내주시였습니다.

 

하기에 저는 나날이 더해만가는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사랑에 보답할 일념으로 그날 수령님앞에서 다음과 같은 즉흥시를 읊어드렸습니다.

 

의사당 넓은 방에 피여난 꽂

계절은 정월이라 봄꽃은 아니로니

수령님, 장군님 그 사랑 피워낸

우리 가정 충정화로소이다

 

가는 앞길 눈바람 없으랴만

밝은 해 내내 이몸 덥히려니

역경 순경 가림없이 언제나

충정화 붉게 피워가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80나이에 거의 이른 리옥숙동무가 좋은 시를 읊었다고 먼저 박수를 쳐주시며 김정일동지를 잘 받들라고, 그길에 동무들의 행복도 있고 미래도 있다고 간곡히 교시하시였습니다.

 

혁명선배들에 대한 우리 장군님의 고결한 의리는 진정 하늘도 깊이 머리숙이게 했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조국해방전쟁승리 40돐이 되던 해에는 저의 남편에게 공화국영웅칭호를 안겨주시고 선군령도의 길을 이어가시던 그 바쁘신 속에서도 애국렬사릉을 찾으시여 남편의 돌사진앞에서 오래동안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시였습니다.

 

하나를 주시면 열백을 더 주고싶으시여 늘 마음쓰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저에게 수령님의 존함을 모신 시계표창과 높은 국가수훈을 안겨주시였으며 당창건 60돐 경축대표로 불러주시였습니다.

 

우리 장군님께서 90나이에 이른 저를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창건 60돐 경축대표로 불러주신 그 숭고한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저의 남편의 공적을 우리 당력사와 더불어 길이 빛내여주시고 그의 뒤를 이어 저희가정이 대를 이어 당에 충정다하기를 바래서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편과 저의 가정에 돌려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사랑이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에 의하여 오늘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있습니다.

 

렬사가족들의 생활을 구석구석에 이르까지 친어버이심정으로 보살펴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께서는 지난 5월 17일 생일 100돐을 맞는 저에게 친히 생일상을 보내주시였습니다.

 

저는 우리 원수님께서 보내주신 생일상을 남편인 김삼룡과 함께 받는 심정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마음까지합쳐《경애하는 원수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삼가 인사를 올렸습니다.

 

태양이 있어 만물이 소생하듯이 대대로 이어지는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동지애에 의해 오늘도 남편은 능숙한 당활동가, 통일애국렬사로 영생하고있으며 당의 은정속에서 저도 100살장수자가 되였습니다.

 

한세기를 헤아리는 지나온 생을 돌이켜보면서 제가 찾게 되는 철리, 그것은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만 인간의 참된 삶이 빛날수 있으며 영광스러운 조선로동당이 있기에 우리의 앞길에는 오직 승리와 영광만이 있다는것입니다.

 

저는 인생에 더 바랄것이 없는 몸입니다. 다만 글을 마치면서 후대들에게 꼭 하고싶은 당부를 남편이 늘 외우던 말로 대신하고저 합니다.

 

- 조선로동당은 우리 운명의 영원한 삶의 보호자이다.

- 당과 끝까지 생사운명을 함께 하라.

- 당앞에 다진 맹세를 끝까지 지키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0-11 12:51:32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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