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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상봉이야기1] 나는 어떻게 이산가족이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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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1-03 01:2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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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여름 북을 방문하여 헤어진 형님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이형식 재미동포의 가족상봉이야기를 소개한다. 필자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의 도움으로 70년 분단 조국의 저 편에서 월북한 형님의 유족을 눈물과 회한의 상봉을 하고 왔다고 한다. 필자는 북조선의 <해외동포원호위원회>와 미국의 <재미동포전국연합회>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무한한 감사를 올린다고 하면서 수십만 재미동포들중 나와 같은 처지에서 흩어진 가족, 친척을 북조선에서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용기와 신뢰를 가지고 <재미동포전국연합회>를 찾아주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고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의 가족상봉이야기를 연재로 소개한다.

 


 

[가족상봉이야기1]

 

 나는 어떻게 이산가족이 되었는가?

 

 

이 형 식(재미동포)

 

 

     재미동포의 한 사람인 나는 해방된 우리 조국이 둘로 갈라지던 비극의 시기에 '월북'의 추측을 낳고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 근 70년간 이산가족으로 남았던 형님의 유족들을 조국의 저 편에서 기적처럼 찾았다. 우리 가족은 형님의 생사와 행방에 관해 근 70년간 암흑 속에 묻혀 있었으나 <재미동포전국연합>의 인도주의적 '이산가족찾기 및 상봉' 사업의 혜택을 받아 형님을 북조선에서 찾아보았다. 비록 찾고 있던 형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기적처럼 그의 유족들을 찾는 광명을 맛보게 되어, 나는 2015년 여름에 평양에 가서 생면부지의 그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만나본 조카들이 내게 가져다 준 형님의 ‘리력서’란 이름의 자서전을 통해 그의 월북경위를 포함한 전생애의 기록을 접하게 되었다. 열흘간으로 계획된 나의 평양방문에서는 조카들과의 상봉에 이어 많은 사적지들 및 기념물들과 문화적 유산들을 돌아보면서 다시 하나가 될 통일조국을 가슴으로 느끼는 꿈같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나와 같은 ‘이산가족’의 불행을 겪고 있을 많은 재미동포들에게 나의 이 체험을 소개함으로써 혹시 북조선에 있을지 모르는 이산가족, 특히 월북가족이나 친척들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가길 바라며, 통일조국을 희망하는 모든 동포들에게 하나 된 조국의 꿈을 더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쓴다.

 

1.   조국의 분단과 가족이산의 비극

 

     나는 해방둥이로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대학과 군복무를 마친 후 197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껏 연구과학자로서 살아온 재미동포의 한 사람이다. 내게 있는 누님과 남동생도 그 후에 모두 미국으로 이민와서 어언 3-40년경을 각각 다른 주에서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다. 우리 남매들이 미국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들은 조국을 지키고 서울에서 사시다가 별세하신지 수십 년이 되었다. 나와 누님은 우리 조국이 일제의 식민통치에서 해방을 맞은 시각보다도 일찍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당시 우리의 조국은 아직 분단되지 않았고 국명도 공식으로 정해지지 않은, 옛 이름으로 조선이라고 불린 하나의 나라였다. 그리고 나의 남동생은 우리의 조국이 남녘의 대한민국 (‘남한’)과 북녘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북조선’) 으로 분리 독립한 직후 1948년 후반에 남녘에서 태어났으니, 출생지로만 말한다면 그에겐 조국이 단지 남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남매들 모두에게 진정한 의미의 조국이란 역사적, 민족적, 문화적 공동체의 의미로 볼 때 남한과 북조선이 따로 없이 코리아반도 전체가 하나 된 나라, 옛 조선이다. 단군을 개국의 시조로 하여 수수천년 한 땅에서 역사적 운명공동체로 함께 살아온 우리 배달민족 누구에게나 외세의 강요로 태동된 두 개의 코리아반도 국가의 어느 한 쪽만을 나의 유일한 ‘조국’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 글에서 앞으로 ‘조국’을 말할 때는 당연히 남한과 북조선이 따로 없는 하나의 국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단이전의 국가이며 앞으로 통일이 되어 다시 하나가 될 국가이다. 그것은 지금 정해진 이름도 없고 실체도 없으나 나와 남, 북의 우리 겨레가 다 같이 염원하고 지향하는 조국통일에 대한 궁극의 표상이다. 만약에 내가 태어난 고향이며 국적을 가졌던 남한만이 나의 조국이라면 내가 어찌 옛 고구려를 우리나라라고 부를 수 있겠으며, 반만년 전에 북녘 땅에서 기원했던 단군조선을 어찌 우리의 시조국가라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의 진정한 조국은 내가 낳고 자라고 국민으로 속했던 남한만이 아니라 오직 남북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되고 영원히 내 영혼의 고향이 될 그런 ‘하나된 조국’인 것이다.

