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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상봉이야기 5]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이 살고 있는 북부조국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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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1-07 20:0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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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북을 방문하여 헤어진 형님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이형식 재미동포의 가족상봉이야기를 소개한다. 필자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도움으로 70년 분단 조국의 저 편에서 월북한 형님의 유족을 눈물과 회한의 상봉을 하고 왔다고 한다. 필자는 북조선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미국의 <재미동포전국연합회>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무한한 감사를 올린다고 하면서 수십만 재미동포들중 나와 같은 처지에서 흩어진 가족, 친척을 북조선에서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용기와 신뢰를 가지고 <재미동포전국연합회>를 찾아주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의 가족상봉이야기를 연재로 소개한다.

 


 

[가족상봉이야기 5]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이 살고 있는 북부조국을 찾아서

 

이 형 식(재미동포)

 

 

재미동포의 한 사람인 나는 해방된 우리 조국이 둘로 갈라지던 비극의 시기에 '월북'의 추측을 낳고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근 70년간 이산가족으로 남았던 형님의 유족들을 조국의 저 편에서 기적처럼 찾았다. 우리 가족은 형님의 생사와 행방에 관해 근 70년간 암흑 속에 묻혀 있었으나 <재미동포전국연합>의 인도주의적 '이산가족찾기 및 상봉' 사업의 혜택을 받아 형님을 북조선에서 찾아보았다. 비록 찾고 있던 형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기적처럼 그의 유족들을 찾는 광명을 맛보게 되어, 나는 2015년 여름에 평양에 가서 생면부지의 그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만나본 조카들이 내게 가져다 준 형님의 ‘리력서’란 이름의 자서전을 통해 그의 월북경위를 포함한 전생애의 기록을 접하게 되었다. 열흘간으로 계획된 나의 평양방문에서는 조카들과의 상봉에 이어 많은 사적지들 및 기념물들과 문화적 유산들을 돌아보면서 다시 하나가 될 통일조국을 가슴으로 느끼는 꿈같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나와 같은 ‘이산가족’의 불행을 겪고 있을 많은 재미동포들에게 나의 이 체험을 소개함으로써 혹시 북조선에 있을지 모르는 이산가족, 특히 월북가족이나 친척들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가길 바라며, 통일조국을 희망하는 모든 동포들에게 하나 된 조국의 꿈을 더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쓴다.

 

5. 친족상봉의꿈을안고역사적인평양방문길에 오르다

 

작년 7월에 접어들어서 나는 드디어 생면부지의 조카일행을 만나러 평양방문길에 올랐다. 미국을 떠나 중국의 북경에서 하루를 호텔에서 묵은 후 북경에서 다시 평양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가는 곳도 난생 처음으로 가는 곳이요, 만나게 될 조카일행도 난생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미지에 대한 불안을 없애주는 것은 내가 갈 그 곳이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이 지구상의 어느 외진 나라가 아니라 단지 직접 가보지 못했을 뿐, 이미 그 곳은 나의 사랑하는 동포들이 살고 있는 내 조국의 일부라는 나의 인식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지난 40여년을 미국에서 사는 동안 각종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많은 북조선의 사진, 영상들과 뉴스, 방문기들로 부터 얻은 지식으로 하여 그 곳은 나의 마음속에 이미 낯설지 않은 여행의 행선지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평양행 여행길에 오른 나의 마음은 처음부터 내가 나의 조카일행을 만날 수 있고, 그리고 70년간 밟아보지 못한 나의 북부조국을 찾는다는 기쁨과 설렘으로 차 있을 뿐이었다.

 

