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영원한 삶의 생명수 >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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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영원한 삶의 생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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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29 16:31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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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1932년 6월 15일 서울에서 출생.

∙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당시) 입학.

∙ 1950년 조선인민군대에 입대.

∙ 1953년 무대예술공연 소개자로 활동.

∙ 1967년 량강도예술단 작가로 활동.

∙ 1987년 피바다가극단 작가로 활동.

∙ 1989년 조선문학창작사(당시) 작가로 활동.

∙ 2011년 3월 11일 사망.

김일성상계관인.

 

 

                         그리도 가슴가득 안고 산 축원

                         그리도 가슴가득 넘치던 감사

                         그리도 가슴가득 품었던 맹세

 

                        

                         어이하여 그날에 그이앞에서

                         한마디도 아뢰이지 못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죄송한 마음, 아쉬운 마음

                         이리도 이 가슴 파고드는것인가

 

                         …

                         그러나 사람들이여

                         나를 나무라지 마시라

 

                         그이의 사랑이 너무도 깊은것이여서

                         그이의 믿음이 너무도 높은것이여서

                         그이의 배려가 너무도 큰것이여서

                         참으로 이 세상 그 어떤 말도

                         찾을수 없었던것을

 

                         …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축원을 담아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감사를 담아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맹세를 담아

 

                         노래하고 또 노래하리라

                         목숨이 진할 때까지

                         온 세상에 소리높이 노래하리라

                         세월의 끝까지

(최로사의 시 《나무라지 마시라 사람들이여》중에서)

 

절세의 위인들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 은혜로운 그 품에 피줄을 잇고 사는 우리 인민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시이다.

떨어져서는 단 한시도 살수 없는 위대한 그 품속에 오늘의 삶과 보람, 래일의 행복이 있다는것을 뜨거운 심장으로 절감한 한 인간의 격정이고 분출이리라.

시인 최로사는 이 시에서 자기 인생의 어버이, 삶의 영원한 생명수를 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에 대한 고마움을 절절하게 토로하였다.

이 나라 수천수만의 생명들이 그러하듯 시인 최로사는 바로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속에서 김일성상계관인으로,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시인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영원한 삶의 생명수

 

일찌기 한 철학가는 《좋은 예술가가 되는데는 4가지가 필요하다. 착한 심장, 예리한 눈, 가벼운 손 그리고 언제나 깨끗이 닦은 붓이다.》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최로사의 인생사는 그것을 부정하였다. 남다른 창작적재능과 주위세계를 감득할수 있는 밝은 눈을 가진 그였지만 남조선에서는 도저히 피워볼수 없는 꿈을 가진 그였다.

아버지와 고모도 모두 자기들의 후더운 심장에 문학예술을 안고있었지만 제 나라가 없는탓에 붓대는 꺾이여지고 예술의 넋은 짓밟혀 침략자들의 더러운 롱락물로밖에 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오직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시고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가시는 어버이수령님의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자기들의 념원을 이룰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종자도 불모의 땅에 떨어지면 싹트지 못하고 썩어버리게 된다.

사람들의 재능도 바로 그것을 귀중히 여겨주고 키워주며 내세워주는 다심한 사랑의 손길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최로사가 10대의 어린 나이에 단행한 운명의 선택!

그것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인생의 선택이였으며 태양의 따뜻한 손길에 이끌려 기름진 대지우에 한껏 뿌리를 박고 아름다운 꽃송이를 마음껏 피워 알찬 열매를 맺어가는 보람차고 격동적인 나날이였다. 자연계에는 사계절이 있지만 영원한 봄계절만을 아는 따사로운 품, 사회주의조국의 품이 있어 그는 오늘도 우리 인민들의 기억속에 영생하는 작가로 남아있는것이다.

사막의 이슬처럼 귀중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던 부모들의 소원을 초월하여 샘물터의 영원한 생명수로 되여 자기의 생에 빛나는 자욱들을 아로새겨온 시인 최로사.

그의 인생은 인민의 운명을 끝까지 책임지고 보살펴주며 이끌어주는 위대한 어버이들의 손길을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는것이였다.

한생 붓대를 들고 창작의 길에서 탈선없이 살아온 최로사에게는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심장속에 안고 산 글발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90년 12월 27일 위대한 장군님께서 조선문학창작사 전체 동지들에게 보내주신 친필서한이였다.

우리 당건설과 활동에서 영원한 동행자, 충실한 방조자, 훌륭한 조언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크나큰 믿음과 신임이 담긴 그이의 친필은 시인의 높뛰는 심장에 활기를 더해주었다.