 

 

나의 진정한 조국은 내가 낳고 자라고 국민으로 속했던 남한만이 아니라 오직 남북이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되고 영원히 내 영혼의 고향이 될 그런 ‘하나된 조국’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가족사에는 우리의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1945년부터 1950-3년의 6.25동란까지의 기간에 발생한 ‘1000만 이산가족’이라는 민족적 대참극의 한 자락이 아물 수 없는 상처로 드리워져 있다. 왜냐하면, 내가 위에서 말하지 않은 한 가족인, 나보다 20세 위인 형님이 해방이후 조국분단시기에 행방불명으로 사라졌고, 그래서 지난 약 66-7년간을 우리 가족 모두가 이산가족의 한을 안고 살아온 때문이다. 뒤에 좀 더 말하겠지만, 없어진 나의 형님은 아마도 동란이 일기 1년 전쯤에 북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하는 데에 우리 부모님의 추측이 기울어 있었을 뿐 정확한 연유나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추측이 된 이유는 해방 후 조국의 정국이 극도로 어지러울 때 나의 형님이 언젠가 ‘좌익 활동’의 혐의로 서울의 형사들에게 쫒긴 적이 있었다는 것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우리 부모님들이 기약없이 그들의 슬하를 벗어나 종적없이 사라져버린 그 아들이 언제나 돌아올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시면서 기도와 눈물로 나날을 보내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내가 오직 5살, 온 가족이 6.25동란으로 고향인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충북지방에 피난했을 때, 그 어려운 피난생활 속에서도 초가집 단칸 셋방을 촛불로 밝히며 늦은 밤이나 새벽이나 정화수를 떠 놓고 형님의 무사귀환을 위해 기도하시던 내 부모님의 모습은 이제 칠순을 넘긴 나의 마음에 아직도 부모님에 대한 가장 큰 사랑과 연민의 씨로 남아 있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 가족이 전후에 수복된 서울로 귀환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아들 생각이 간절하여, 절을 찾아가서 불공을 드리기를 평생 하셨고, 그렇게 하시기를 1980년대에 돌아가실 때까지 그치지 않으셨다. 사실 나의 어머니는 형님에겐 계모로서, 형님이 불과 3살 때 그를 낳은 친어머니가 병사하신 때문에 나의 아버지와 처녀 결혼하여 그를 친아들처럼 보살피고 기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어머니가 그토록 사무치게 형님을 그리워하신 것은 참으로 천성적으로 지극한 그의 사랑이 아니면 가히 생각키 힘든 일이다. 그러나 이제, 그토록 평생 아들을 그리며 한을 안고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부모님들, 그들의 한을 나의 대에서라도 풀 수 없을까하는 희망을 나는 언제나 간직하고 살아왔다. 그들의 한은 곧 나의 한이고 우리 남매들이 함께 간직해온 한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 가족만의 얘기가 아니라 남북으로 갈린 우리 조국의 모든 이산가족들이 겪어온 슬픈 사연일 수 밖에 없다.

 

     나의 형님(이규식)은 1925년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물론 나는 우리 가족의 호적상의 기록과 자라면서 부모님께 들은 것들을 기억의 단초로 할 뿐, 그를 직접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그가 집을 떠났다고 생각되는 1948-49년경에 나는 불과 3-4세의 어린 아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나보다 다섯 살 위였던 누님은 그래도 뚜렷한 기억으로 자기를 귀여워해 주고 사랑해주던 오빠를 생각하고 있다. 나보다도 세 살 아래인 남동생은 그저 덤덤히 우리 가정의 분위기를 느꼈을 뿐 무슨 이산가족의 애틋한 감정이 있었겠는가? 형님이 집을 나가고 소식이 끊긴지 얼마 후부터 무슨 영문인지 우리 집에 형사들이 찾아와서 형님의 행처를 대라며 우리 부모를 괴롭히고 심지어는 자주 파출소로 끌어다가 협박과 고문을 가하면서 수년간을 수시로 못살게 굴었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의 조국은 남북으로 체제가 갈리는 역사의 갈림길에 처했고, 좌와 우의 사상적 대립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으로 북으로 흩어지던 혼돈의 상황에서 반드시 부모라고 하여 성년이 된 자식의 행방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남한의 정부를 통해서 우리 형님의 행방을 알아보려는 우리 부모의 적극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단서를 정부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단지 어떤 좌익계인사가 연루된 정치적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혹시 나의 형님이 그 사건의 인물과 관계되었는가를 조사하기 위해 형사들이 그를 추적했던 기록만이 있을 뿐 어떠한 사법상의 혐의도 기록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우리 부모님과 가족은 그 후 아무런 정부의 감시나 핍박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전후 수십 년을 남한에서 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남한에서는 월북자의 가족들에게는 공식적인 연좌제가 적용되어 남은 가족들의 시민적 권리와 사회생활에 막대한 제약을 가했다. 그 뿐인가? 지금 이 시각까지도 멀쩡한 사람도 그의 언행에서 한가지라로 북조선의 주의, 주장과 닮았다는 혐의만 씌울 수 있다면 그는 ‘종북’의 누명을 쓰고 핍박을 받거나 입건되는 실정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남한 출신의 거의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어떤 처지에서도 가족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행여나 월북했을지 모른다는 의문스러운 가정조차도 내놓고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 지금 까지도 굳혀져 온 비극적 현실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현상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이 미국 땅에 와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사이에서도 결코 피할 수 없는 불문율로 되어 있다. 이 얼마나 비인도적인이고 부자유한 분단조국의 비극인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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