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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의 힘〉애족애국의 한길을 걸었던 《권도》의 창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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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4-12-06 08:1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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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의 힘〉애족애국의 한길을 걸었던 《권도》의 창시자 

 

진정한 무도를 통해 관철한 일편단심

 

《총련조직을 굳건히 지키고 그 강화발전을 위해 몸바쳐 투쟁해온 애국투사이며 권위있고 명망높은 무술가》- 2013년 1월 《조선신보》에 실린 강창수선생의 부고의 한구절이다.

 

부고가 실리기 전까지는 총련의 기관지에서 그의 이름이나 활동소식을 거의나 찾아볼수 없다. 그러나 총련의 수많은 일군, 동포들이 수령의 사상과 령도를 받들고 애족애국의 한길을 걸었던 동포무도가에 대하여 잘 알고있었다.

 

소문난 《평양태생의 무쇠주먹》

일제식민지시기에 평양에서 태여난 강창수선생은 어린시절부터 외삼촌에게서 무술을 배웠다.  3.1인민봉기에 참가하여 헌병의 흉탄에 맞아 쓰러진 부친이 세상을 떠난것은 그가 7살때였다.

 

 


강창수선생

 

14살때 일본으로 건너왔다. 교또에서 고학을 할 때 가라데(空手)를 만났다. 교또대학 법학부에 합격하는 한편 가라데에서 사범의 자격을 얻었다. 무도의 길에 들어선 젊은이는 그 이후도 멈춰서지 않고 산속에 틀어박혀 남다른 수행에 매진하였다. 가라데의 달인으로서 전인미답의 경지를 계속 걸어가는 그의 무쇠주먹에 대한 소문은 날이 갈수록 각지로 퍼져갔다.

 

일본사람들과 같은 도장에서 땀을 흘려도 그의 마음속에는 민족의 존엄을 지켜나갈 의지가 간직되여있었다. 京都大学재학중에 민족적차별과 박해를 일삼는 우익패거리들로부터 동포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류학생구원대》를 뭇고 활동하였다. 폭력에 맞서 싸우니 경찰에 체포되여 감옥에 갇히우기도 했으나 학생운동의 지휘자로서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그러던 중에 김일성장군의 항일무장투쟁소식을 들었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그는 조선의 전설적영웅이 계시는 백두산을 찾아가리라 결심하고 下関행 렬차를 탔다. 그런데 도중에서 경찰에 체포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 당한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그의 한쪽 귀는 평생 소리가 잘 안들렸다.

 

 


그는 오랜 수련을 통해 자신의 가라데를 련마하였다.

 

조국해방후 그는 야마나시로 거처를 옮겼다. 가라데도장을 운영하면서 그곳 동포상공인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폭력과 맞서 싸우기도 하였다. 그렇게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방문객이 있었다. 《총련에서 왔다.》고 자기를 소개한 방문객은 《평양태생의 무쇠주먹》과 허심탄회하게 말을 나누고싶다고 하였다. 거절할 리유는 없었다. 마주앉은 두 사람의 화제는 다양했다. 우리가 모신 수령의 위대성에 대하여, 사회주의조국의 위상과 해외공민단체인 총련의 존엄에 대하여, 애족애국운동의 발전과 그를 위한 후대육성의 필요성에 대하여… 마음이 통하는 사나이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얼마 안있어 맞이하게 될 대사변도 화제가 되였다. 《김일성원수께서 재일동포들을 위해 귀국의 배길을 열어주시였다.》 그 말을 들으니 높뛰는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였다. 동포무도가는 니이가다행을 결심하였다.

 

무엇을 위해 이 주먹을 쓰는가

사회주의조국에로의 귀국은 민족차별과 불안한 생활환경에 대한 반감, 조국의 부강발전에 이바지하려는 열망 등 재일동포들이 놓인 처지로부터 나온 그들자신의 요구였다. 당시 귀국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지지여론이 고조되는 한편 일본과 한국, 미국의 방해책동도 악랄하게 감행되였다.

 

동포들이 조국으로 가는 길은 내외반동들과의 치렬한 투쟁을 동반하였다.

