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로 지울수 없는 피비린 죄악의 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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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22-11-08 10:17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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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지울수 없는 피비린 죄악의 력사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9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민족적존엄과 정의를 지켜싸운 조선의 청년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일제의 만행을 우리 인민은 잊지 않고있다.
1929년 10월 30일 아침 광주와 라주사이의 렬차안에서 일본인학생불량배가 조선녀학생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선녀학생에 대한 민족적모욕에 격분한 조선청년학생들은 일본인학생불량배에게 응당한 징벌을 가하였다.그러나 일제경찰들은 구체적인 내용은 알아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조선청년학생들만 마구 구타하였다.일제의 어용신문들도 사건의 책임을 조선청년학생들에게 넘겨씌우고 진상을 외곡하여 보도하였다.
일제의 파렴치한 처사는 조선청년학생들의 격분을 자아냈으며 반일기운은 고조되였다.당황망조한 일제는 11월 1일 300여명의 일본인학생들과 교직원들을 무장시켜 시위투쟁을 위해 광주역전에 모여있던 조선청년학생들을 습격하게 하였다.
이것은 조선청년학생들의 반일감정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11월 3일 광주시내의 조선청년학생들은 일제히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거리로 달려나가 《일제를 타도하자!》,《식민지노예교육제도를 철페하라!》는 구호를 웨치며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에로 넘어갔다.
일제는 광주일대에 계엄상태를 선포하고 경찰은 물론 일본인학생들과 교직원 등 민간인들에게까지 무기를 주어 시내의 요소요소에 배치하고 조선청년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체포구금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야수적인 탄압만행은 수많은 조선청년학생들의 분격을 자아냈으며 광주학생사건을 발단으로 한 조선청년학생들의 반일투쟁은 그해 12월부터 전국적범위에로 급속히 퍼져갔다.
조선청년학생들의 반일투쟁을 탄압하기 위한 일제의 발악은 극도에 달하였다.일제는 전국적으로 경계망을 강화하고 경찰들과 함께 군대들까지 동원하여 조선청년학생들을 야수적으로 탄압하였다.
1930년 1월 일제는 경성에서의 조선청년학생들의 시위투쟁을 탄압하기 위하여 경찰과 기마순찰대 등 수천명의 진압무력과 각종 차량을 모조리 동원하였으며 방대한 폭압무력앞에서도 청년학생들의 투쟁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2개 련대의 침략군까지 동원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시위진압으로 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학살되거나 부상당하였다.
일제의 야수적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일제는 체포된 학생들에게 전기고문을 들이대고 불로 온몸을 지지였으며 포승으로 묶어 천정에 매달아놓는 등 갖은 악행을 다하였다.이것이 광주학생사건의 전말이다.광주학생사건을 통하여 명백히 알수 있는바와 같이 일제는 조선민족의 자주적존엄과 인권을 모독하고 멸시한 범죄자이며 무고한 조선청년들을 탄압하고 학살한 야수의 무리이다.광주학생사건은 일제가 조선에서 감행한 모든 범죄의 일단에 지나지 않는다.조선강점 전기간 일제는 인간의 두뇌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온갖 범죄적만행을 일삼으면서 우리 민족에게 헤아릴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들씌웠다.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당한 정신적, 물질적피해는 실로 엄청나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반동들은 조선사람들의 피로 얼룩진 죄악의 력사를 전면부정하면서 어떻게 하나 과거청산의 책임에서 벗어나보려고 비렬하게 책동하고있다.이것은 우리 민족의 더 큰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력사는 누가 부정하고 먹칠한다고 해서 달라지거나 없어지는것이 아니다.력사는 그대로 남아 일본의 수치스러운 죄악과 더러운 행적을 만천하에 고발하고있다.
일본반동들은 떳떳치 못한 과거를 그대로 안고서는 절대로 밝은 앞날을 기대할수 없다는것을 똑바로 명심해야 한다.일본은 과거청산만이 파멸의 구렁텅이에서 구원될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하고 이제라도 처신을 바로해야 할것이다.(끝)
[출처:민주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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