북경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 나는 대합실에서 적지 않은 동포손님들을 스쳐 지나기도 하고, 그들 중 몇몇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평양과학기술대학에 적을 둔 재미동포 출신의 학자들도 있었고 인도적 지원사업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다는 재미동포 기독교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고국으로 들어가는 북조선 동포들도 있었다. 탑승시간이 다가오면서 점점 늘어난 손님들 중에는 유럽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오는듯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중 많은 중국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탑승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아무래도 고향사람 만난 듯이 얼른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재미동포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과 평양방문에 대한 이런 저런 사연들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미 평양을 방문한 경험을 가진 몇몇 사람들로부터 적지 않게 평양을 비롯해 북부조국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호텔이나 기타 방문지들에서 지켜야 할 예의나 자기들이 가 본 장소들에 대한 소감 등이 포함된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정해진 좌석에 몸을 앉히고 비로소 내가 평양이라는 내 북부 조국 땅을 밟게 된다는 꿈같은 현실에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비행기는 내 눈짐작에 약150명가량의 승객들로 차 있었다. 지난 시기에 말로만 듣고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고려민항> 여객기의 내부 모습과 승무원들의 모습이며 기내 음식등 무엇 하나 나의 호기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더불어 무엇 하나 뜨겁게 동포애를 샘솟게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스낵으로 나온 음식은 낯설지 않게 양식과 조선식으로 잘 조화된 간이식으로 맛이 있었고, 승무원들은 하나같이 친절한 미소에 아리땁고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스피커로 나오는 안내방송과 모니터에 비춰지는 영상들에선 나와 다른 평양색의 어감을 풍기는 말들과 모습들이 이채롭게 풍겨 나왔으나 매우 정다웠다. 이 때 나는 벌써 나의 첫 평양방문이 결코 낯선 외국의 여행이 아니라, 마치 내가 낳고 자란 남한의 조국 땅을 찾아가는 것과 다름없이 가슴 뜨거운 여행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처음 대하는 그들에게 이처럼 빨리 가깝게 동포애를 느끼게 된 것은 내가 그들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분단을 극복하고 다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간절한 조국통일의 명제가 나를 그들에게 같은 핏줄의 정으로 붙들어 매는 때문이었으리라.

 

 

새 세기에 맞게 웅비하는 북조선의 앞날을 예비하는 또 하나의 기념비적 건축물이며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들게 될 만년대계의 관문인 평양순안국제공항

 

 

평양에 도착하기 까지 약 1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내내, 나는 내가 다가가고 있는 북부 조국의 땅을 한 치라도 더 내려다 보려고 창문에서 눈을 멀리할 수 없었다. 비행기가 북경을 떠나 요동반도가 보이고 압록강 하류가 보이는 상공을 거치는 동안 나는 933년간 만주대륙에 웅거하며 중원을 압박하던 우리의 옛 조상들인 고구려와 발해인들의 기상을 머릿속에 떠 올렸다. 그들이 누렸던 이 찬란한 역사는 어디 두고 우리의 조국이 이젠 압록강 건너 저 작은 반도에 갇혀서, 그것도 둘로 쪼개진 채 서로 총부리를 맞대고 원수로 지내야 한단 말인가? 누가 우리 조국에게 이런 처참한 분단의 운명을 안겼던가? 나의 머리를 스쳐가는 이런 생각들은 그저 내 마음을 더 안타깝고 무거운 슬픔으로 몰아갈 뿐이었다. 푸르른 산야가 이어지다간 숨바꼭질하듯 가끔 나타나는 도시와 구릉지대에 아름답게 배열된 농촌마을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내려다보이는데, 어느 사이에 비행기는 사진으로만 보던 평양의 한 쪽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평야지대로 위치를 낮추고 있었다. 드디어 비행기는 예정된 시각에 <평양순안국제공항> 도착을 알렸고, 모든 승객들은 다른 나라들에서와 같은 절차의 입국수속을 마쳤다. 내가 통과한 공항청사는 약 한달 전에 준공되어 뉴스를 통해 본 새 청사로서, 그 규모나 모양이나 내부 시설과 기능의 모든 면에서 국제공항으로서의 면모를 훌륭히 갖추고 있었다. 그 안팎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은 아마도 다른 어떤 나라의 국제공항에 비교해도 자랑스러우리라고 생각되었고, 조선의 특이한 민족적 상징들을 담은 내부 장식들은 얼른 북조선이 간직한 자주정신과 민족적 긍지를 들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좀 아쉬운 점은, 청사의 규모에 비해 남한이나 다른 나라들처럼 많은 비행기가 보이지 않는 현실이었다. 외국과의 항공교통량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웅대하고 아름다운 이 새 청사가 암시하는 것은 그것이 새 세기에 맞게 웅비하는 북조선의 앞날을 예비하는 또 하나의 기념비적 건축물이며 앞으로 세상 사람들이 수없이 드나들게 될 만년대계의 관문이라고 생각되었다.

 