 

첫 귀국선은 1959년 12월 11일 니이가다항에 입항하고 14일 조국으로 향하였다. 배를 타고 조국의 대표단도 니이가다에 왔다. 당시 《조선민보》(《조선신보》의 전신)는 그 나흘간의 광경을 《감격, 환희, 흥분의 도가니》라고 전했다. 신문에는 공화국기를 흔드는 동포군중의 한가운데서 마이크를 들고있는 총련중앙 한덕수의장의 모습이 실려있다. 의장의 신변안전을 위해 호위를 맡아나선것은 무쇠주먹의 소유자인 강창수선생이였다.

 

 


제1차 귀국선이 들어온 니이가다항에서 한덕수의장의 호위를 맡아하였다. 

(의장의 오른쪽 뒤쪽에서 검은색 목도리를 두른 인물이 강창수선생)

 

야마나시에 있을 때 류파를 초월한 가라데의 련합조직을 뭇기 위해 동분서주한 강창수선생은 1960년대 도꾜로 거처를 옮긴 후 10단사범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는 오랜 수련을 통해 련마한 자신의 가라데를 《권도(拳道)》라고 명명하였다. 류파에 구애됨이 없이 진정한 무도, 진짜배기 가라데를 추구한다는 일념으로 이름을 지었다. 선생이 바랬던 도장이 마련된것은 1968년이다.

 

강창수선생의 곁에서 권도의 지도를 받은 현재 80대의 제자는 《선생이 추구하신 무도의 근저에는 조국애, 민족애가 있다.》고 말한다. 60대의 제자는 《우리가 배운것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권(殺人拳)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활인권(活人拳)》이라며 《주먹에 힘이 담길 때 철권(鉄拳)이 되고 철권에 마음이 깃들 때 진짜배기가 된다는 신념, 선생께서는 그것을 관철하시였다.》고 추억한다.

 

이 주먹을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써야 하는가–자문자답을 거듭하여 자신의 마음을 수련할것을 스승은 제자들에게 요구하였다고 한다.

 

전후 일본의 복잡다단한 사회환경, 《힘》이 지배하고 《힘》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세계에서도 강창수선생은 명망이 높았다. 제노라 하던 가라데와 프로레스링의 강자들과 친분이 깊었다. 그들속엔 조선사람이 더러 있었다. 일본의 우익인사들과도 인연이 있었다. 무도의 문외한들인데도 그들은 권도의 창시자를 《선생》이라 불렀다.

 

평생동안 마음의 수련을 중단하지 않았던 강창수선생이 가장 힘을 기울인것은 심신단련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하는 인재를 키우는 일이였다. 사람을 살린다는 활인권의 사상을 자신의 사업과 생활에서 실천한것이다.

 

 


강창수선생은 수령의 사상과 령도를 받들고 애족애국의 한길을 걸었다.

 

1970년대부터 조선학교에서 배우는 학생들이 강창수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훈련하였다. 도장에서 땀을 흘린 학생들이 받은 인상은 《자애로운 선생》이였다고 한다. 교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보게 된 학생들이 다가가서 인사를 할 때면 그가 걸으면서 응하는 일은 없었다. 반드시 멈춰서서 발끝을 맞추어 허리를 깊이 굽히며 학생들에게 답례하였다.

 

조선학교 녀학생들이 입은 치마저고리가 칼로 찢기는 사건이 일어났을 땐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가 차올랐다. 한 제자에 의하면 《그때 선생이 어느 우익의 거물에게 돌연히 전화를 걸었는데 〈우리 학생들을 괴롭히는 만행은 절대로 용납할수 없다.〉고 벼락을 내리치며 상대의 변명도 아랑곳없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였다.》고 한다.

