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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더불어 8권 제23장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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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0-09-22 13:44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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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김일성주석님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계승본) 8

 

 

 

제23장

국제반제력량과 련합하여

 

3.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

 

조선혁명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한상의 사진앞에서 오래도록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타향에서 봄을 맞으면서라는 위대한 수령님의 활달한 친필이 적혀있는 사진이다.

언제인가 혁명박물관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사진앞에서 이 사진은 자신께서 제일 아끼던 사진이라고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항일혁명시절을 추억하실 때마다 김정숙동지를 자주 회고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언제나 경애하는 수령님의 마음속 깊은곳에 가장 귀중하고 친근한 동지로, 잊을수 없는 혁명전우로 살아계시였다.

 

내가 이 사진을 찍은것은 남야영에 머물러있을 때입니다. 남야영은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들과 항일련군 1로군산하의 부대들이 초기에 사용한 워로쉴로브근방의 림시기지입니다. 남야영을 B야영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거기서 한해 겨울을 난 다음 나는 다시 만주와 국내에 나와 소부대활동을 벌렸습니다. 1942년 여름부터 우리는 쏘독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급변한 정세의 요구에 맞게 동북항일련군과 쏘련군부대들과 함께 국제련합군을 뭇고 북야영에 정착하였습니다. 항일투사들이 A야영이라고 부르는 하바롭스크부근에 있는 기지가 바로 북야영입니다.

나는 하바롭스크회의가 있은 다음 남야영으로 갔습니다.

우리보다 한발 먼저 남야영에 와있던 최현이 멀리까지 나와 우리를 마중해주었습니다. 그가 털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쓴 나를 눈이 떼꾼해서 쳐다보다가 웬 신사인가 했더니 김장군이였구만 하면서 웃음을 터뜨리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최현이 어찌나 포옹을 세게 했던지 나는 숨이 막힐 지경이였습니다. 그는 하바롭스크에서 회의를 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무슨 회의를 그렇게 오래 했는가고 투정비슷하게 롱도 하였습니다.

남야영에서 동쪽으로 얼마간 가면 하바롭스크에서 울라지보스또크로 통하는 철길이 있고 자그마한 철도역이 있었습니다.

남야영에 모인 인민혁명군대원들은 자체로 병실도 더 짓고 주택도 짓고 창고며 식당이며 세면장도 지었습니다. 병실은 반토굴식이였는데 인민군대의 현재병실들처럼 침대를 2층으로 놓았습니다. 우리 대원들이 그때 건설공사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병실앞에는 널직한 운동장도 있었습니다.

남야영에 있을 때 국내와 만주에서의 소부대활동을 준비하면서 정치학습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대원들은 대부분이 그때 처음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곳에 간 다음부터는 식량걱정을 안해도 되였습니다. 끼당 200그람 정도씩 얇게 썬 빵을 주었는데 처음에는 입에 잘 당기지 않았습니다. 입에 선 서양음식인데다가 찬도 변변치 않아서 다들 식성이 맞지 않아했습니다.

거기에는 후방차도 있었습니다. 그 화물자동차가 근처에 있는 부업농장에 다니며 우리에게 필요한 후방물자를 날랐습니다.

운전수는 쏘련사람이였습니다. 리오송이 운전기술을 배우느라고 내내 그 사람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였습니다. 어떤 날은 부업농장에도 같이 갔습니다. 그는 운전수를 따라다니는 과정에 자동차운전법도 배우고 술도 배웠습니다. 그 운전수라는 사람이 술을 무척 좋아했던것 같습니다.

리오송은 그때 배운 밑천을 가지고 해방후에도 얼마간 차를 몰았습니다.

그가 차라면 오금을 쓰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내 차를 몰다가 울타리를 들이받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우리 동무들이 그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해방후 남야영에서 생활하던 쏘련전우들이 우리 나라에 왔다간 일이 있습니다. 후방차운전수도 평양에 와서 옛친구인 리오송을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원동에서 겨울을 나고 봄을 맞던 그해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1941년은 우리 혁명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 해이지만 세계적판도에서 볼 때에도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많았던 해입니다.

6월에 히틀러군대가 쏘련을 침공했고 12월에는 일본군의 진주만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였습니다.

참으로 1941년은 인류에게 헤아릴수 없는 고통과 재난을 가져다준 불행한 해였습니다. 수천년을 두고 인류가 쌓아놓은 문명이 땅크와 대포 앞에서 형체도 없이 박살나던 수난의 해, 전화의 해였습니다.

그러나 쏘독전쟁도 태평양전쟁도 아직은 미래의 일이였습니다. 우리는 래일에 대한 락관과 신심에 넘쳐 1941년을 뜻깊게 맞이하였습니다. 조선혁명가들이 시대와 력사앞에, 조국과 민족앞에 지닌 성스러운 임무를 실현할 시각은 바야흐로 눈앞에 다가오고있었습니다.

