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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보] 〈총련의 힘〉JR정기권차별시정을 위한 7년간의 대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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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4-04-04 08:3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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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련의 힘〉JR정기권차별시정을 위한 7년간의 대중운동




1994년 2월 21일 JR동일본 본사에서 조선학교 학생들의 통학정기권을 《1조교》와 같은 료금으로 할데 대한 설명을 듣는 어머니들


《아이들을 지키는 방패가 되자》, 떨쳐일어난 어머니들

1994년 2월 21일 일본 JR 각사는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통학정기권차별을 시정할데 대한 결정을 밝혔다. 그날 JR동일본 본사에서 열린 설명회에 각 학교 어머니회 대표들과 함께 참가한  리조씨(78살)는 자기가 쓴 편지가 시초가 된 차별시정운동은 《어느 특정한 인물들에 의한 운동이 아니였다.》고 말한다. 아이들을 지키는 일념으로 끈질기게 이어온 7년간의 운동에는 언론보도에 등장하지 않았던 숨은 공로자들의 헌신의 자취가 어리여있다.

《힘들어도 우리가 한번 도전해보자》

1968년 日本国有鉄道(国鉄)는 《가계부담의 경감》을 목적으로 학생들의 교통료금을 할인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조선학교는 일본의 《학교교육법》이 정한 《1조교》가 아니라는 리유로 여기서 배제되였다. 통학정기권의 료금은 이 제도에 따라 어른이 100%라면 고등학교는 그 10%, 중학교는 20%, 소학교는 65% 할인되였는데 조선학교 학생들은 12살미만이  50% 할인, 12살이상은 어른과 같은 료금이 적용되였다.

1987년 당시 지바초중 어머니회 부회장을 하던 리조씨가 차별시정의 편지를 쓰게 된 계기는 그해  4월 国鉄의 분할민영화에 의한 JR의 발족이였다. 《국가를 상대로 싸우기는 어려워도 민간회사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가.》라는 기대를 안고  JR동일본 본사앞으로 편지를 부쳤다. 그런데 《1조교가 아닌 각종학교인 조선학교는 할인대상이 아니다.》는 차가운 답변이 돌아왔다.

편지를 부친것은 리조씨가 독단으로 한 일이였는데 답변의 내용은 어머니회 역원들에게 알렸다.

《회의에서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더니 다른 역원들은 <역시 그랬군.> 하고 흘려듣는데 우리 회장은 아니였어요.》

당시 어머니회 회장을 하던 리묘순씨는 리조씨보다 나이가 많았다. 어린 시절 고베 니까다에서 살다가  4.24교육투쟁을 현장에서 체험한 세대였다.

《무슨 일이든 안된다고 체념하지 않았고 자기 결심은 싸워서라도 관철시키는 그런 기질이 있었지요.  그때 리묘순회장이 이건 엄연한 차별인데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된다며 우리 보고 말했어요. 〈힘들어도 우리가 한번 도전해보자.〉 그의 한마디가 출발점이였습니다.》

그때까지 학교미화사업이나 교육환경정비를 위한 벨마크모으기에 힘을 쓰던 지바의 어머니회 성원들이 통학정기권차별시정을 위해 용약 떨쳐일어난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였다.》고 리조씨는 말한다. 《어머니가 아이를 지키는 방패가 되여 차별에 맞서 싸운다.》는 각오다짐이 원동력이였다고 한다.

지바초중 어머니회 성원들은 교원과 함께 학교가 위치하는 게미가와의 JR역을 찾아가 역장에게 차별시정을 요청하였다. 역장은 정기권료금에 격차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규칙이니 어쩔수 없다고 하였다. 쯔다누마, 후나바시 등 지바현하의 JR역들을 찾아갔으나 반응은 같았다. 리조씨에 의하면 《당초의 열의가 점차 식어져 사라질 번했다.》고 한다.

어머니회대표들이 JR동일본의 본사를 찾아 요청활동을 진행하였다.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파된 열의

그런데 아이들을 위하는 어머니들의 열의는 지역의 경계를 넘어 전파되였다.

지바현하의 JR역들을 찾아가 조선학교 학생들의 통학정기권차별의 시정을 요청한 어머니들의 활동소식이 아사히신붕의 가나가와판에 실렸다.

《오다와라에 사는 학부모가 신문을 보고 알려주었어요. 요꼬하마초급에 다니는 자기 아이도 오다와라-요꼬하마사이의 통학길에 부당한 료금이 적용되고있다며 화를 참지 못한 모습이였습니다. 》

당시 녀성동맹 가나가와현본부에서 사업하던 이전 일군에 의하면 《어머니들은 그 소식을 순식간에 공유하고 차별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장악하는 활동을 당장 시작하였다.》고 한다.

요꼬하마초급에 아이를 보내는 어머니들이 가나가와현하의 JR역들을 찾아가 정기권료금의 차액을 조사하였다.  JR역들에는 소, 중, 고, 대학에 해당되는 할인된 정기권료금의 게시판이 걸려있었는데 어머니들의 활동이 알려지면서 게시판은 철거되였다. 그러나 조사된 자료는 통학구간에 따르는 차액의 일람표로 정리되여 각 방면에 배포되였다.

차별의 현실이 가시화되여 그것이 널리 번져갔다. 일본각지 조선학교가 있는곳에서 어머니들이 떨쳐일어났다. 그때까지 자기 아이가 쓰는 정기권에 《学割》의 표식이 없는 리유를 몰랐던 어머니들이 차별의 실태를 스스로 조사하고 항의의 목소리를 올렸다.

어머니들이 운동을 일으킨 초기에는 JR에 차별시정을 요청하면 직원들이 관할성청인 운수성(당시)을 찾아가라고 책임을 회피하군 하였다. 운수성을 찾아가니 정기권료금의 격차는 《학교교육법》에 따른것이니 문부성(당시)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문부성은 교통료금은 운수성의 괄할이라고 발뺌하였다.

