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 수령명령관철, 이것이 총적지향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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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4-07-01 12:36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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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명령관철, 이것이 총적지향점이었다
편집국
7월 1일 【로동신문】은 조국해방전쟁시기 당정치사업경험의 연재를 시작하며 수령명령관철, 이것이 총적지향점이라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기사는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건설이 진행되던 10여년전 이곳을 찾으셨던 김정은 위원장께서 당정치사업관을 꾸릴것에 대한 것을 평가하며 화선정치사업의 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병총으로 원자탄을 이긴 전승신화를 떠올린 당정치사업이 오늘날 사회주의전면적발전의 새 전기를 열어나가는 오늘의 투쟁에 활력을 부어주는 귀중한 정신적 유산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군인들이 무비의 용감성과 대중적영웅주의를 발휘하여 전투마다에서 승리를 이룩할수 있은 중요한 요인은 당정치사업이 수령의 명령관철에로 철저히 지향된데 있다고 하며, 인민군대의 문화기관들이 어떻게 정치사업을 진행하였는지를 소개하였다.
정치사업의 강화로 하여 전투에서는 대중적영웅주의와 불굴의 투쟁정신이 발휘되었으며 전략적일시후퇴 시기에는 인간의 사상과 신념으로 인한 생활력이 무엇인지 명명백백 립증되는 계기도 되었다고 하였다.
전화의 시기 당정치사업은 으리으리한 연탁앞에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수림속 한가운데 위대한 수령님 초상화를 정중히 모신 소박한 회의장이나, 총탄과 파편에 짖긴 공화국기 앞에 잠시 모여 앉은 휴식참에도 열리었다고 하였다. 각이한 환경과 정황속에서 각이한 형식과 방법으로 진행되었지만 정치사업의 지향점은 오직 하나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주신 명령은 무조건 수행하는 것이었다고 하였다.
전화의 당정치사업은 해설과 호소로 그치지 않았다. 대전으로 육박하는 진격의 선두에, 락동강을 건너 공격하는 대오의 앞장에 공화국기를 추켜든 정치일군들과 초급선동원들이 있었다며 17살 꼬마전사가 백전병에 용감히 뛰어들어 전사한 실례를 소개하였다.
전화의 당정치사업은 이렇듯 말이 아니라 영웅적투쟁이였고 값비싼 희생이였다.그런것으로 하여 군인들을 위훈에로 부르는 위력한 고무적기치로 되였다고 하였다.
오직 수령의 명령관철을 위하여!
전승세대의 당정치사업에 관통된 이 숭고한 정신은 당중앙의 원대한 리상을 현실로 꽃피우기 위한 투쟁을 강력히 견인해나가야 할 각급 당조직들과 당일군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재부로 된다고 하였다.
전문을 소개한다.
10여년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건설이 진행되던 때 자주 이곳을 찾으신
보병총으로 원자탄을 이긴 전승신화를 떠올린 위력한 당정치사업, 가렬한 전화의 불길속에서 창조된 그 하나하나의 고귀한 경험들은 겹쌓이는 애로와 난관을 뚫고 사회주의전면적발전의 새 전기를 열어나가는 오늘의 투쟁에 활력을 부어주는 귀중한 정신적유산으로 된다.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군인들이 무비의 용감성과 대중적영웅주의를 발휘하여 전투마다에서 승리를 이룩할수 있은 중요한 요인은 당정치사업이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승리는
조국해방전쟁시기 제8보병사단 83련대 3대대 7중대 전투소보원이 발간한 전투속보 《필승》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다.
《동무들! 우리가 가는 길은 승리자의 행군길이다.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도 변함없이 높이 울린 신념의 목소리-수령님께서 계시는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바로 여기에 전화의 나날의 당정치사업의 핵이 있다.인민군용사들에게
미제가 조선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단 1950년 6월 25일, 바로 이날
인민군대의 문화기관들은 군인들속에서 정치사업을 강화하여 그들이 전투에서 대중적영웅주의와 불굴의 투쟁정신을 높이 발휘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인민군군인들이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고 하신
전투를 앞두고 전선련합부대들에서는
제1보병사단 3련대 2대대의 어느한 문화부중대장은 군인들속에 들어가 《전투원들이여, 서울이 멀지 않았다.
정치선전은 제9땅크려단에서도 힘있게 벌어졌다.서울해방을 위한 공격을 눈앞에 둔 6월 27일 밤 문화부려단장 안동수동지는 땅크병들에게
후날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는 매 인간의 사상과 신념이 검증된 나날인 동시에 당정치사업의 생활력이 명명백백하게 립증된 계기이기도 하였다.
주체39(1950)년 9월 25일
그날
초급선동원들과 전투소보원들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제19보병사단 36련대 1대대 전투소보원 박창근동지는 준엄한 행군길에서도 전투소보 《조국은 우리를 부른다!》를 발간하여 배낭뒤에 매달고 행군대오의 앞뒤를 오가면서 전투원들을 고무하였다.
당시 당정치사업이 얼마나 큰 실효를 거두었는가 하는것은 창성군 유평리에 깃든 감동깊은 사연이 그대로 실증해준다.
후퇴가 한창이던 주체39(1950)년 10월 26일
어둠이 실린 하늘가에 련이어 울려퍼지는 《조국보위의 노래》와 장편서사시 《백두산》…
군인들이 열정적으로 랑송하는 시를 들으시던
이렇게 되여
준엄한 시기에도 군인들의 가슴마다에
전화의 나날 당정치사업은 으리으리한 연탁앞에서 진행되지 않았다.수림속 한가운데
전화의 당정치사업은 해설과 호소로 그치지 않았다.대전으로 육박하는 진격의 선두에, 락동강을 건너 공격하는 대오의 앞장에 공화국기를 추켜든 정치일군들과 초급선동원들이 있었다.
10여일간이나 진행된 가렬한 수암산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문화부중대장, 그는 패주하는 적들에게 숨돌릴 틈을 주지 말고 련속적인 기동타격으로 대구에 있는 적의 집단을 포위소멸할데 대한
그의 품속에서는 피에 젖은 종이장이 나졌다.힘겨운 전투의 짬시간마다 무엇인가 열심히 쓰군 하던 그였다.전우들은 그가 고향에 보낼 편지를 쓰리라고 생각하였지만 그것은 중대전투원들의 한결같은 신념과 의지를 담아
《…
이 몸이 한줌의 흙이 되여 고지에 묻힌다 해도
전화의 당정치사업은 이렇듯 말이 아니라 영웅적투쟁이였고 값비싼 희생이였다.그런것으로 하여 군인들을 위훈에로 부르는 위력한 고무적기치로 되였던것이다.
오직
전승세대의 당정치사업에 관통된 이 숭고한 정신은 당중앙의 원대한 리상을 현실로 꽃피우기 위한 투쟁을 강력히 견인해나가야 할 각급 당조직들과 당일군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재부로 된다.
본사기자 김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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