모든 입국절차를 마치고 두개의 가방으로 된 나의 화물을 찾아 출구를 향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안녕하십니까, 이형식 선생님이시지요?” 하며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나를 맞아 준 사람은 내가 그 후 열흘간 평양에 머무는 동안 계속 나를 안내해주었던 김수향 선생이었다. 나중에 그녀는 내게 “사진으로 본 얼굴보다도 더 잘 생기셨습니다.”라며 나를 올려 주었다. 그녀는 40대 후반의 <해동> 소속 간부로서 많은 해외동포들의 조국방문을 안내한 경험을 가진, 김일성대학 문학부 출신의 인텔리 여성이었다. 그녀의 말씨는 어법상 남한의 표준어와 그리 다름이 없는 평양식 ‘문화어’였고, 복장이나 몸단장 등이 조금도 남녘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그래서 내겐 첫 인사 때부터 그저 내가 내 고향 서울에 간 것과 마찬가지의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말씨로 말하자면, 김수향 선생만이 아니라 그 후에 만나보게 된 여러 사람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들을 수 있었던 평양에서의 모든 사람들의 말씨에서 나는 그 어떤 이질감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같은 조국, 같은 동포의 말이었고 단지 언어의 지방색이 서울 출신의 나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 뿐, 아마도 나와 그들 사이의 말씨 차이는 나와 경상도 사람들 사이의 말씨 차이보다도 훨씬 적었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느낌이었다. 김수향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공항청사를 나왔을 때는 역시 <해동>에서 준비한 승용차(머세이드 벤즈)가 운전기사 김인섭 선생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김선생은 내게 “조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첫 인사를 건넸다. 김선생 또한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이었는데, 서글서글하고 구릿빛 나는 얼굴에 진솔하고 겸손해 보이는 그의 첫 인상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두 사람과 나는 앞으로의 전 평양 체류기간 동안 함께 움직일 파트너들이 되어 저녁노을이 엷게 비치는 고속도로를 따라 평양시내로 들어갔다. 차들이 드물게 보이는 넓은 도로를 달리는 동안 차창 밖으로 멀찍이 보이는 좌우편의 농촌들은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것 보다도 더 자세한 모습들을 들어냈는데, 오래된 듯한 3층 구조의 집들이 질서 있게 겹겹이 줄지어 서 있고 봄경작으로 푸르른 논, 밭들이 간간이 나타나는 낮은 산들과 어울리며 평화로운 전경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저런 인사말과 나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등으로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에 우리가 탄 차는 어느새 평양시의 중심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공항을 출발한지 약 40분이 되었을 때 우리는 평양의 중심지역에 위치한 고려호텔에 도착하였음을 알았다. 오는 길에 눈에 띈 천리마 동상과 그 외 몇몇의 기념비적 건축물들은 내가 평소에 사진들을 통해 보아왔던 것들이라 즉시 알아차릴 수 있어서 매우 반가웠고, 그것은 나의 평양에서의 첫 시간을 포근한 느낌으로 채워주었다. 나의 평양체류를 위해 예약된 이 고려호텔은 평소에 뉴스를 통해 잘 보아 온 터이라 내가 마치 알고 찾아온 듯이 반가웠다. 윤기나는 화강석 바닥과 벽들이 샹들리에(Chandelier) 등불들과 잘 어울리면서 지나치게 현란함이 없이 아름다움과 무게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실내 분위기에 로비에서는 나와 똑같이 보이는 해외동포들이 많이 눈에 띄어 나는 금방 정이 들었다.

 

호텔에 입주하여 여장을 풀고 나서 나는 곧 안내원 김수향 선생의 주재 하에, 나와 조카 일행의 상봉을 담당해줄 <해동>의 책임자 윤정호선생과 같이 호텔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상의(북의 표현으론 ‘토의’)하였다. 이제 내가 왜 이 곳에 오게 되었나를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해진 일정표는 내가 앞으로 3일 간 같은 시내에 위치한 면회장소인 <모란봉면회자숙소>에서 하루에 한 차례씩 조카 일행과 상봉하고, 열흘 동안의 나머지 시간들에는 평양시와 인근의 여러 곳의 사적지, 문화시설, 기념관, 박물관등을 돌아보는 것들로 채워졌다. 이 자리에서 내가 한번 놀란 것은 윤정호 선생으로 부터 내가 만나게 될 조카일행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인적사항을 듣게 된 때였다. 이 시각까지 나는 ‘리민성 외 두 사람’이란 것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궁금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상봉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윤정호선생은 나를 만날 사람들이 조카들 3형제(민성, 주성, 건성)라는 것과, 거기에 더해서 그들로 부터 들었다는, 돌아가신 나의 네 삼촌들과 48년생인 내 남동생의 이름까지 내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내가 이들의 이름들을 나의 <흩어진가족 찾기 신청서>에 기재한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모든 인정사항이 민성 형제들에게서 나왔으니 이야말로 내가 만날 대상들에 대한 그 어떤 의구심과 염려도 깨끗이 씻어버리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또 하나 분명해진 것은 나의 형님이 집을 떠나 북조선으로 가게 된 것이 내 남동생이 낳은 1948년 여름보다는 그 이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왜, 어떻게 해서 나의 형님이 이산가족이 되었나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으로 한 발짝 다가간 이 때의 흥분을 지금도 나는 잊을 수 없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01-07 20:07:29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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