전시가요 《샘물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창작생활은 말그대로 위대한 태양의 손길에 이끌려 문학을 배우며 자라 오늘날에는 영광의 단상에 올라선 나날들이였다. 그가 걸어온 자욱마다에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뜨거운 사랑과 은정이 깃들어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955년 6월말 어느 한 자리에서 노래《샘물터에서》는 참으로 좋은 노래라고, 전쟁시기 우리 인민군병사들과 인민들의 사랑을 받고 널리 불리운 노래였을뿐만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도 많이 불렀다고 하시며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샘물터에서》와 같은 노래를 전후복구건설을 하는 오늘도 많이 불러야 한다고 하시며 그래야 전쟁시기 우리 인민이 지니고있던 승리의 신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힘을 낼수 있다고 교시하시였다.

한 처녀병사의 미숙한 습작시에서 작가적인 재능의 싹을 발견하시고 그것을 활짝 피워 온 세상에 빛내여주신 어버이수령님!

진정 그 사랑, 그 은정은 그대로 최로사의 육체에 피줄처럼 흘러들어 그의 심장을 드높은 창작적충동과 열정으로 높뛰게 한 힘의 원천이였다.

바로 그 믿음이 있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한 예술단에서 일하던 최로사는 남편과 함께 량강도의 현지작가로 파견되였을 때에도 창작의 나래를 더 활짝 펼수 있었다.

그는 도예술단의 작가로 있으면서 민족가극 《해빛을 안고》를 비롯하여 음악무용대본들과 수십편의 가사들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다.

바로 이 나날에 최로사는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각별한 사랑과 보살피심속에 보람찬 창작생활을 수놓아가게 되였다.

1972년 6월초,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승리 35돐 기념행사준비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하시기 위하여 몸소 량강도를 찾으시였다. 행사의 전 과정을 세심히 지도하셔야 하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그이께서는 량강도예술인들이 준비하고있는 기념행사공연의 시연회를 보아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공연장소에 들어서시자 창작가, 예술인들은 크나큰 감격과 기쁨으로 하여 설레이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그이의 품에 매달렸다.

얼마나 뵈옵고싶던 그이이신가!

이날 공연무대에 올린 종목들중에는 최로사가 창작한 노래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창작한 여러편의 가사들을 일일이 보아주시며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동행한 일군들에게 그가 여기에 와서도 이렇게 좋은 작품들을 계속 쓰고있는것을 보니 자신의 마음이 매우 기쁘다고 하시였다.

그러시고는 시연회가 끝나자 최로사에게 다가오시며 녀류시인동무, 참 오래간만입니다라고 하시며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최로사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어떻게 나를 알아보실가?)

자기의 손을 꼭 잡으시고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주시는 그이를 우러르느라니 위대한 어버이의 기억속에 산다는 무한한 행복감이 온몸을 감싸안았다.

최로사는 영광의 이 순간 자기가 그이께 뭐라고 말씀을 올려야 할지, 어떤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감감히 잊어버리고말았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그이의 앞에 나서면 자기의 인생을 따뜻한 품에 감싸안아 키워주고 소원대로 작가로 내세워주신 그 은정에 골백번 머리숙여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진 그였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그이를 뵙고나니 꼭 친어머니의 품에 안긴것만 같아 격정의 눈물이 솟구치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사실 위대한 장군님께서 그를 알고계신것은 퍽 오래전부터였다. 최로사는 전후에 중앙예술단체의 소개자로 10여년간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때 그가 관중들로 하여금 문학예술의 사상예술성을 깊은 예술적감흥속에 받아안도록 하는데서 커다란 역할을 한것을 잊지 않으시고 소개는 그전에 최로사동무가 잘하였다고 감회깊이 회억하시였다.

노래 《샘물터에서》의 명가사를 쓴 이름있는 시인, 관중들의 심장을 틀어잡았던 인기있는 소개자…

오래전부터 심중에 새기고 깊은 관심을 돌리시였던 최로사였기에 그이께서는 그의 자그마한 창작성과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기뻐해주시며 그에게 더 큰 힘과 용기를 안겨주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최로사가 현지에서 창작하고 그의 남편 김준도가 작곡을 한 《사령부의 불빛이 비쳐주는 길》을 들어주시고 그 노래를 만수대예술단 공연종목으로 정해주시였으며 그후에는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뜻깊은 공연무대에서 공연하도록 하는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사령부의 귀틀집 불밝은 창가에

장군님은 이밤도 지새우시네

내 어이 밤길이라 지체하리까

천리라도 만리라도 떠나렵니다

아 천리라도 만리라도 떠나렵니다

 

사령부의 불빛이 비쳐주는 길

산악인들 바다인들 못 넘으리까

장군님의 전사로서 임무받은 몸

가시덤불 길이라도 두려우리까

아 가시덤불 길이라도 못 넘으리까

 

1968년에 창작한 이 가사에는 어버이수령님을 인생의 영원한 은인으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삶의 참된 진리로 새겨안고 끝까지 따르려는 우리 인민의 절절한 념원이 담겨져있었다.

