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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따뜻한 미국 할아버지의 금강산 3박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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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10-14 14:18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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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따뜻한 미국 할아버지의 금강산 3박 4일

 

 

유석종(은퇴목사, 미국 시애틀 거주)

 

▲외금강 호텔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지난해 10월 초, 나는 미국 시애틀 지역에 사는 세 누이와 두 매제를 데리고 평양을 방문하여 이북에 살고 있는 두 누이와 조카들 도합 19명이 3박 4일 일정으로 금강산 관광을 하고 돌아왔다. 오늘의 정세로 보아 꿈같은 여행이었다.

 

내가 북에 있는 두 누이와 헤어지게 된 것은 66년 전 6.25 동란이 일어나고서였다. 나보다 열 살 위인 큰 누이는 이미 결혼을 하여 서울 사직동에 살고 있었으나 6.25 전쟁이 일어나자 한 해 전에 월북한 매부가 남쪽으로 내려와 후퇴 시 가족을 데리고 북으로 올라갔다. 둘째 누이는 6.25 전쟁이 나던 해 이화고녀를 졸업하고 대학 1년생이었는데 인민군이 진입하자 노동당 선전원으로 활동하다가 후퇴시 북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아버지는 6.25 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벽제에서 개척교회를 하다 식중독으로 돌아가시자 아홉 살 난 막내 남동생이 미국에 양자로 가게 되었고, 그가 성장하여 형제들을 초청해주어 우리 5남매가 미국 시애틀 지역에 와서 살게 되었다.

 

이북에 있는 누이들과 다시 상봉하게 된 것은 2004년 가을이었다. 1989년 북에서 세계청년대회가 열리던 때 이승만 목사 편에 살아있을지 모르는 누이들을 미국에 사는 동생들이 찾는다고 우리 이름과 주소를 적어 보냈는데 이북의 누이들이 그것을 TV로 보고 먼저 우리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내왔다. 그 후 한두 번 서신 왕래가 있다가 끊기더니 2000년이 지나 다시 큰 누이로부터 편지가 왔고, 형제들이 보고 싶어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절박한 소식을 조카로부터 전해 듣고 2004년 미국에 사는 우리 4남매가 평양에 들어가 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헤어진 지 54년만의 재상봉이었다. 사전에 사진 교환이 없었으면 서로 몰라볼 정도로 우리는 모두 많이 변해 있었다.

 

반세기가 지나 생사를 모르던 누이들을 다시 만났으니 혈육을 되찾은 감격에 우리는 서로 얼싸안고 이름을 부르고 볼을 부비며 눈물을 흘렸다. 허나 무언가 넘지 못할 벽이 우리 사이를 가로 막고 있음을 느꼈다. 오랫동안 체제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가르침이 다른 세상에서 살아왔으니 서로 이질감을 느끼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아무리 형제요 혈육이어도 적대국가에서 온 우리니 경계하는 눈치도 보였다. 그러기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아도 깊은 대화는 하지 못하고 주로 자녀들 이야기가 화젯거리이었다.

 

금번 3박 4일간의 금강산 여행은 끊겼던 혈육의 핏줄을 다시 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가보면 원을 풀고 못 가보면 한을 품는다.”는 천하제일의 명산을 오르내리는 것만으로도 신선이 된 기분인데 반세기 넘어 헤어졌던 누이들의 손을 잡고 큰 바위에 걸터앉아 옛 노래를 부르며 힘들었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 마치 변화산에 올라 신비로움을 체험했던 베드로가 된 기분이었다.

 

만물상과 해금강을 돌아보고 합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조카들이 준비해온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밤 깊도록 회포를 풀며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잔을 나누었다. 88세인 큰 누이가 홍난파 곡 ‘고향의 봄’을 불러 모두 눈시울을 적시었고, 내 차례가 되어 나는 “내 나이가 어때서”, 그리고 재창곡으로 서유석이 부른 “가는 세월”을 연이어 불렀다. 내 노래가 끝나자 84세인 둘째 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얼싸안고 우는 것이었다. 풍파 많은 세월을 지나 다시 만난 형제의 뜨거운 정이 끓어올라 흘리는 눈물이었으리라.

 

금강산 3박 4일은 내가 북녘 땅에 와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였다. 그리고 7천만 동족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리는 통일이 내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이것이 통일이 가져올 새날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의 가슴마다 이처럼 작은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조국이 하나 되는 날이 더 가까와지지 않을까?

 

평양에 돌아온 우리는 금강산에 함께 가지 못한 조카들과 조카 손주들, 그리고 어린 증손주들까지 포함 40여명이 식당에 모여 두 차례나 식사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여덟 살 난 증손녀는 우리 앞에서 자신이 쓴 시를 읊었고, 세 살 난 증손자는 차려 자세로 힘차게 노래를 불러댔다. 다섯 살 난 증손녀 경영이는 나를 “손이 따뜻한 미국 할아버지”라 불렀다고 들었다. 그 어린 것이 우리 사이에 흐르고 있는 혈육의 뜨거운 피를 느낀 것일까? 잃었던 고향을 찾은 것 같았다. 피붙이들과 다시 헤어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가슴을 여미는 아픔이 나의 온 몸을 사로잡았다.

 

나는 정치는 잘 모른다. 허나 분명한 것은 조국 분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든지 조국을 하나로 만들어야 할 당사자는 미국도 아니요 중국도 아니요 우리 민족 스스로라는 것이다. 야곱이 에서를,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다시 만나 지난날의 원한을 모두 내려놓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새로운 복을 누렸듯이, 세월이 이만치 흘렀으니 우리 동족도 그럴 때가 되지 않았는가? 남북 간의 휴전선이 무너지고 경상도 신혼부부가 금강산에 신혼여행을 가고 신의주의 중학생들이 경주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오는 날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삼천리금수강산이 온통 춤판이 되어 그 가운데 더덩실 어깨춤을 추는 나 자신을 본다.

 

7일간의 가족상봉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살붙이가 원수일 수는 없다. 하늘땅이 변해도 사랑을 미움으로 바꿀 수는 없다. 우리는 불같이 사랑해야겠다.”고 외친 평양에서 작고한 매부 김상훈의 시 한 구절이 내내 내 가슴에서 메아리쳐 왔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10-14 14:19:03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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