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연재16]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 3. 도이하라의 현대판《요시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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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9-08-13 10:4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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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6]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 3. 도이하라의 현대판《요시와라》
편집국
몇해 전에 창작된 전인광 북녘 작가의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이 지금 북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소설은 타이의 어느 한 산간벽촌에서 일어난 두 명의 일본인들에 대한 살해사건을 파해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첫 서두에 이렇게 씌여져 있다.
《나는 죽더라도 증명할것입니다. 력사가 증명하고 내가 증명합니다. 이 력사를 지워버려서는 안됩니다.》 - 한 조선녀성의 증언중에서 -
<조선의 오늘>사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4. 15문학창작단의 작가들을 비롯하여 나라의 관록있는 작가들이 《하나의 조일관계력사론문》, 《바늘끝도 안들어가게 구성이 째인 작품》, 《이렇게도 쓸수 있겠구나 하는 창작적묘리를 깨우쳐준 소설》이라고 평가하는 장편소설 《네덩이의 얼음》은 작가의 피타는 사색과 탐구, 불같은 열정과 높은 창작적기량에 의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라고 밝혔다.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네덩이의 얼음>을 연재한다.
(제 16 회)
제 3 장
3. 도이하라의 현대판《요시와라》
사다께는 계속하여 썼다.
《이 성노예문제와 관련하여 이번에 도꾜민간법정이 열리고 히로히또<천황>을 비롯하여 도죠와 오까무라, 미나미 등 전범자 8명을 성노예범죄피고인으로 기소하여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나는 기소측이 이 성노예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을 놓쳤다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는 1946년 도꾜극동전범재판에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전범자로 처형되였지만 이번 재판에선 구체적인 기소자료와 물증이 없는 관계로 성노예전범기소자명단에는 넣지 못한 도이하라 겐지라는 인물입니다.
자료를 보면 만주사변후 우심해지는 일본군인들의 중국녀자들에 대한 강간행위에 대해 중국인들의 항거가 높아지고 집단적으로 습격해오는 등 반항이 격렬해져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해졌다고 합니다.
이때 당시 봉천(심양)특무기관장으로 있던 도이하라가 관동군참모이던 이다가끼에게 <그게 무슨 큰 문제인가. 간단히 해결할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다가끼가 어떤 방법인가고 물었습니다.
이에 도이하라는 <씨비리출병때처럼 부대주둔지마다 위안소를 내오고 위안시설을 따로 마련하면 될게 아닌가.>고 했습니다.
이다가끼는 머리를 저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네. 그때는 일본군대가 싸할린전역에 40만이 출병했고 1만 위안부가 동원됐거던. 하지만 오늘 제국군대수는 500만이 넘거던. 그 많은 군대를 담당할 위안부가 수십만이 돼야겠는데 그걸 어떻게 민간업자들이 충당한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일이네. 우리 일본녀자들을 대거 끌어올수도 없고 점령지역 녀자들을 끌어오면 작전지대 주민들의 반항이 거세지고… 문제이거던.>
잠시 뭔가 생각하던 도이하라가 눈을 번뜩이며 <이다가끼참모, 조선이 있지 않는가.>하고 말했습니다.
<조선이라니?>
<조선에 무진장한 처녀들이 있는데 그들을 끌어온다고 그 누가 반대하고 항의하고 해볼것 있는가? 정부와 군부의 지령을 통해 조직적으로, 말하자면 거 왜 있지? 에도막부때의 요시와라식으로 해버리면 몇십만의 녀자들을 동원할수 있거던.> 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다가끼가 <요시와라식에 조선녀자들이라…>하다가 무릎을 쳤다고 합니다.
<그게 방법이요. 좋은 착안이요.>》
문서를 읽던 무라야마는 《요시와라식? …》하며 그 말뜻을 새겨보다가 《아! 그 막부의 요시와라!》하며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였다.