이날 최로사는 자기가 안겨사는 조국의 품이 얼마나 넓고 따사로운가를 온몸으로 절감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날이 흐를수록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광이 차례지는지 다는 알지 못했다.

1976년 7월초 어느날이였다. 그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도의 책임일군과 함께 삼지연못가를 거니시며 최로사의 생활에 또다시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당시 최로사는 마음속에 큰 상실의 아픔을 안고있었다. 곁에서 힘을 주고 용기를 주며 창작의 밤을 함께 패워가던 사랑하는 남편인 김준도가 불치의 병으로 사망하였던것이다.

일군으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괴로운 표정으로 삼지연의 수면을 바라보시며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심중하신 어조로 일군에게 최로사동무는 열여덟살 어린 나이에 병사로 복무하였을뿐아니라 전쟁의 불길속에서 《샘물터에서》와 같은 명가사를 창작한 재능있고 공로있는 작가라고 하시며 앞으로 그의 사업과 생활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인간과 생활에 대한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 작가와 작품에 대한 그이의 자애로운 사랑이 세차게 맥박치는 말씀이였다.

참으로 최로사가 걸어온 인생의 갈피갈피에 흐르는 생의 활기는 그대로 은혜로운 어버이께서 부어주신 호흡이였으며 박동이였다.

그의 미흡한 작품을 귀중히 여겨주시고 부족점들을 하나하나 바로잡아주시며 시대의 명곡으로,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작품으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손길을 떠나서 어찌 최로사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수 있으랴.

1982년 4월의 어느 봄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10여년전에 창작된 예술영화 《새별》의 주제가 《새별》에 대하여 이야기하시였다.

주제가 《새별》은 최로사가 1966년에 창작한 작품이였다. 그러나 영화는 높아가는 인민들의 문화수준을 민감하게 반영하지 못한것으로 하여 상영되지 못했다.

그때부터 세월은 흘러 이제는 주제가의 가사를 쓴 작가나 작곡가의 기억에서도 그 노래가 희미하게 사라져가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노래에 대하여 상기하여주신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이 노래는 가사도 좋고 곡도 좋은데 영화때문에 파묻혔다고 말씀하시며 못내 아쉬워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노래 《새별》을 조용히 불러보시고 아무래도 이 노래를 주제가로 한 예술영화를 다시 만들어야 하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가사의 종자가 청춘의 사랑과 조국애인것만큼 영화가 잘될수 있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 노래의 종자는 2절에 집중적으로 형상되여있다고 하시며 친히 가사를 외워보시였다. 그것은 한자도 틀림없는 최로사의 가사였다.

일군들의 놀라움은 컸다. 온 방안은 격정의 파도로 설레였다.

가사의 구절구절을 세심히 훑어가시던 그이께서는 친히 몇구절을 수정가필하여주시고 곡도 두군데나 수정해주시였다.

 

저 하늘에 별들이 많고많아도

마음속에 빛나는 새별은 하나

별이여 비쳐다오 등대와 같이

우리 앞길 찬란히 비치여다오

 

원래 가사는 《밤새도록 비치는》으로 되여있었는데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마음속에 빛나는》으로 가필해주시였다. 그리고 《마음속에 그리운》으로 되여있던것을 《우리 앞길 찬란히》로 수정해주시였다. 또한 《우리 님에게》로 되여있던 2절 가사 마지막표현을 《나의 님에게》로 고쳐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세월의 흐름속에 영영 묻혀버릴번 했던 한편의 노래를 뜨거운 사랑으로 품어주시여 우리 시대 청춘들의 애정과 조국애의 감정을 하나로 이어주시였으며 청춘들의 사랑 그자체를 더욱 뜨겁게 승화시켜주시였다.

 

새별처럼 청춘을 빛내이자고

굳은 맹세 다지며 그대 떠났네

별이여 전해다오 나의 노래를

사무치게 그리운 나의 님에게

 

일군들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지니신 비범한 문학적천품과 창작가들의 사색과 열정의 열매를 그처럼 귀중히 여기시는 그이의 뜨거운 사랑에 목메여 깊이 머리를 숙이였다.

