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방북기] 어머니들의 모습에 비낀 북녘의 사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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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5-11-24 13:41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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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북기] 어머니들의 모습에 비낀 북녘의 사회상
박수영 기자
<통일신보>가 카나다동포가 쓴 “어머니들 모습에 비낀 북의 사회상” 제목의 방북기를 소개하였다.
어머니날에 북을 방문한 필자 리미애 씨는 북녘 여성들 특히 어머니들의 삶을 살펴본 소감을 말하였다. 그는 물질적 부의 만족에서 행복감을 찾고 있는 서방세계의 어머니들과 달리 북의 어머니들은 "사회와 집단에 대한 헌신과 자식들을 나라의 기둥으로, 영웅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랑으로, 행복으로 여기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여성을 "역사를 전진시키는 한쪽 수레바퀴"로 내세워주는 지도자들의 여성관에 대해서도 자신의 소감을 피력하며, 북에 가보면 여성들이 얼마나 큰 복 속에서 살고 있는지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전문을 소개한다.
어머니들의 모습에 비낀 북녘의 사회상
리미애(재카나다돌포)
▲"어머니날을 축하합니다." -청춘거리 체육촌에서-
비행기에서 내리는 첫 순간 마중나온 안내선생의 인사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뜻깊은 어머니날에 조국을 방문하신 선생님을 축하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고국의 체취와 정든 동포들이 그리울 때면 느닷없이 찾곤 하는 이북이지만 어머니날에 평양을 방문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머니!
마음속으로 조용히 불러만 봐도, 그 모습을 언뜻 떠올려보기만 해도 따스한 햇살과도 같은 포근함이 온몸에 감겨든다. 그 포근함은 바로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고 정이며 헌신이다. 진정 어머니의 낙은 자식을 위해 끝없이 바치는데 있다. 그 어느 어머니도 자식을 위해 바친 모든 것을 희생으로 생각지 않는다.
일본의 한 시인이 쓴 시가 나의 뇌리를 지나갔다.
내 어릴적 나의 어머니
나를 업고 무거웁다 하시더니
내 다 자라 어머니를 등에 업으니
너무도 가벼워 걸음을 못 떼겠네
한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신 어머니의 가벼운 무게에 마음이 무거워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자식의 심정을 대변한 이 한 편의 시에서 어제날 우리의 어머니들을 그려보았다.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어머니를 가지고 있다. 또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있다.
하건만 인류문명을 자랑하는 현 시대에 부모가 자식을 부담스러워하고 자식이 부모를 배척하는 눈물겨운 실상을 일상적으로 목격하지 않을 수 없는 내 자신이 한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보고 싶었다.
이북에서는, 여기 북녘조국땅에서는 어머니들이 어떤 삶을 누리고 있는가, 어머니날에 비낀 고국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것인가.
▲어머니날에 다채로운 경축공연도 열려
행복한 어머니들
“행복하냐구요? 어머니로 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녀성도 있습니까? 더우기 세쌍둥이의 어머니가 되였는데…”
평양산원에서 455번째의 세쌍둥이를 낳았다는 한 녀성의 말이었다.
너무도 순박하고 너무도 소박하고 스스럼없는 대답이어서 질문을 제기한 나자신이 어리둥절하였다.
서방세계에서는 “여성으로 태어나지 말라, 설혹 하느님의 벌을 받아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어머니로 되는 실수마저 범하지 말라.”라는 말이 공용어처럼 떠돌고 있다.
우연한 소리가 아니다.
글을 쓰는 나자신도 얼굴이 뜨겁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를 학대하고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죽이는 것조차 예사로운 일로 되고 있다.
비근한 실례이지만 미국에서는 아이를 버리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어 있으며 어머니들이 거리낌없이 자식을 버리고 있다.
버리는것도 모자라 살인까지 하고 있는 것이 현 실태이다.
얼마전 미국에서는 한 여성이 낳은지 석달 밖에 안 된 젖먹이 어린 것을 제손으로 죽여버린 범죄행위가 폭로되었다. 조사과정에 그가 13개월 동안 자식 모두를 제손으로 질식시켜 죽인 사실을 밝혀냈다.
어머니가 2살 난 딸을 살해하고도 한달 동안이나 그것을 숨기고 먹자판을 벌인 사실도 있다.
부모에 의한 자식살해가 비일비재로 일어나고 있는 미국땅에서 이제 더는 이러한 사건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빨아들이는 특종뉴스”로 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미국의 한 출판물이 “미국인들은 결혼과 아이 문제를 별개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오래 전에 부모로서 아이를 낳아키우는 책임을 휴지통에 내던져버렸다.”라고 개탄하였겠는가.