요시와라란 에도막부의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창설이후 만들었던 국가적인 유곽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일본에서 국가가 성을 관리하는 공창을 처음 내온것은 도요도미 히데요시였다.
임진왜란 3년전인 1589년 교또의 시바마라에 세운 이 유곽은 버드나무와 꽃이 풍성하게 운치를 돋구는 곳이여서 일명 《화류계》라는 말로 통했다.
이후부터 유곽지대를 《화류계》라고 한것은 바로 버드나무와 꽃의 거리라는 말로 시바마라를 지칭한것이였다.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막부정권을 세운 도꾸가와 이에야스는 《천황》이 있는 교또와 떨어진 에도(도꾜)로 수도를 이전하였다. 그리고 《천황》이 있는 교또를 압도할수 있는 도성과 시가지건설에 전국각지에서 목공, 석공, 온갖 일군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다나니 당시 에도의 남녀 성비률에 심한 불균형현상이 일어나 녀자가 30프로선으로 모자라게 됐던것이다.
이 불균형을 메우기 위해 전국의 각곳에서 매춘부들이 모여오고 공사장을 중심으로 숱한 사창가들이 생겨났다.
에도성전체가 사창굴로 전락할 정도로 밤마다 술취한 오입쟁이들의 소동으로 민가가 법석 끓어 잠을 잘수 없을 정도고 이에 사처에서 막부가 썩어 망할 징조라는 항소가 터져나왔다.
다급해난 도꾸가와가 그때 생각한것이 바로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만들었던 시바마라였다. 시바마라정도의 유곽이 아니라 전국의 매춘부들을 끌어다 바로 도꾜중심부에 대규모의 유곽지대를 조성하여 넘쳐나는 인부들의 배출욕구, 성적욕망을 관리하고 민가의 소동을 잠재우자는 안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미쯔고시백화점부근 도꾜 한복판에 갈대만 무성하던 습지대를 메우고 1만 5천평의 부지에 수천개의 방을 가진 거대한 쾌락의 도성이 건설되였다.
그안에 각곳에서 모여온 4천여명의 매춘부들을 모집해들였다.
그리고 국가의 관리하에 밤마다 돈을 들고 찾아오는 인부들에게 성의 세례를 안겨주어 에도성내의 소동을 잠재웠다.
밤마다 뿜어나는 뜨거운 열과 쾌락의 고성으로 요시와라는 터져나갈 지경이였다.
이후 근 300년간 요시와라는 정부의 특별보호와 든든한 경비속에 날로 번창해왔다.
막부는 이렇게 녀성을 생활녀성과 도락의 녀성으로 확연하게 두 계층으로 갈라 구별해놓고 도락의 도성을 번성시켜왔다.
사다께는 계속해서 이렇게 썼다.
《전장에서 사나워지고 미칠듯이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지 못해 날뛰는 일본병사들을 요시와라식으로 조선녀자들을 대대적으로 군대에 끌어들여 성봉사로 위안하자는 도이하라와 이다가끼의 발상은 곧 참모본부에 제출되였고 륙군성과 해군성의 절대적인 찬동을 받았습니다. 이 착안에 군부가 환성을 올린것은 무엇보다 조선녀자들이 국권도 그 어떤 인권도 주장할수 없는, 그래서 얼마든지 끌어다 유린하고 죽이고 해도 그 어떤 항소도 받을 념려가 없는 식민지녀자들이라는것이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천황>의 결재를 받아 1932년 3월 상해파견군 참모장 오까무라의 지령으로 일본군이 9. 18사변으로부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기간에 처음으로 설치한것으로 알려진 상해륙해군위안소가 설치되게 되였던것입니다.
오늘 우리 정부가 이 문제의 정부와 군부개입을 극력 부정하고있지만 실제상 당시 군부와 관리의 강제동원없이 정조개념이 그처럼 강한 조선녀자들을 20만이나 위안부로 끌어간다는것은 도저히 불가능한것입니다. 그와 관련된 문서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정부와 군부가 눈을 부릅뜨고 철저히 은페하고있는것입니다.