이렇게 되여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뜨거운 손길에 의하여 10여년동안 묻혀있던 한편의 가사가 영화의 종자로, 주제가로 되여 우리 인민들이 즐겨 부르게 되였으며 새별처럼 밝은 빛을 뿌리게 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노래 《그네뛰는 처녀》를 기악협주곡으로, 관현악으로, 무용곡으로 다양하게 형상창조하도록 하여주시고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과 우리 나라 명승들을 자랑하는 기록영화의 장면들과 무대예술작품들에 이 음악을 넣도록 하여주시였다.

최로사는 바로 그 사랑, 그 믿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그이의 문예정책을 받드는 길에서 언제나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동행자, 충실한 방조자, 훌륭한 조언자로 살기 위해 피타는 창작활동을 벌렸다.

그는 위대한 장군님께서 우리 인민들이 결혼식때 부를 좋은 노래가 없다고 걱정하시였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밤을 패워가며 가사 《축배를 들자》를 창작하였다.

그는 결혼식장에서 부르는 노래인것만큼 가사를 밝고 명랑하게 생활적으로, 통속적으로 쓰리라고 마음먹었다.

 

우리 세월 좋아 백년가약 좋아

축배 축배 축배를 들자

 

즉 최로사는 《우리 세월 좋아》라는 한구절에 우리 나라 사회주의제도에서 인민이 누리는 행복한 생활을 다 담고 이런 좋은 세상에서 백년가약을 맺는 청춘들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내용을 다 담아보려고 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결혼식때 부를 노래가사를 생활적으로, 통속적으로 쓴데 대해서 평가해주시면서 생활적인 노래에도 사상성이 명백하게 형상되여야 한다고 하시며 후렴부분 가사를 수정가필해주시였다.

 

우리 세월 좋아 로동당이 좋아

축배 축배 축배를 들자

 

이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는 순간 최로사는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올리였다.

(내가 구가하자고 생각한것 즉 우리가 사는 로동당시대, 우리 사회주의제도에서 백년가약을 맺는 청춘남녀들에 대한 축하이자 이 행복을 안겨준 은혜로운 사랑의 품, 우리 조국에 대한 다함없는 칭송의 사상감정이 얼마나 빛나게 형상되였는가!)

최로사는 짧은 가사에서 《우리 세월 좋아》라는 시구이상 더 좋은 표현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위대한 장군님께서 가필해주신 시구 《로동당이 좋아》로 하여 가사는 다름아닌 우리 시대, 우리 사회주의제도에서 청춘들의 결혼을 축하하는 노래로서 그 사상예술적수준과 인식교양적의의가 비할바없이 높아지게 되였다.

2절과 3절의 가사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최로사는 2절 부분에서 《금딸이겠네》라고, 3절에서는 《사랑만은 오늘처럼 젊어있으리》라고 썼었다.

그러나 위대한 장군님께서 수정가필해주신 원고부분은 그의 가슴을 세차게 격동시켰다.

 

신랑신부 웃음꽃이 활짝 폈으니

첫아기는 틀림없이 옥동자라네

 

신랑신부 검은머리 백발되여도

변함없는 사랑속에 젊어있으리

 

노래가 완성되였을 때 최로사는 몇번이고 가슴속으로 이렇게 웨치고 웨쳤다.

《참으로 우리 장군님은 위대한 예술의 천재이시다!》

그는 천재적인 예지와 열화같은 사랑으로 평범한 시인이 창작한 한편의 노래가사까지 이처럼 훌륭히 완성시켜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넓고도 깊은 사랑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정녕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비길데 없는 이런 믿음과 은정속에서 최로사는 작가로서의 영예를 더욱 빛내이게 되였다.

이렇듯 자애롭고 인자한 품에 안겨 만복을 누려가는 그였기에 어느해 정월초하루 남녘에 있는 어머니를 그리며 쓴 시 《내 어머니의 모습》에서 이렇게 자기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어머니슬하를 떠나

내 안긴 은혜로운 품

이 품속에서

내 어머니 그토록 주고파도 못 주던

만복을 한껏 누리며

내 어머니 그토록 바라시던

나의 소원 나의 희망 꽃으로 활짝 피여

영광으로 이어온 내 삶의 하루하루

 

평범한 시인을 주체예술의 화원에서 만발하는 천만가지 꽃중의 한송이 꽃으로 피워주시고 작가들과 작품들을 천금보다 더 귀중히 여기시며 아껴주시는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사랑은 세월과 더불어 더해만 갔다.

1986년 봄 최로사는 여러편의 가사들을 창작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때 그가 창작한 노래 《우리가 제일일세》를 들으시고 가사가 참으로 좋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이의 말씀을 전달받은 최로사는 솟구쳐오르는 감격을 금할길 없었다. 친부모도 따르지 못할 다심한 사랑의 품속에서 받아안은 은정에 다소나마 보답했다는 그 기쁨을 어디에 비기겠는가.