어머니들은 굴함없이 일본사회를 향해 차별시정을 호소하였다. 가나가와에서는 1989년에 현지사와 면담이 이루어지고 어머니들의 목소리가 현의회에도 반영되게 되였다. 다른 지방에서도 시민단체들과 련대하여 지방자치체들과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국회의원들이 운동에 합세하였고 JR의 로조도 어머니들의 요구를 지지해나섰다.

당시의 지지여론은 돌연히 만들어진것이 아니였다. 총련은 8천여명 학생들이 출연한 대집단체조 《조국에 드리는 노래》의 상연(1965년) 등을 통해 민족교육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내외에 알리며 일본의 《외국인학교법안》의 성립을 저지시키는 등 민족교육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활동을 전조직적, 전동포적인 운동으로 벌려왔다.

어머니회대표들이 JR서일본의 본사를 찾아 요청활동을 진행하였다.

민족사랑, 후대사랑의 계보는 이어졌다. 각지에서 활동하는 어머니들의 열성이 련쇄반응을 일으켜 통학정기권료금의 부당한 격차에 대한 사회적관심이 높아가는 가운데 90년대 들어 차별시정요구의 화살은 다시 JR에 집중되게 되였다. 당시 녀성동맹중앙에서 사업하던 이전 일군에 의하면 《녀성동맹도꾜가 여기서 중심적인 역할을 놀았다.》고 한다. 도꾜에 있는 JR동일본의 본사를 직접 찾아가 요청행동을 벌렸다. 문전축객을 당해도 다시 찾아갔다. 차별시정을 요구하는 서명운동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서명운동은 일본각지에서 벌어져 간사이지방에서는 JR서일본 본사에 대한 요청활동도 진행되였다.

감사의 꽃다발을 받아야 할 공로자들

차별시정을 요구하는 운동의 주력은 아이를 키우는 젊은 어머니들이였다.

총련결성후 조선학교에서 배운 우리는 투쟁으로 권리를 쟁취한 경험이 없었는데 운동을 통해 시야가 넓어졌다, 재일조선인들이 직면하는 현실을 알고 배우며 과감하게 행동하는 중요성을 깨달았다… 당시 요청행동의 현장에서 《조선신보》기자의 취재에 응한 어머니들은 높뛰는 자기 심정을 토로했었다.


일본각지에서 조선학교 학생들의 통학정기권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운동에 참가한것은 어머니뿐만이 아니였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 조부모들 그리고 정기권차별의 당사자가 아닌 각계층 동포들도 서명용지를 들고 역전에 서서 길가는 사람들에게 차별시정을 호소하였다.

도꾜의 어느 녀성동맹지부 고문은 언제 어디서나 서명을 받아냈다. 열정이 너무 넘치는 나머지 전차칸에서 만난 승객들에게서 서명을 받으려고 하다가 역의 직원에게서 엄중주의를 받은적도 있었다.

당시 중앙교육회에서 사업하던 일군이 생전에 이 고문에 관한 숨은 일화를 운동의 관계자에게 이야기한바 있는데 내용인즉 이렇다.

1994년 겨울의 어느날 고문이 집 근처의 공원에서 서명을 받고있었는데 길가다가 그의 모습을 여러번 본적이 있는 《초로의 신사》가 말을 건네왔다.

《할머니, 그건 무슨 서명입니까.》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통학정기권차별의 시정을 요구하는 서명입니다.》

《손자가 조선학교를 다니는군요.》

《아니요. 내 손자는 이미 졸업했는데 조선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모두 사랑스러운 나의 손자이니까요.》

고문의 말을 듣고 충격과 감동이 뒤섞인 표정을 지은 신사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신사가 JR동일본 본사의 최고위층 간부라는 사실이 알려진것은 후날의 일이였다…

지바에서 일으킨 불씨가 가나가와로 그리고 일본각지로 번졌다. 한곳에서 운동의 불길이 약해질번 하면 다른 곳에서 바람을 불어넣고 화력을 더해갔다. 각지의 학교 어머니회는 구성원들의 대가 바뀌여도 《차별반대!》의 구호를 부르며 아이들을 위한 운동의 바통을 이어갔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모은 서명은 60만필이상에 달하였다.

1994년 2월 21일 国鉄시대를 포함하여 26년만에 조선학교 학생들의 통학정기권차별이 해소되는것을 확인하는 날, 설명회에 참가하기 위해 JR동일본 본사를 찾은 어머니회 대표들을 회사측은 정중히 맞이하였다. 이해 4월부터 조선학교 학생들의 통학정기권을 《1조교》와 같은 료금으로 한다는것이 발표된 순간 회견장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JR관계자는 부당한 차별을 시정하는 동기를 안겨준 어머니들에게 《그동안 고맙습니다.》고 하면서 머리를 숙였다.

설명회에 참가한 대표들은 그 길로 총련중앙회관을 방문하였다. 대표들을 맞이한 리진규 제1부의장은 오늘의 성과는 당연히 어머니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그동안의 로고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사전에 준비된 2개의 꽃다발이 증정되였다. JR요청에서 중심역할을 놀았던 녀성동맹 도꾜도본부의 위원장과 한통의 편지로 운동의 시초를 열어놓은 리조씨가 대표자로서 받았다. 따뜻한 박수소리가 올랐다. 리조씨는 4.24교육투쟁을 체험한 어머니회 회장의 《그 한마디》가 생각났다. 그자리에 있는 모두가 감사의 꽃다발을 함께 받아야 할 수많은 공로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고있었다.

(김지영기자)

[출처 조선신보]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24-04-04 08:38:40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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