일부 공개된 대표적문서만 보아도 1939년 3월 4일부로 륙군성 차관 이마무라 히로시와 병무국장 우메즈가 작성하여 <천황>의 결재인장을 찍어 하달한 <군위안소종업원모집에 관한 건>과 태평양전쟁직후인 1942년 3월 <천황>의 <칙령 300호>를 개정하여 위안소관계업무를 후생업무에 포함시키도록 한것을 들수 있습니다.
실상 위안부건은 당시 군의 최고통수권자였던 <천황> 히로히또를 떠나서 생각할수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잠간 그때 도이하라 겐지중장의 머리에 어떻게 이 요시와라식제안이 떠올랐겠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녀자로서 절대절명의 문제를 해결하며 성공해간 그의 행적을 류추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다께의 문서는 소설처럼 이야기를 번져갔다.
… 1923년 사꾸라꽃이 화창히 피여나는 도꾜의 어느 봄날이였다.
일요일이라 륙군성의 일개 대위로 근무하던 도이하라가 집에서 형들과 유럽정세를 토론하고있는데 황궁에서 심부름군이 찾아왔다.
《황태자님께서 겐지님을 곧 오시라는 기별입니다.》
겐지는 기다렸다는듯 선뜻 심부름군을 따라나섰다.
저택에는 황태자와 그의 시종만이 있었다.
겐지가 깍듯이 거수경례를 붙이자 황태자는 빙긋이 웃으며 《당신이 보내준 선물을 받았소.》하고 말하였다.
황태자의 의미있는 눈길은 앞에 있는 탁자우에 가있었다.
거기에는 여섯장의 녀인의 라체사진이 놓여있었다.
그것은 도이하라가 며칠전에 15살 난 자기 누이동생을 설득하여 찍은 사진이였다.
황태자는 만족해서 말했다.
《도이하라군, 당신의 누이동생은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녀성이요. 나는 이 녀자와 친하고싶소.》
깊은 사려가 없이 유흥의 감정에 들뜬것 같은 황태자의 말에 도이하라는 눈길을 들었다.
《황태자님, 저희 가문은 100대이상 내려오는 무사가문입니다.》
황태자는 자기 말에 얼굴을 찌프리며 격하게 반응하는 도이하라가 무엇을 말하는가를 느끼자 가볍게 웃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군. 나는 자네 녀동생을 나의 제2부인으로 하겠다는거요.》
주춤했던 도이하라는 한걸음 나섰다.
《그러나 제 누이동생은 이미 약혼한 사이입니다. 황태자님이…》하고 도이하라가 말을 시작하자 황태자는 그에는 아랑곳않고 《하늘의 아들이 이 녀자를 제2의 부인으로 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은가?》고 하였다.
《…》
순간에 도이하라는 머리가 핑 도는것 같았다. 그것은 이 모략을 추진하면서 도이하라가 그처럼 갈구하던 대답이였다.
《그래, 찬성하겠나?》
《핫.》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도이하라는 솟구치는 흥분을 겨우 눅잦히며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덧붙였다.
도이하라가 아직 세상물정 다 모르는 어린 누이동생을 온갖 패물과 보석으로 꼬여 벌거벗기고 유백색의 도자기처럼 미끈하고 탐스럽게 농익은 몸을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황태자에게 보냈다는것을 모르는 아버지와 형들은 딸과 누이동생이 황태자의 2부인으로 가게 된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감격해마지 않았다.
몇주일후 도이하라는 이번에는 황태자가 아니라 그의 제2부인을 만나기위해 궁전을 방문하였다.
《궁전생활이 어떠냐?》
도이하라는 누이동생에게 의미있게 물었다.
《아, 오빠!》 하고 소녀는 명랑하게 웨쳤다.