나는 새봄을 맞으면서 소부대활동과 앞으로의 공동작전과 관련된 구상을 많이 하였습니다. 일단 구상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우들과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때 김책과 주보중이 남야영에 얼마동안 와있었는데 그들과도 자주 협의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바롭스크회의후 소부대들을 편성하여 국내와 만주에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도 소부대를 데리고 떠날 차비를 하였습니다.

출동할 날자가 박두하자 김정숙은 나와 소부대공작에 나갈 동무들의 길차비를 도와주었습니다.

나와 김정숙은 그때 이미 결혼한 사이였습니다.

우리는 혁명을 하는 과정에 서로 알게 되였고 백두산을 넘나들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누는 사이에 벗이 되고 동지가 되고 한생을 같이하게 되였습니다.

내가 김정숙을 처음으로 본것은 다홍왜회의를 하던무렵입니다. 회의후였던지 도중이였던지 삼도만에 갔습니다. 연길현에 속한 고장입니다. 삼도만 능지영이라는곳에 당비서처가 있었는데 김정숙은 그 비서처에서 일하고있었습니다. 능지영에서 소집된 비서처일군들의 회의장소에서 김정숙을 만나보았습니다.

그후 나는 마안산에서 우리 부대에 편입된 김정숙을 다시 만나게 되였습니다. 김명화와 함께 만강에서 나를 맞아주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였습니다. 그날 그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듣고보니 그는 의지가지할데 없는 몸이였습니다. 그가 믿고 의지할곳이란 혁명전우들의 품밖에 없었습니다.

김정숙은 그후부터 내내 우리와 함께 싸웠습니다.

김정숙이 우리한테 온후 무송현성전투가 있었는데 거기서 그가 녀투사로서의 담력과 지략을 남김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내가 무송현성전투에서 살아난것도 김정숙의 덕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 전투가 아주 심각한 전투였습니다. 김정숙은 전투장에서 좀 떨어져있는 잘루목에서 7~8명의 녀대원들을 데리고 아침식사준비를 하고있었습니다. 그 잘루목에 밥을 지을만한 집이 한채 있었는데 연기가 나도 다른데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적들이 갑자기 녀대원들만 있는 잘루목에 달려들었습니다. 이 잘루목을 빼앗기게 되면 우리 부대가 앞뒤에서 얻어맞을수 있었습니다. 정황이 몹시 위급하다는것을 간파한 김정숙은 싸창을 뽑아들고 전우들과 함께 맹렬한 총격전을 벌렸습니다. 녀대원들의 드센 반격에 부딪친 적군은 숱한 주검을 남기고 퇴각하였습니다.

이 싸움이 있은후부터 그는 더욱더 전우들의 총애를 받는 인물로 되였습니다.

그해에 우리는 장백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듬해 3월에 무송원정을 떠났습니다.

무송원정이 힘든 원정이였다는것은 내가 여러번 말했습니다. 사실은 그때 나도 육체적으로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밤이면 대부분의 대원들이 다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김정숙만은 우등불곁에서 온밤 자지 않고 대원들의 해진 옷을 손질해주었습니다. 행군길이 하도 험하다나니 옷이 쉽게 해졌습니다. 신입대원인 마동희도 그 원정에 참가했다가 우등불에 모자를 태웠는데 김정숙이 새것처럼 기워놓았습니다.

후에도 체험한바이지만 김정숙은 무슨 일거리든지 손에 잡기만 하면 온 심혼을 다 바쳐 맵시있게 마무리를 해놓군하였습니다. 그날밤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탄복하였습니다.

무엇에 탄복하였는가. 남을 돕지 않고서는 발편잠을 자지 못하는 그 남다른 성품과 인정미에 탄복하였습니다.

이 생활세부를 통하여 나는 녀성으로서의 김정숙을 깊이 파악하게 되였습니다. 이런 경위가 있었기때문에 나는 지휘관들이 김정숙을 도천리지하공작조에 포함시키자고 제의할 때에도 서슴없이 동의하였습니다.

김정숙은 도천리와 신파 일대에서 많은 일을 해놓았습니다. 내가 그에게서 혁명가로서의 만만치 않은 수완과 능력을 발견한것이 바로 그때입니다.

그에게는 군중을 감화시키고 각성시키고 동원시킬줄 아는 비상한 솜씨가 있었습니다. 그가 정안군놈들에게 체포되였을 때 도천리와 그 주변 인민들이 경찰에 제출했다는 수백명의 련명으로 된 《량민보증서》는 김정숙에 대한 군중의 평정서와도 같은것이였습니다.