그러나 한편 서글픈 감정이 갈마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이 가사가 그이께 드릴수 있는 마지막가사로 되지 않겠는가 하는것이였다.

그는 이제 몇달만 있으면 년로보장으로 일을 그만둘 나이가 되는것이다.

(이대로 시단에서 떠난단 말인가! …)

괴롭고 허전한 마음을 안고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해 9월 어느날이였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감동적이고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꿈같은 현실이 그앞에 펼쳐졌다.

이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최로사동무는 일편단심 당을 받들어 창작생활을 해왔다고 하시면서 그를 평양에 소환하여 생의 말년까지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울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최로사의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흘렀다.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기만 했던 간절한 소원이 그이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으로 이루어지게 되였으니 그때의 그 감격을 무엇이라고 표현할수 있으랴.

그뿐만이 아니였다.

온 가족이 함께 살도록 하여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에 의하여 그는 아들과 며느리, 딸까지 데리고 평양에 올라오게 되였다.

언제나 변함없는 믿음으로 내세워주시고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어버이의 손길에 떠받들려 최로사는 새로 지은 아빠트에 살림을 펴게 되였으며 청춘작가의 활력과 열정을 가지고 보람찬 창작의 나날을 보내게 되였다.

온갖 시름을 모두 가셔주고 천만가지 소원을 다 풀어주는 은혜로운 어버이품!

고목에도 꽃을 피울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고 뜨거운 인간애로 품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정녕 마를줄 모르는 샘줄기와도 같은것이였다.

1989년 3월 어느날 최로사는 만수대예술극장으로 급히 오라는 련락을 받게 되였다.

이날 그곳에서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을 모시고 피바다가극단에서 출연하는 시와 음악무용공연이 진행되였다.

극장에 도착한 최로사에게 한 일군이 오늘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공연관람에 참가하게 되였다는것을 알려주었다.

얼마나 뵙고싶던 장군님이신가. 얼마나 흠모하고 그리워하던 그이이신가.

(정녕 무슨 말로 인사를 올리며 무슨 말로 감사의 정을 아뢰일가.)

최로사는 그이의 하늘같은 은정속에 사는 무상의 행복을 심장깊이 느끼며 그이께 올릴 말마디들을 고르고 또 골랐다.

이윽고 우렁찬 만세소리가 극장안을 뒤흔드는 속에 위대한 장군님께서 객석으로 들어서시였다.

만장의 환호에 태양과도 같이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들어서시는 그이의 영상을 우러르며 최로사는 눈굽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창작가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며 최로사에게로 다가가시였다. 그를 이윽토록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그의 이름을 정깊게 불러주시며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을 만나뵈옵는 크나큰 행복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체험하게 되는 그이의 위대한 포옹력과 감화력을 뜨겁게 절감한 최로사는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인사도 미처 드리지 못한채 그이의 넓은 품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후에야 겨우 마음을 진정한 그는 입을 열었으나 《위대한 장군님!》이라는 말만 몇번 아뢰였을뿐 다른 인사를 올리지 못하였다.

장내가 정돈되고 공연의 막이 올라서야 최로사는 운명의 어버이이신 그이께 감사의 인사말 한마디 제대로 올리지 못한 자신을 크게 질책하였다.

그날 공연이 끝난 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휴계실에서 일군들과 창작가들을 다시금 만나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시인들쪽으로 자애로운 시선을 보내시며 시인들이 좋은 시와 가사를 많이 써서 우리 조국의 부강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있기때문에 자신께서는 높이 평가하고있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동무들은 앞으로도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좋은 시와 가사를 많이 창작함으로써 당과 운명을 같이하는 참다운 동행자가 되여야 한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를 정겹게 바라보시며 가사 《샘물터에서》를 창작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좋은 가사를 많이 썼는데 앞으로도 창작사업을 잘하여야 하겠다는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안겨주시였다.

여기에는 작가에게 영원히 빛나는 삶을 안겨주시고 생의 순간순간을 나라와 인민을 위해 값있게 바칠줄 아는 시대의 기수로 내세워주시려는 우리 장군님의 웅심깊은 뜻이 깃들어있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이날 최로사의 시집을 출판하도록 은정깊은 사랑도 베풀어주시였다.

최로사는 크나큰 충격으로 하여 한동안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시집이라니?! …)

어제날 자기의 꿈과 희망을 꽃피우려고 했어도 침략자들의 군화발밑에서 싹도 틔워보지 못했던 그였다.