《저는 오빠에게 무엇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래, 너 행복하냐?》
《말할수 없이 행복해요. 황태자는 말 못할 정도로 저를 사랑해주고 선물도 산더미같이 주어요. 그분이 이곳에 오시면 나의 옆에서 떠나지 않아요.》
도이하라는 누이동생옆에 가까이 가서 귀속말로 말했다.
《황태자의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꼭 주의해야 한다. 이제 1년후 아이를 낳고 그때문에 너의 아름다움이 손상된다면 그는 여기저기 새로운 녀색을 찾기 시작할는지 알수 없으니까.》
누이동생은 까르르 웃었다.
《오빠, 괜한 걱정이예요. 내가 말하면 그이는 어떤 작은 소원이라도 다 들어줘요. 저는 여기 생활이 이렇게 좋은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오빠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도이하라는 잠시동안 누이동생의 마음을 판단하는듯 말이 없다가 그 녀자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심중하게 말했다.
《나를 위해서 해주어야 할 일이 있다.》
《오빠의 부탁이라면 그 무엇이든지…》
《황태자에게 내가 유럽의 여러 나라 말과 중국의 지방사투리까지 정확히 발음할수 있다는것을 말해줘라. 그리고 나를 중국의 책임적인 지위에 파견해준다면 <천황>페하를 위해서 큰일을 할수 있다고 말해주렴.
황태자는 정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다. 만일 그가 나의 재능을 리해해준다면 잘 주선해줄게다.》
누이동생은 웃었다.
《오빠의 소원이 그것뿐이예요?》
도이하라는 천진한 누이동생을 마주보며 소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로부터 2개월후 도이하라 겐지는 소좌로 승급하여 대본영에서 베이징에 륙군무관으로 파견되여가는 혼죠대장의 보좌관으로 임명되였다.
중국으로 가려던 야망을 이렇게 성취한 도이하라는 그후 심양 독군고문, 심양특무기관장이 되여 음모, 파괴, 암살 등 갖가지 악행을 가리지 않았으며 《만주국》을 조작하고 중국관내를 점령통치하는데 모든 수단을 다 하였다.
남들이 감히 생각할수 없는 거시적인 목표를 고안해내는 일종의 독특한 통찰력,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완강히 달성해내는 악심, 거기에 무자비한 랭혹성을 가진 도이하라가 특히 뛰여난 공적을 세운것은 《만주국》을 조작 하는데서 발휘한 능력이였다.
일본이 만주를 장악하는데서 장작림군벌이 최대의 장애로 되고있다는것을 간파한 도이하라는 1928년 6월 6일 베이징에서 심양으로 가는 도중에 렬차폭파사건을 조작하여 장작림을 포함한 그의 17명의 부하들까지 한꺼번에 하늘로 날려보냈다.
일본은 1931년 9월 대규모의 군사로 심양과 할빈을 점령하고 1932년 3월에 끝내 《만주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괴뢰국가를 만들어놓고보니 《독립국가》의 체제를 갖추기 위한 《주권자》가 필요했다.
그 적임자로는 아무리 찾아봐야 청조의 마지막황제-부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불행하며 연약하고 소심한 부의는 만주황제지위를 완고하게 거부하였다.
청조의 마지막운명을 지켜보았고 《만주국》황제가 일본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것을 너무도 잘 아는 부의는 그 운명이 어떻게 되리라는것을 예감하고있은것이였다. 하지만 부의를 대신할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말을 강제로 강가에 끌어갈수는 있어도 물은 강제로 먹일수 없다더니 만들어놓은 궁전으로 안들어가겠다고 뻗치는 저 부의를 어떻게 하면 그럴듯 하게 삶아내여 스스로 《황제》의 감투를 받아쓰도록 할것인가?
로심초사에 빠진 도이하라가 전전긍긍하고있던 어느날 그의 첩자가 도이하라를 돕고싶어 찾아왔다는 한 젊은 중국인을 데려왔다.