그가 어떻게 되여 인민들한테서 그런 신임을 받을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김정숙이 한몸을 내대고 일한 결과였습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한몸을 내대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무엇이 두려우랴 하는 배심을 가지고 일하였습니다. 그러다나니까 위험한 고비에 부닥쳐도 살아날수 있었습니다.

김정숙은 인간을 불처럼 사랑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남을 위한 희생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동지들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해내는것이 그의 성품입니다.

1938년 4월 6도구의 적을 치고 나오다가 쌍산자라는곳에서 싸움을 할 때였습니다. 전투가 얼마나 치렬했던지 나까지 기관총을 잡고 일선에서 적들을 쏘아눕히였습니다. 사면팔방에서 적들이 조여들다보니 우리는 어데로 빠질데도 없었고 잠간 숨을 돌리며 식사할 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옆구리가 뜨끈해났습니다. 호주머니를 만져보니 난데없는 만두가 들어있었습니다. 얼핏 보니 김정숙이 전장을 돌아다니며 전우들의 손에 만두를 쥐여주고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만두를 하나씩 꺼내먹으며 전투를 계속하였습니다.

작식터는 벼랑아래 샘터옆에 있었습니다. 그가 음식그릇을 가지고 그 아찔한 벼랑을 어떻게 톺아올라왔는지 알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이처럼 전우들한테는 늘 끼니를 번질세라 싸움터에까지 뛰여들어 음식을 나누어주면서도 김정숙자신은 노상 배를 곯았습니다.

언제인가 부대에 쌀이 떨어져 모두 맨 감자만 먹고 지낼 때가 있었습니다. 감자도 여러끼를 먹으면 대체로 새가 나고 입맛을 잃게 됩니다. 전우들이 며칠째 맨 감자로 끼니를 에우게 되자 김정숙은 그것을 몹시 안타깝게 여기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전우들의 입맛을 돋구겠는가를 줄창 궁리하였습니다. 그는 감자를 갈아서는 전우들에게 지짐도 해주고 산나물을 뜯어다가 볶아서 소를 넣고 떡도 해주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대원들이 감자음식을 모두 달게 들었습니다.

김정숙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동지들을 위해 한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동지애로부터 시작되였고 동지애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으며 그 과정에 공산주의적도덕의리가 최대한으로 발양된 비범한 혁명가로 되였습니다. 그가 일생동안 해놓은 그 모든것은 다 동지들을 위하고 인민을 위하고 혁명을 위한것이였지 자신을 위한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김정숙의 관념속에는 자기라는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굶어도 좋고 얼어도 좋고 아파도 좋다, 그러나 동지들이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고 아프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다, 내가 죽는 대가로 동지들을 살릴수 있다면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웃으면서 죽음의 길을 택할것이다 하는것이 바로 김정숙의 인생관이였습니다.

김정숙의 동지애가 얼마나 진실하고 열렬한것인가를 알려면 한장의 모포에 깃들어있는 사연만 들어보아도 충분할것입니다.

얼마전에 연길에서 살고있는 김정숙의 전우인 서순옥이 나를 만나려고 평양에 왔다갔습니다. 그때 그가 모포 한장과 쌍안경을 가지고왔습니다. 서순옥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서 사령부작식대원으로 일하던 동무입니다. 그의 남편 김명주도 한때 주력부대에서 군사지휘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연길감옥》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진 사람이였습니다. 우리가 무송지방에 나와 활동할 때 7련대에 있었습니다.

서순옥은 최희숙이 요방자라는 고장에 지하공작을 나갔다가 데리고와서 입대시킨 녀대원이였습니다. 입대당시의 그의 나이는 열대여섯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최희숙은 서순옥을 부대로 데리고올 때 그의 조카까지도 데려왔습니다. 엄광호가 청봉밀영에서 적의 밀정으로 몰아붙인 애숭이대원이 바로 서순옥의 조카였습니다.

서순옥은 김정숙의 사랑을 많이 받던 녀대원이였습니다. 김정숙은 숙영지에서 늘 자기보다 몇살아래인 서순옥을 껴안고 잤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포 한장을 함께 사용하군했습니다. 그 당시 사령부가까이에 있은 녀대원들이란 김정숙과 서순옥뿐이였습니다.

서순옥이 가져온 모포는 김정숙이 애용하던 모포입니다. 김정숙의 배낭에는 언제나 그 모포가 얹혀있었습니다. 사람보다 배낭이 더 커서 누구인지 가려보기가 힘들 때에도 나는 모포를 보고 그를 알아보군했습니다.

김정숙은 서순옥이 소부대기지에 갈 때 그 모포를 그에게 기념으로 주었습니다. 그 기지에 김명주도 있었고 현철도 있었습니다. 김명주와 서순옥은 거기에서 결혼하였을것입니다.