그런데 위대한 조국, 고마운 공화국의 품에서 문학을 배우고 오늘은 이렇듯 만사람들이 선망과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는 작가로 되였는데 자기의 이름으로 된 시집까지 낸다니 행복이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또 어데 있단 말인가.

위대한 품속에서 귀중한 정치적생명을 받아안고 참된 삶과 행복을 꽃피워온 보람찬 나날에 창작한 시편들을 한데 묶어 작가의 이름과 더불어 영원히 빛내여주시려는 어버이 그 사랑에 최로사는 무엇이라 감사의 인사를 올려야 할지 몰랐다.

겹쌓이는 흥분으로 하여 마음을 진정하지 못한 최로사는 《위대한 장군님! …》 하고는 더 말씀을 올리지 못하였다.

그이께서는 하많은 사연이 담긴 인사의 말을 뜨거운 눈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그의 심중을 깊이 헤아리시고 그가 받은 새 살림집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순간 최로사는 아무리 자애롭고 다정스러운 말을 고르고골라도 이 짤막한 말씀속에 소용돌이치는 그이의 뜨거운 사랑을 다 이야기하지 못할것이며 그 어떤 수백수천의 말을 합치고 합쳐도 그 말씀속에 담겨있는 은정의 세계를 다는 전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그이의 말씀속에는 작가와 작품, 인간과 생활에 대한 우리 장군님의 위대한 사랑이 하나로 응축되여있다는것을…

최로사는 뜨거운 격정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대답올렸다.

《정말 고맙습니다. …》

위대한 장군님께서 떠나신 다음에도 최로사는 어린애마냥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그냥 울었다. 그는 언제나 창작가들을 자신의 영원한 동행자로 굳게 믿어주시며 작가와 작품의 운명을 끝까지 빛내여주시려는 위대한 령도자의 그 사랑에 한생을 다 바쳐 기어이 보답하리라 굳게 마음 다졌다.

그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뿐만아니라 그의 가정에도 크나큰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지방에서 재능있는 어린 학생들을 많이 키워낸 최로사의 남동생 최호섭을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안무가로 일하도록 하여주시는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다시는 예술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어린 딸자식을 공화국의 품으로 보낸 최로사의 어머니 석금성, 슬하에서 떠나간 아들딸들의 생사여부를 알수 없었던 그는 수십년동안 사찰들을 찾아 북으로 간 자식들이 무사하기를 빌고 빌었다고 한다.

그러던 1990년대초에 일본에 있는 친척을 찾아 도꾜로 갔던 석금성은 뜻밖에도 공화국에서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 화보를 통하여 자기의 딸인 최로사가 위대한 수령님들의 보살피심속에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되였다는것과 아들인 최호섭이 안무가로 보람있는 삶을 누리고있는것을 제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였다.

일본땅에 와서 뜻밖에 자식들의 소식을 알게 된 그는 자기의 아들딸들을 훌륭히 키워 작가, 예술인으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자애로운 영상을 우러르며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또 올렸다.

그후 서울에 돌아온 그는 1995년 9월 사망하는 그날까지 하루빨리 조국이 통일되여 아들딸을 만나게 해달라고 마음속으로 기원했다고 한다.

세월이 갈수록 더해만 가는 친어버이의 사랑과 믿음은 그대로 최로사에게 끝없는 창작의 나래를 한껏 펼치게 하였다.

그는 그날의 감격을 안고 시 《나무라지 마시라 사람들이여》(1990년), 가사 《우리의 큰 명절》(1990년), 가사《오직 우리 당만 따르리》(1992년), 가사 《어머니들에 대한 생각》(1992년), 가사 《우린 승리자》(1993년), 가사 《아침도 좋아 저녁도 좋아》(1993년)를 비롯한 수많은 시들과 가사들을 창작하였다.

전화의 그 나날 포화속을 뚫고 부상병들을 치료하던 나어린 처녀병사의 처녀작 《샘물터에서》를 귀중히 여겨주시고 그의 인생말년에까지 온갖 육친의 정을 다 부어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은 정녕 끝이 없었다.

1991년 8월 중순 어느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를 잊지 못하시여 또다시 그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주시였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를 반갑게 맞아주신 그이께서는 최로사동무가 보고싶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하시며 그의 건강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물어주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동무는 열여덟나이에 처녀의 몸으로 전쟁시기 군대에 나가 싸웠을뿐아니라 그 전화속에서 전쟁승리에 크게 기여한 전시가요 《샘물터에서》를 쓴것은 대단히 큰 공로라고 치하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감격에 젖어있는 그에게 보천보전자악단에서 새로 창조한 노래도 들려주시며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당의 작가, 로동당의 작가가 되여야 한다는 크나큰 믿음을 부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후 최로사에게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선물시계를 표창해주시고 또 그를 전국지식인대회의 대표로 불러주시는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자신의 곁에 더 가까이 불러주시고 두터운 신임과 배려를 돌려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따사로운 해빛아래 최로사는 인생의 황혼기를 모르고 언제나 포연속을 헤치던 처녀병사시절처럼 신심과 락관에 넘쳐 작품들을 창작할수 있었던것이다.