날씬한 몸매에 영채도는 눈빛의 중국인은 도이하라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있으며 어떤 고민을 하고있는지 자기는 다 알고있다고 말했다.
(어디서 이런 건방진 놈이?)
자기 정체를 알고있다고 말하는 그자체도 수상했지만 목소리가 거센 남자의 목소리처럼 들리는것이 의심스러웠다.
도이하라는 그자를 눈여겨 지켜보다가 눈깜빡할 사이에 짚고있던 군도를 뽑아 휘둘렀다. 쇠소리를 일구며 번개가 몇번 일자 그의 몸에 작은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웃옷이 연해 찢어져나갔다.
그자는 얼결에 손으로 가슴을 가리웠다.
《?!》
순간 도이하라는 너무나 뜻밖이여서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녀자인가?》하고 중얼거렸다.
얼굴이 까맣게 질렸던 그 녀자는 간신히 숨을 톺아쉬며 말했다.
《이렇게 된바엔 제 이름을 숨길 필요가 없지요. 나는 공주 가와지마 요시꼬입니다. 나의 아버지가 청조의 후예 숙친왕입니다. 나는 당신의 힘이 될 생각을 하고 찾아왔습니다.》
요염한 술수와 미색으로 숱한 남자들을 녹여내며 남복을 하고 돌아다니는것을 즐거움으로 아는 이 기묘한 녀자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도이하라의 뇌리속으로 순간에 하나의 구상이 번개쳤다.
《그랬군. 이거 옷을 못쓰게 만들어 안됐소.》
도이하라는 친절히 웃으며 녀자를 안으로 안내하고 심부름군을 시켜 멋진 새 녀자옷을 사오게 하였다.
그날 밤 남자를 녹여내는 그 녀자의 온갖 교태를 즐기며 도이하라는 그에게 넌지시 부의의 이야기를 했다.
흥분에 빨갛게 달아올랐던 요시꼬는 이것이 청조의 운을 《만주국》으로 이어가는 대업의 새 물고를 트는 길이라는 도이하라의 요구에 기꺼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가 설득하겠어요. 난 그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며칠후 요시꼬는 부의에게로 갔다.
하지만 그 녀자의 감언리설과 요염한 웃음에 녹아들면서도 겁많은 부의는 황제자리만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시꼬는 눈빛이 파랗게 살아났다.
도이하라가 대준대로 장작림이 죽은 경위를 귀띔하며 계속 이러면 래일이라도 당신의 침실에 일본사람들의 폭탄이 장치되지 않으리라는 담보는 없다고 침을 박았다.
부의는 머리를 싸쥐였다. 일개 평민으로 죽는것보다는 황제자리를 얻어 목숨을 더 연명해가는것이 낫지 않겠는가. 결국 부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한 괴뢰국의 허수아비에 불과했지만 부의황제의 등극은 일본의 만주침공의 최대의 성공작이였다.
동시에 그것은 도이하라 겐지의 그때까지의 모든 암약과 첩보활동에서의 가장 특출한 성과로 평가되였다.
감격한 《천황》과 그의 상전들은 도이하라 겐지에게 중장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이런 도이하라, 녀자의 기능과 매력으로 국운을 뚫는 파구를 만들줄 아는 도이하라이기에 그 요시와라식의 일본군《위안부》건을 고안해내고 식민지 조선의 녀자들을 성노예로 써먹을 묘안을 대뜸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
《도이하라의 공작은 그뿐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순수한 첩보목적외에도 중국인들을 토비화하고 타락한 민족으로 전락시키기 위해 만주와 중국관내의 가는 곳마다에 도박장, 매음집들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첩자들과 헌병대를 동원하여 돌아다니는 아편장사군들을 샅샅이 고용하여 만주와 중국본토의 도박장들과 매음굴들을 아편굴로 만들어나갔습니다.