심지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밝힌 책까지 출판되어 여성들의 대인기를 끌고 있는 정도이니 서방에서 여성들의 어머니관이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배척당하고 있는 여성의 존엄과 권리, 이 속에서 모성의 권리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아직까지 “모든 형태의 여성차별청산에 관한 협약”이 비준되지 않고 있으며 유일한 여성지원프로그람인 산전산후 휴가제도도 명색뿐이고 빈 허울만 남아 있다. 여성천시 풍조는 자본주의사회의 고질적인 악페로 남아 있으며 그 속에서 모성의 의무와 권리를 다 한다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한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플로리앙은 어머니에게 매를 맞고 거리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두고 “너는 어머니한테서 매를 맞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아이이냐.”라고 하며 어머니 정이 그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머니와 자식 간에는 인위적으로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한 플로리앙이 아마 현대문명을 자랑하는 현 시대에 이와 같은 현실을 목격했다면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라고 자신의 말을 정정했을 것이다.
내가 사업차로 자주 다니는 이남에서도 여성들이 어머니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포기하고 온갖 타락과 절망 속에 앞날을 비관하고 있는 현상은 보편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
결혼과 해산을 기피하는 독신문화, 법적 혼인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생활난으로 인하여 자식과 가정을 포기하고 갈라져 산다는 ‘무늬만 가족’, ‘솔로족’, ‘홀로서기족’, 의식적으로 자식을 낳지 않는다는 ‘딩크족’ 등 별의별 해괴한 <문화>와 <족>들이 산생되고 있는 것이 이남의 현실이다.
돈과 권력이 밀착되어 수백 명의 나어린 학생들을 한날 한시에 바다에 빠뜨려 죽게 만들고도 자그마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는 세상에서 자식 가진 이남의 수많은 어머니들의 눈물은 계속 흐르고 있다.
언제인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세모녀 자살사건과 관련하여 이남의 한 잡지에 실린 글이 생각난다. “’너희들을 이 세상에 맡길순 없었어.’, 그것은 어미로서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이 사회에서 자신이 아이들에게 더 줄 수 있는 것은 더이상 없다는 생각으로 하여 세자식과 어머니가 아빠트 아스팔트에 선홍색 피를 뿌렸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살기 싫다. 죽고싶다.’, 이것이 바로 이 저주로운 사회에 남긴 한많은 어머니의 항거의 웨침이였다.”
세쌍둥이를 안고 행복의 웃음을 짓는 이북의 어머니와 자식을 낳는 것을 부담으로, 우환거리로, 재난으로 생각하고 저주로운 세상과 단호히 결별한 이남의 어머니, 얼마나 대조적인가.
다같이 세자식을 둔 어머니였다.
하건만 이남의 어머니는 행복이라는 물음에 죽음으로 대답했고 이북의 세쌍둥이 어머니는 물음 그 자체를 반문했다.
평양의 여러 곳을 돌아보면서 나는 왜 그 여성이 나의 물음을 반문했는가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특히 평양산원과 옥류아동병원, 경상유치원을 돌아본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보석주단 위에 펼쳐진 아기들의 행복의 요람과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고고성, 치료와 교육이 다같이 보장되는 최신식 설비들이 갖추어진 병원을 초월한 아이들의 궁전, 기초교육은 물론 재능의 싹을 찾아 배움의 나래를 활짝 펼쳐주는 어린이들의 활무대…
더우기 경이로운 것은 이 모든 교육과 보건혜택들이 다 무료라는 것이었다.
태어난 첫날부터 교문을 나설 때까지 국가적 부담과 사회적 우대 속에 자식들을 키우는 이북의 여성들은 정말로 행복하였다.
예로부터 자식하나 키우는데 오만 자루의 품이 든다고 하였다. 하건만 이북에서는 이 오만 자루의 품을 다 국가에서 부담하고 있으니 자식을 낳은 여성이 어머니로서의 구실을 하는데 도대체 얼마만한 품을 들이겠는지 의문될 정도였다.
서방에서는 한 자식을 낳아도 두려움과 걱정 속에 한숨부터 내쉬건만 이북에서는 세쌍둥이를 낳았다고 금반지와 은장도를 선물로 주고 온갖 특전특혜를 다 베풀고 있으니 이런 행복을 받아안은 여성을 두고 행복한가고 물음을 제기한 나자신이 정말로 어리석었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이북여성들은 복 속에 사는 여성들이었다.
특이한 행복관
내가 이북을 방문하면서 느낀 것은 행복에 대한 어머니들의 견해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나는 것이었다.
서방세계에서는 행복을 물질적 부의 만족에서 찾고 있다.
하건만 북의 여성들의 행복관은 결코 물질적 부의 향유에 귀착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와 집단에 대한 헌신과 자식들을 나라의 기둥으로, 영웅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랑으로, 행복으로 여기고 있었다.
북에서 <선군시대녀성공로자>, <모성영웅>이라는 고귀한 칭호도 안겨주고 사회와 집단의 본보기로 내세워주고 있는 여성들은 다 나라와 인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거나 수십 명의 부모잃은 어린이들을 데려다 키운 어머니들, 귀한 것이 생길 때마다 군인들과 건설장으로 찾아간 어머니들이었다.