이것은 그가 1995년 2월에 창작한 가사 《조선의 행운》(안정호 작곡)을 두고서도 잘 알수 있다.

최로사는 그 노래의 창작계기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 뜻밖에도 어버이수령님을 잃는 커다란 국상을 당하여 사람도 강산도 피눈물에 젖어있던 1994년을 보내고 새해 1995년을 맞이한 나의 뇌리에는 문뜩 솟구치는 하나의 시상이 있었다.

조선이 피눈물의 바다에 잠겨 영영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고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떠벌이고있을 때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서 용암처럼 솟구치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분출하는것이였던가.

그것은 우리에게는 또 한분의 위대한 령도자이신 김정일장군님께서 계신다는 생각, 그이께서 어버이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우리 인민의 가슴속에 깊이 심어주시여 생겨난 힘이 아닌가.

하여 대를 이어 누리는 수령복, 우리 조선민족만이 타고난 수령복을 노래하고싶었으며 그 정서를 비장하게가 아니라 랑만적으로 희망차게 노래하고싶어 창작한것이다.》

 

온 나라에 그늘없이 해빛을 뿌려

행복의 꽃 피우시는 김정일동지

아 뜨거운 사랑의

아 태양을 모심은

조선이 타고난 행운이라오

 

이 세상의 모든 풍파 다 막으시여

좋은 날만 펼치시는 김정일동지

아 천하를 비치는

아 태양을 모심은

조선이 타고난 행운이라오

 

나라마다 차례지는 영광이런가

사람마다 누리는 복이라던가

아 대대로 위대한

아 태양을 모심은

조선이 타고난 행운이라오

 

이 노래에는 위대한 장군님의 품에 안겨사는 행운을 지닌 시인의 복된 삶의 토로, 이 세상 그 어느 민족도 누리지 못하는 수령복, 태양복에 사는 복받은 우리 인민의 행복상이 자랑스럽게 구가되여있다.

1995년 5월초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최로사를 다시금 자신의 곁으로 불러주시였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그이께서는 일군들에게 최로사동무는 전쟁에 참가한 처녀병사이며 전화속에서 전시가요를 썼고 또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공연의 무대소개자로 조국의 존엄을 떨쳤다고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는 《그네뛰는 처녀》와 같은 명가사들을 많이 썼다고, 우리 당이 그 동무의 일생을 끝까지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최로사가 도착하자 그이께서는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왕재산경음악단에서 새로 형상한 노래 《그네뛰는 처녀》를 그에게 들려주시였다.

커다란 감격에 휩싸여있는 그를 보시며 그이께서는 이 노래가 명가사, 명곡이라고 하시며 노래는 그렇게 랑만이 있어야 우리 인민이 좋아한다고 거듭거듭 치하해주시면서 그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위인상에 한없이 매혹된 그는 1998년 2월 남조선의 옛 학우들에게 보내는 편지 《장군님을 알면 래일이 보입니다》에서 이렇게 썼다.

《숙명녀고의 동창생 옛 학우들!

해외에서 학우들이 보낸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꼭 50년전, 비내리는 서울역두에서 눈물속에 헤여졌던 문학소녀 <종달새>, 이 최로사를 잊지 않고 편지들을 보내주어 고맙습니다.

학우들은 편지에서 김정일장군님을 만나뵈온 이 <종달새>를 축복하면서 장군님에 대해 알려달라고 부탁했지요.

그이께서는 저를 몇해어간에 다섯번이나 만나주셨답니다.

오늘은 장군님앞에서 제가 <울보>가 되였던 이야기만을 <통일신보>의 지면을 빌려 전해드리고저 합니다.

제가 지난해 만나본바이지만 우리 동창생들가운데는 동서방 대통령들의 관저를 드나들며 그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저명한 문필가도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들과 친한다면 그것은 직업상의무감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김정일장군님께 그토록 이끌리게 된것은 그이께서 민족의 령도자이시기에 앞서 다정다감한 인간이시라는 매혹에 있습니다.

그이의 미소는 봄날의 해빛처럼 따스하며 그이의 안광은 예지로 별빛처럼 빛납니다.