가난에 쩌든 사람들속에서 결핵이 성행하자 도처에 림시 전포를 세우고 결핵의 특효약을 광고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아편이 아니면 아편유도제였습니다. 불행한 희생자가 한번 그 약품에 걸려들기만 하면 도이하라의 끝없이 증대하는 아편상용자무리속으로 굴러떨어졌습니다.
무력의 침공과 병행하여 매춘과 아편의 부패공작과 온갖 태업과 분파분쟁으로 중국인들의 인성을 파괴함으로써 중화민족을 철저히 타락시켜 무맥한 노예로 만들자는것이 도이하라의 목표였습니다. …
실상 도이하라의 이런 공작은 오늘 체제전환을 위해 미국과 서방이 동유럽의 공산권나라들을 목표로 강행하여 성공한 <색갈혁명>, <오렌지혁명> 보다 한 민족의 인성을 말살하기 위해 감행되였다는 점에서 보다 더 집요했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하지만 도이하라의 이런 음모들은 그 어떤 명령서나 지령으로 표현된것이 없습니다. 그때문인지 작년 녀성국제전범법정에서 국제공동검사단이 제기한 8명의 <일본군성노예범죄 피고인>명단에 도이하라 겐지는 올라있지 않았습니다.》
《음…》
무라야마는 사다께의 문건을 덮으며 긴숨을 내쉬였다.
사다께의 조사자료를 통해 그동안 륜곽적으로만 알고있던 일본군성노예문제의 전모를 새롭게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된것은 큰 성과였다.
하지만 무라야마는 사다께의 문건을 앞에 놓고 한참 앉아있었다.
그는 문건에서 사다께의 분석론조가 지극히 비판적인데 저으기 놀랐다.
사다께는 분명 과거의 제국과 전쟁의 전범자들을 거리낌없이 비판하는 이런 론조로의 분석을 자기 상관의 력사인식에 견해를 맞추는것이라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이것은 지난 시기 부하들이 나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부하가 상관이 정부의 력사인식문제에 전적으로 찬동하지 않는 자기식의 견해를 가지고있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있다면 이것은 수사의 진로와도 관계되는 심중한 문제이다.
헤쳐나가기 힘든 해일과 마주선듯 한 압박감이 서서히 숨을 가쁘게 했다.
이제 43살, 무라야마 그자신도 50년대 말기에 출생한 젊은 세대였다.
일본이 저지른 침략전쟁에 대해서는 자라면서 아버지와 조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많이 들었다. 또 책과 영화와 신혼려행때 요꼬다와 함께 갔던 저 괌도와 사이판의 옛 격전지들을 돌아보면서 전쟁의 참상에 대해 깊이 알게 되고 학교에서는 전후 제정한 《평화헌법》을 그대로 준수하며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하는 나라가 되여서는 안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경찰의 닛뽄도를 차고 대를 물려온 그의 집안어른들은 립장이 달랐다.
집안의 도꼬노마에 보관되여있는 칼 한자루, 집안의 가보로 물려온 그 칼을 청일전쟁때 고조부가 차고 조선에 나가있었고 다음엔 증조부가 차고 대만에 나갔다.
그 칼을 물려받아가지고 지요다구관내의 한 경찰서장을 하다가 제대된 그의 아버지는 절대적인 《천황》제복귀를 주장하는 강경우익이였다.
아버지는 매해 돌아오는 패전일이면 도꼬노마의 그 칼앞에 무라야마와 지금은 륙상《자위대》에서 장교로 근무하는 그의 동생을 앉혀놓고 명치유신의 《천황》제복귀가 일본의 근대화를 가져오고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일본이 있게 했다면서 반드시 《천황》제를 복귀해야 한다고 강조하군 했다.
무라야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조상들이 조선과 대만에 나가 저지르며 돌아간 추악한 일들의 내막을 잘 알고있었다.
그를 범죄수사국에서 대외문제국으로 적극 잡아당긴것은 시게미쯔국장이였다.