 

한편 한평생 후대육성에 정열을 기울이면서도 《선생은 조국에 대하여, 조직에 대하여 우리들에게 이래라 저래라고 말로 교양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1980년대 일본을 방문한 조국의 대표단의 호위를 맡은 한 제자가 자기 역할을 마무리하고 도장에 돌아오니 강창수선생이 《동무는 이번 사업을 맡아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고 물었다. 제자가 《나는 더 강한 사람이 되고싶다.》고 답하더니 스승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로 그렇다. 아무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해야 된다. 동무가 강해진다는것은 바로 우리 수령, 우리 조국의 권위를 높이고 지키는것으로 된다.》

 

제자들에 의하면 강창수선생은 조국대표단이 일본을 방문하거나 총련의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이 조국을 방문할 때면 반드시 비행장으로 나가서 환영, 환송대렬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았다. 《첫 귀국선이 들어올 때 니이기다로 향한 선생의 그 마음은 평생 변함이 없었다.》고 한 제자는 말한다.

 

강창수선생에게 있어서 조국왕래를 지켜보는것, 그 길을 보장하는것은 그 무슨 업무가 아니였다. 그것은 곧 수령과 조국의 권위를 지키려는 충심의 표출이였다.

 

수령의 령도를 충심으로 받들어

강창수선생이 처음으로 조국을 방문한것은 1978년이다. 그토록 뵙고싶던 김일성주석님의 접견을 받았을 때 나이는 60대중반에 이르고있었다.

 

주석님께서는 강창수선생을 접견하신 석상에서 그의 이름을 친근히 부르시며 나는 오래전부터 동지에 대하여 잘 안다고 하시였다.

 

강창수선생은 《사람들앞에서 조국방문의 나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국에서의 감동과 환희, 새로 다진 결의는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것이다. 그런데 가장 오랜 제자는 스승과 둘이서만 있을 때 《마음속 고백》을 듣는 기회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제자가 들은것은 이런 독백이다.

 

《수령님께서 부르신다면 나는 언제든 달려나간다. 동무는 어떻게 할건가.》

 

 


올해 6월 강창수선생의 생탄 111돐에 즈음하여 제자들이 제작한 기념품. 

사진에 새겨진 글발은 조국의 노래 《수령님 바라시는 오직 한길에》의 가사이다. 선생의 애창곡이였다고 한다.

 

수령에 대한 충정의 마음을 부단히 키웠던 무쇠주먹의 소유자는 자신의 사명과 역할에 끝까지 충실하였다. 강창수선생과 친분을 맺은 연고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음가짐을 중시하는 선생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탁월했고 자기가 믿은 사람에게서 신임을 받을 때면 〈알았습니다.〉고 한마디 대답하고 묵묵히 자기의 본분을 다했다.》고 한다.

 

총련중앙 의장과의 관계는 각별하였다. 위대한 수령을 받들어 모시는 충신으로서 동지적뉴대를 서로 깊였다.

 

말년에 운신이 어려웠던 한덕수의장이 자택에서 전화를 걸어 지금부터 총련중앙회관으로 갈테니  강창수선생도 회관에 불러들이라고 한 일이 있었다. 주변의 일군들은 영문을 몰랐는데 의장의 바램은 오랜 동지와 함께 회관에서 기념사진을 찍는것이였다.

 

한덕수의장이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달된 곳은 도장이였다. 강창수선생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충동은 그대로 의장에 대한 즉흥적인 추도사가 되였다.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도장에서 훈련을 하던 제자들이 동지를 잃은 그의 절절한 목소리를 들었다.

 

한덕수의장은 세상을 떠난 후 평양 신미리에 있는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였다. 그후 강창수선생이 세상을 따나고 총련중앙회관에서 추도식이 거행되였다. 그도 의장과 마찬가지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였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글발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의 공적을 잘 아는 후대들이 있다. 스승의 슬하에서 권도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만이 아니다. 학생시절에 《자애로운 선생》을 만나 귀중한것들을 배워 동포사회에서 자기 본분을 다한 총련의 일군, 애국적상공인들이 수없이 많다.

 

총련과 더불어 신념의 한길을 걸었던 희세의 무도가. 후대들의 마음속에 그는 영원히 변치 않는 애국1세의 모습으로 간직되고있다.

 

(김지영기자)

 

2024.12.06

[조선신보]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24-12-06 08:17:44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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