서순옥은 떠나는 날 김정숙을 붙들고 자꾸 울었습니다. 한 모포밑에서 지내던 녀성들의 리별이여서 눈물도 많았습니다.

그때 김정숙은 서순옥에게 줄 기념품을 마련하지 못해 안타까와했습니다.

김정숙은 서순옥의 배낭에 그 모포를 넣어주면서 자, 기념으로 가지고 가거라, 새것은 아니지만 너를 친동생처럼 사랑해온 이 언니의 온기가 스며있다는걸 잊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반세기가 지나서 그 모포가 다시 나한테로 돌아왔습니다.

50년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그 모포가 김정숙이 애용하던 모포라는것을 인차 알아보았습니다. 그가 가져온 쌍안경도 내가 김명주에게 준것이였습니다.

그때 그 모포보다 더 소중한 물건이 있었다면 김정숙은 서순옥에게 그것도 서슴없이 주었을것입니다. 그는 늘 받는 재미보다 주는 재미가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남들의 정을 받는것도 좋지만 남들에게 자기 정을 줄 때가 훨씬 더 좋다는것이 바로 김정숙의 인생철학입니다.

김정숙의 동지애는 나를 위한 노력, 나를 위해 자기를 깡그리 바친 헌신성에서 제일 두드러지게 표현되였습니다. 자기 사령관에 대한 충실성도 그 본질은 동지애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어느해인가 우리가 식량이 떨어져 몇끼씩 굶으면서 전투를 계속하던 때였습니다. 한창 전투를 지휘하고있는데 누군가 나의 주머니에 무엇을 넣어주는것이였습니다. 돌아다보니 김정숙이였습니다.전투가 끝난 다음 주머니의것을 꺼내서 펼쳐보았더니 잣을 알알이 까서 종이에 싼것이였습니다.

나는 김정숙에게 어디서 얻은 잣인가고 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미소만 지을뿐이였습니다. 후날 다른 녀대원들이 하는 말이 그가 직접 잣나무에 올라가 따온 잣이라는것이였습니다.

김정숙은 여러번 나를 위기에서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는 내 신변안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육탄이 될 준비가 되여있었습니다.

우리가 대사하치기에서 전투를 할 때 내 주변에서는 아슬아슬한 정황이 조성되였습니다. 한무리의 적들이 나한테로 은밀히 접근하고있었던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전투를 지휘하느라고 그런 정황이 조성된줄도 모르고있었습니다.

그날 김정숙이 아니였더라면 큰일이 일어날번했습니다. 그는 몸으로 나를 막아서며 달려드는 적들을 모조리 쏴갈기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내가 산에서 여러해동안 입고다니던 솜외투도 실은 김정숙이 지어준것이였습니다. 그가 어디서 총알이 명주솜을 뚫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다음부터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명주솜을 모아두었다가 나에게 솜외투를 해주었습니다. 여러날을 두고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한뜸두뜸 정성스럽게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낸 외투가 내몸에 꼭 맞는것을 보자 그는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하였습니다.

나는 숙영지에서 밤을 새우거나 잠을 잘 때면 휴대하고 다니던 노루가죽을 땅바닥에 편 다음 그 솜외투를 덮군했는데 그러면 몸이 훈훈했습니다.

지금은 녀성들이 뜨개질을 별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계로 편직물을 짜내는 시대이니 그런 수고를 하려고 하지 않을것입니다. 나는 뜨개옷을 볼 때마다 김정숙을 생각하군합니다. 그가 나를 위해 뜨개질을 많이 했습니다. 작식일을 하느라면 일손도 딸리고 시간도 바쁘겠는데 시간을 어떻게 짜내고 털실을 어데서 구해오는지 알수 없었습니다. 하여튼 짬만 생기면 책을 읽든가 뜨개질을 하였습니다.

산에서 털실을 구한다는게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 그때는 바늘 한쌈을 얻자고 해도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김정숙은 적들과 싸우느라고 사철 밖에서 자고 먹고 행군하는 나를 걱정하여 솜외투도 지어주고 배띠개도 만들어주고 조국이 해방될 때까지 한해도 빠짐없이 털양말을 떠주었습니다.

그가 나를 위해 고생하는것이 미안해서 나는 언제인가 그에게 털실은 어데서 어떻게 구했는가고 물은적이 있습니다. 김정숙은 웃기만 할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숙이한테는 털양말이 있는가고 물었더니 그 말에도 역시 대답이 없었습니다. 내가 물러서지 않고 자꾸 캐여묻자 마지못해《장군님은 큰일을 하시는분이니 그런건 몰라도 됩니다.》하는 말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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