언젠가 사업협의를 하다가 국장이 지나가는 말처럼 《무라야마! 자네 고조부가 전세기말 <현양사>일원으로 조선에 건너가있은걸 아는가?》하고 물었을 때 무라야마는 은연중 놀랐었다.
자기만이 알고있는 가문의 깊은 래력을 국장이 어떻게 알고있는가 하는 의문에서였다.
《예! 알고있습니다.》하는 무라야마의 대답에 국장은 《음.》하며 더 다른 말없이 머리만 끄덕였었다.
그 아버지의 강권에 밀리워 무라야마는 끝내 희망이던 문과계통을 포기하고 경찰대학에 들어갔다.
결국은 그자신이 조상의 업을 이은 아버지의 세뇌교육과 경찰대학에서 정부가 고압적으로 주입하는 와전된 력사교육에 물이 든 사람이였다.
그런 집안과 대학의 완고한 국수주의교육이 그를 반발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정치에 오히려 더 골몰하게 했는지 모른다.
무라야마는 일본이 다시는 그런 침략적인 파시즘의 길로 가서는 안된다는 그로서의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있었다.
그것은 경찰청에 들어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경찰내부에도 력사문제에서는 일종의 묘한 두 분위기가 존재한다.
경찰은 외적으로는 절대적으로 정부의 립장 그대로이다.
군대와 경찰 같은 국가권력기관들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명령과 지시, 지령으로 내려가기때문에 경찰은 무조건 받아들이고 집행해야 하는 립장에 있다.
때문에 그 상층부나 중간급이나 하급집행자들은 누구나 입대후부터 늘 사상적으로 끊임없이 교육되고 또 명령을 받아 집행하는 그 정책의 연장선에서 자연히 정부의 정책과 지시, 의지의 체현자가 되고만다.
그런 연고로 일본의 경찰 역시 우익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우익집단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렇지만 경찰의 상층부에서 정부정책을 심의하고 채택하는데 건의를 할수 있고 토론을 하고 의견을 내야 하는 사람들은 해당 지침과 정책들이 국민의 안전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어떤 의의가 있는것인가 하는것을 깊이 사색하게 되고 그의 진정성이나 위험성을 나름대로 판단하는 안목을 가지게 되는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여러 나라와의 대외관계를 맡아보는 부서에 근무하면서 무라야마는 그의 개인적견해로는 다시는 일본이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확고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기와 이름이 같은 무라야마수상의 담화나 고노관방장관담화의 전적인 지지자였다.
그러나 아베나 이시하라 신따로 같은자들이 등장하면서 일본의 정치는 더욱더 위험한데로 가고있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미국의 비호하에 일본은 다시 옛꿈을 버리지 못하고 새 전쟁의 함정으로 빨려들어가고있다는것이 무라야마의 생각이였다.
이제 다시 전쟁의 길로 간다면 그것은 일본이 파국적인 재난을 스스로 뒤집어쓰는것으로 될것이다.
아시아 각국은 이미 지난 시기 일본이 마음대로 유린하던 그런 나라들이 아니다.
이제 다시 전쟁을 하면 일본은 살아남지 못한다.
때문에 《평화헌법》을 개정하거나 확대해석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무라야마는 경찰청에서 진행하는 정세관평이나 안보문제토론회때에는 심심찮게 이런 견해를 주장하군 했다.
그래서 《경찰청안의 야당》이라는 비평을 듣군 했고 상관들의 의혹짙은 눈총을 받거나 그런 발언으로 득볼게 뭔가 하는 동료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맡겨진 업무수행에서 판단이 정확하고 치밀한 작전과 수사진행으로 최단시간내에 사건을 해결하는 그의 능력은 누구도 따르기 힘들었다.
일본군성노예문제에서 발생된 이번 사건취급과정에 과거 일본이 저지른 죄악을 더욱 속속들이 생생한 체험으로 감득하면서 겉으로 표현은 안했지만 무라야마는 자기의 견해에 더 확신을 가졌다.