7명의 부모없는 아이들을 키워 20살 꽃나이처녀가 <처녀어머니>라는 고귀한 칭호를 받은 장정화 여성을 만나본 나는 북의 여성들의 행복관에 대하여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제가 무슨 큰일을 하였다고 나라에서 이처럼 크나큰 믿음과 영예를 안겨주는 것인지… 단지 이 나라의 여성으로 태어난 책임감과 의무를 다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데려다 키우는 자식들을 나라의 기둥으로 키우는 여기에 나의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이 한마디의 구호 속에 이북동포들의 생활관, 가깝게는 이 나라 여성들의 인생관이 함축되어 있다.
물질적 부의 만족에서가 아니라 사회와 집단을 위하고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위한 길에 자식들을 떳떳이 내세워 여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을 다하겠다는 북의 어머니들의 행복관에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지고 우러러보게 되었다.
여성존중의 정치
내가 본 이북은 여성들의 낙원이었다. 그 아름다운 여성화원을 펼쳐주신 분들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북에서 처음으로 열린 전국어머니대회에서 김일성주석이 <자녀교양에서 어머니들의 임무>라는 명저를 발표하였다.
이 명저에서 주석님은 어린이들을 교육교양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어머니들의 어린이교육교양에 관한 이론과 방법, 가정교육이 후대교육에서 차지하는 위치, 자녀교양에서 사회적 환경과 어머니들의 역할 등에 대하여 과학적인 해답을 줌으로써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할 참다운 인간육성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였다.
여성들을 한가정의 주부로서만이 아니라 나라의 기둥들을 가꾸는 원예사로, 여성혁명가로 정립하여주고 역사를 전진시키는 한쪽수레바퀴로 내세워준 주석님의 숭고한 여성관, 후대관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뒤를 이어 김정은령도자에 의하여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여성들이 생기와 활력에 넘쳐야 조국이 힘차게 전진한다는 숭고한 뜻을 품고 여성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돌리며 이 문제를 국사 중의 국사로 내세워준 선대수령들의 뜻을 그대로 계승하는 김정은령도자는 뜻깊은 전국어머니대회 날자를 오늘날 이북의 어머니날로 명명하였으며 온 나라 여성들의 명절로, 축복의 날로 되도록 하였다. 그분께서 온 나라 대가정의 친어버이가 되어 아이들과 어머니들을 위해 그처럼 희한하게 꾸린 옥류아동병원과 평양육아원, 애육원도 돌아보며 친어머니의 사랑인들 이보다 더 따뜻하고 살뜰하랴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었다.
이번 어머니날에 북의 어디서나 여성들, 어머니들이 가정과 사회의 축복을 받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상점들은 어머니들에게 안겨줄 꽃과 기념품들을 사는 청춘남녀들로 흥성였다. TV에서는 이 나라 어머니들의 행복상을 보여주는 특집프로들이 방영되고 있었다.
생각도 많았다.
여성으로 태어났다고 하여 누구나가 다 어머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설사 어머니가 되었다고 해서 어머니 구실을 다하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가 되고 싶어도 어머니 구실을 다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서방세계이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누구나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면 어머니가 되고 싶어하고 또 어머니가 되어서는 어머니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개인의 노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다.
사회적, 국가적 혜택과 시책이 철저히 보장되기 때문이다.
때려도 밀어던져도 어머니라 부르며 치마폭에 감겨드는 자식들의 그 순진한 모습이 그리워, 힘들어도 어려워도 뜨거운 모성애로 새힘과 용기를 주고 주저앉았던 육체를 일으켜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워 식어진 모성애를 대신하여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성애가 마르고 육친의 정이 식어버린 자본주의사회에서 여성들이 믿을 것이란 하나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북에서는 어머니란 그 고귀한 이름을 너무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기에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운명의 기둥에 어머니란 이름을 정담아 믿음 속에 즐겨 부른다.
어머니 우리 당 조선로동당, 어머니 우리 조국, 어머니 나의 대지…
여성들을 사회의 주인으로, 주력군으로, 꽃으로 내세워주며 여성존중, 여성중시의 숭고한 정치를 펼치는 이북사회에서 이 나라 여성들이 하나님보다 자기 수령, 자기 사상, 자기 제도를 더 숭상하고 생명처럼 믿는 것은 너무나도 응당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늘을 헤가르며 희망찬 미래에로 나래를 퍼덕이는 천리마동상이 이북에 있다.
세기를 주름잡으며 천리를 내짚는 조선의 모습을 반영한 천리마동상에는 사회와 민족의 발전을 책임진 이 나라 여성의 모습이 당당하게 거연히 새겨져 있다.
이북의 하늘을 나는 천리마의 기상 속에도 사회의 당당한 주인으로서의 여성들, 미래를 가꾸는 어머니들의 행복한 모습이 비껴있는 것이다.
나는 보았다.
이북사회에 비낀 여성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키워내는 아름다운 미래에서 이 나라의 번영할 내일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천국이었다. 행복의 보금자리였다. 수수천년을 두고 세상의 여인들이 그려보던 여성천국을 보았다.
나는 말하고 싶다.
여성의 인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세계의 진보적인 양심들이여, 어머니들이여.
북에 와보시라, 그러면 그대들은 보게 될 것이다.
여성천국을, 참다운 인권의 나라를.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5-11-24 13:46:24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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