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재능을 꽃피운 월북삽화화가 정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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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07-04 14:32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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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재능을 꽃피운 월북삽화화가 정현웅
박수영 기자
2015-07-04
<우리민족끼리>는 우리 나라 출판화 미술 분야의 재능있는 화가들 중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사람으로서 유럽의 이름난 삽화화가들을 능가하는 재능있는 삽화화가이며 수채화, 유화에도 능숙한 미술가 정현웅의 삶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정현웅은 1911년 3월 서울 종로구 궁정동의 소시민 가정에서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가 태어나서 성장하던 시기는 일제에게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비운의 시기였다. 일제는 독점적이며 무단적인 식민지통치 체제를 세우고 중세기적 공포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침략자들 자신도 “…오늘의 조선은 마치 유럽중세기의 암흑상태나 다를 바 없다.”고 실토하였었다.
정현웅은 1920년대에 서울 청운공립보통학교와 경성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미술에 소질이 있던 그는 유화 <옛성>(1927년)을 그려낸 후부터는 미술전문 교육을 받을 생각을 하였다. 하여 그는 몇 점의 수채화를 판 돈을 가지고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미술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던 정현웅은 반 년만에 중퇴하고 집에 돌아와 주문받은 간판들과 광고를 그려주거나 극단의 무대장치도 그려주면서 하루살이 식으로 살아갔다.
그러다가 1935년에 동아일보사 광고부에 취직하여 광고그림을 그린 것이 계기로 되여 출판미술을 전문하게 되었다. 일장기말소사건(1936년)으로 <동아일보>가 무기정지처분을 받게 되자 조선일보사로 옮겨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들의 삽화를 계속 그렸다. 8. 15후 서울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잡지 <신천지> 편집부장으로 있을 때 진보적인 사상에 접근하게 되면서 그의 사회정치적 안목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미국과 이승만독재정권의 반인민적 통치와 파쑈탄압만행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정현웅은 6.25전쟁시기 서울이 해방되어 남녘미술가동맹이 조직될 때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일시적인 전략적 후퇴 시기 북으로 들어와 미술제작소 회화부장을 하면서 역사적인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 회의장 장식을 맡아한 그는 수채화 <미제의 인민학살>(1952년), 목판화 <고지점령>을 창작하였다.
정현웅은 민족문화유산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으로서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할 고구려무덤 벽화모사를 1952-1963년까지 10여년간 진행하였다. 현재 조선미술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의 무덤벽화들은 정현웅과 손영기가 모사한 것들이다. 2004년 <남북공동자료전시회>에 참가했던 남녘의 학술성원들과 기자들은 조선미술박물관 무덤벽화실을 돌아보면서 모두 감탄하였다. 서울국립미술박물관 관장은 벽화모사 수준이 높은데 대하여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정현웅은 1957년부터 1975년까지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출판화분과 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형상성이 높은 미술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그가 그린 수채화 <한홉의 미시가루>(1962년), <누구 키가 더 큰가>(1963년), 연필화 <갑오농민군의 고부해방>(1955년), <미제의 남연군묘도굴>(1957년), 삽화 <토끼전>(1955년), 동화그림책 <청개구리에 대한 이야기>(1959년) 등은 당시 인민들 속에서 좋은 반영을 불러일으켰다.
수채화 <누구 키가 더 큰가>는 우리 나라 어린이들의 행복한 모습, 동심세계를 생동하고 해학적으로 그려냈다. 착상이 기발하고 구성이 간결하며 부드럽고 친근한 묘사는 어린아이들의 생활을 그렸으나 어른들도 너무 신통하고 재미있어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이 작품은 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1등상을 받았다. 지금도 조선미술박물관 현대미술작품 진열실에 전시되어 있는 이 작품은 참관자들의 감명을 자아내고 있다.
정현웅은 또한 유화 <전주성입성>(1961년)과 같은 실재하였던 역사적 시기를 그대로 방불케 하는 역사화들도 창작하였다. 1960년대 조선화를 집중적으로 습득한 정현웅은 조선화 <천리길을 걸으시여 만경대고향집에 오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비밀혁명소조모임을 지도하시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1972년)와 같은 김주석의 혁명활동역사를 생동한 화폭으로 펼쳐보임으로써 인민들과 청년학생들의 교양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처럼 화가 정현웅은 해방전 시기에는 먹고 살기 위해 일제의 어용신문사에서 부르죠아연애소설이나 복고적인 고리타분한 내용의 삽화를 그리던 품팔이화가로부터 북으로 간 그때부터 생의 마지막날까지 인민의 사랑을 받는 미술가로 삶의 보람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의 화법상 특징은 묘사대상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리며 작품마다 고전미와 민족적 색채가 짙게 안겨오도록 형상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묘사기법이 잘 구현될 수 있는 주제분야인 역사화와 아동화를 많이 그렸다. 특히 북의 사회주의제도 하에서 무럭무럭 커가는 귀여운 어린이들의 밝고 깨끗한 심리세계를 치밀한 화면구성과 간결한 색채표현으로 훌륭히 형상한 수채화 <누구 키가 더 큰가>, 교훈적인 이야기를 의인화된 형상으로 생동하게 그려낸 동화그림책 <청개구리에 대한 이야기> 등 아동화들은 우리 나라 아동화의 발전 수준을 대표하는 성과작들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삽화, 수채화, 판화, 선전화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작품들과 유화, 조선화, 벽화모사와 같은 다른 종류의 회화작품들도 능숙하게 그려냈다. 또한 이름있는 출판화 화가들인 백학훈, 박진수와 같은 제자들을 많이 키워내는 등 그가 나라의 미술발전과 민족미술유산을 보존정리하는 사업에 기여한 공로는 크다. 그의 아내인 남궁련은 이름난 영화배우로서 모두의 기억에 인상깊게 남아 있다.

▲수채화 <누구 키가 더 큰가> (1963년)

▲수채화 <실뜨기> (1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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