같은 수사를 맡은 사다께 같은 부하가 일본의 진로에 대한 문제에서 자기와 인식이 같다면 그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수 없다.
언젠가 어느 회식자리에서 《헌법 9조》를 절대 개정해선 안된다고 자기가 한마디 했을 때 사다께는 이렇게 말했었다.
《과장님! 그거 과장님 혼자만의 삐여진 생각이라고 보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아, 지금 솔직히 저 정부안의 극우익 몇몇 내놓고 일본이 앞으로 다시 전쟁해야 산다고 생각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명분이든 우리 일본 다시 전쟁하면 망합니다.
안할 말루 저 태평양건너 편안히 살고있는 미국의 대리전쟁돌격대로 나섰다가 오히려 보복의 핵탄 몇발 맞아봐요, 그때 가서 그 불바다에 페허가 된 땅에서 건질게 뭐가 있겠습니까? 3백만이 될지 9백만이 될지 모르는 영령이나 추모하구 앉아있겠나요?
그러니 어차피 어데 빠질데도 없는 이 좁디좁은 쪼각쪼각 섬나라 애지중지 건사하며 바다건너 이웃들과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도를 찾는 그런 정치 하루빨리 자리잡아야 합니다.》
《이 자식, 완전 평화주의자군.》
《하, 두고보십시오. 과장님! 그게 일본이 길게 사는 길입니다.》
동전을 절렁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사다께를 두고 그때는 웃으며 넘어갔지만 그가 자기딴의 확고한 지론과 안목으로 일본과 아시아 각국과의 관계를 관망하고있는자라고 지금 내심 수긍하지 않을수 없다.
무라야마는 이러루하게 가슴에 술기운처럼 배여드는 감상적인 느낌이 껄끄러웠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밖에서는 짙은 어둠이 도심가를 짓누르고있었다.
다음날 무라야마는 사다께에게 방위청 군적자료실에서 니시하라의 전쟁시기 경력을 찾아올 임무를 주고 자기는 경찰청장의 승인을 얻어가지고 지요다구의 황실을 찾아갔다.
거기서 궁내청의 황족담당 관리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니시하라 겐따로가 《천황》가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을 구체적으로 알고싶어서였다.
면담리유를 듣고 들어갔던 황실시종이 한참만에 다시 나왔다.
그는 황실과 관계된 어떤 사적인 내용도 말할수 없기때문에 담화에 응할수 없다는 황실관리의 말을 전하고 들어갔다.
아무리 도미꼬의 사건과 관련된 문제라 할지라도 황실의 지위와 관련된것이기때문에 만날수 없다는것이였다.
무라야마는 쓴입을 다셨지만 할수 없었다.
일본의 건드리지 말라는 3대금기!
황실, 검찰, 세무서… 그 첫째가 황실이 아닌가.
패전후 《천황》의 지위가 보통시민으로 내려앉고 《불경죄》가 페지되였지만 황실의 그 위세는 여전했다.
그런데 방위청 군적자료실에 갔던 사다께가 흥분해서 돌아왔다.
《과장님! 니시하라가 전쟁시기 동남아에 가있은게 옳습니다.》
《뭐, 그게 사실인가?》 무라야마는 귀가 번쩍 틔여 되물었다.
《동남아 어딘가? 타이인가?》
《먄마-타이국경지대입니다. 니시하라는 1942년 먄마침공당시 16군의 56사단 잠보쬬련대 경비중대장으로 있다가 전쟁말기인 1944년부터는 사단의 비적토벌대장으로 근무했습니다.》
《음, 그가 동남아에서 근무했다는것을 확인한것만도 큰거요. 그가 타이에 <황군>은퇴자들의 거리를 만들고있는 연고가 뭔지 가늠이 가지 않는가. 그 자료를 지체없이 웅카라에게 전송해줘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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