그이의 음성은 정서깊은 음악의 선률이 되여 이 마음의 금선을 튕기며 추억의 나래도 펴주고 미래에 대한 락관의 샘이 솟구치게도 합니다.

여러해전 어느 가을날, 장군님께서는 저를 만나주신 자리에서 좋은 가사들을 쓰느라고 수고가 많았다고 하시며 몸소 축배잔을 찧어주시였습니다. 저는 장군님의 은정이 너무도 고마워 인사의 말씀도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감격의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이께서는 저를 보고 울보라고 하시며 어서 잔을 들어야 함께 잔을 들것이 아닌가, 동무가 <축배를 들자>는 노래도 지었는데 어서 들자고 다정히 말씀하시였습니다.

친오라버님 같으신 장군님의 후더운 인정이 저를 울보가 되게 한것입니다.

1995년 5월의 봄날에도 장군님께서는 여러 시간이나 저를 만나주시였습니다. 그이께서는 그해초에 제가 지은 노래 <조선의 행운>에 대해서 먼저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이께서는 1956년에 제가 가사를 쓴 민요 <그네뛰는 처녀>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그때 동무는 민족적색채가 짙은 랑만적인 노래로 인민들을 고무하더니 풍파많은 시련의 오늘에는 이렇게 신심에 찬 노래를 지었다고 분에 넘치는 말씀을 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노래에서 자신을 태양으로 부르는것만은 지나치다고 하시면서 엄하게 나무람하시였습니다.

저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마음속으로 그이께 아뢰였습니다. 남녘땅에서는 불행에 처했던 이 소녀에게 행운의 빛발이 어디서 비쳐왔습니까. 한편한편의 소박한 노래들을 다듬어 완성시켜주시고도 이 시인을 내세워주시며 겨레를 위해 붓을 들고 참답게 살도록 깨우쳐주신 장군님이 아니십니까.

동창생 여러분!

장군님께서 아무리 만류하시여도 그이는 제 인생의 태양이십니다.

한줄기의 해빛을 감수하고도 우주만물을 소생시키는 태양의 열도를 가늠할수 있는것이 아닙니까.

조선민족 그 누구이든 장군님을 만나뵈옵고나면 그이를 인생의 태양으로 확신하게 될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학우들! 어수선한 세상에서 자신과 자녀들의 장래가 걱정되거든 우리 장군님께 운명을 맡기십시오. 장군님을 알면 민족의 밝은 래일이 보입니다.

우리모두 인생의 태양, 민족의 태양 김정일장군님을 높이 모시고 따르는 길에서 통일조국의 봄을 마중해나갑시다.
   1998년 2월 3일 평양에서.》

세상만물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끝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최로사에게 돌려주신 장군님의 사랑에는 끝이 없었다.

그가 늙은 몸으로 집에서 창작생활을 하던 2000년 3월에는 일군들에게 최로사동무는 지난 시기 훌륭한 시와 가사를 많이 쓴 재능있는 작가라고 분에 넘치는 치하를 해주시고 그의 건강과 생활을 잘 돌봐주어야 한다고 당부하시며 귀중한 보약들과 선물들을 보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못다 주신 사랑이 있으신듯 전쟁로병시인인 그의 창작성과를 높이 평가하시여 2001년 4월에는 그에게 김일성상을 수여하도록 하여주시고 그가 일흔살이 되는 2002년 6월에는 생일상을 보내주시고 로력훈장까지 수여해주시였다.

로병시인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해마다 명절때면 사랑의 선물과 보약들을 보내주시고 전쟁시기 당한 부상자리가 도져 쓰러졌을 때에는 전문치료집단까지 무어주시여 그가 다시 일어서도록 하여주신분도 다름아닌 자애로운 어버이 김정일장군님이시였다.

뿐만아니라 그이께서는 2006년 12월 13일에는 자기를 품에 안아 키워준 삶의 요람인 우리 조국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 감격의 인사를 담아 최로사가 올린 편지를 친히 보아주시고 사랑의 친필을 보내주시는 크나큰 영광을 안겨주시였다.

이렇듯 뜨거운 사랑과 배려속에 자기의 한생을 살아온 최로사였기에 운명의 마지막순간까지도 위대한 장군님을 그리며 자기의 생을 마친것이였다.

2011년 3월 그가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못내 가슴아파하시면서 최로사의 장례식을 기관장으로 하도록 하시고 자신의 명의로 된 화환까지 보내주시였다.

돈과 권력이 판을 치는 남조선에 있었더라면 최로사의 재능과 그의 운명은 빛도 없이 초야에 묻히고말았을것이다.

하다면 그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영생의 언덕으로 올라서게 되였는가.

위대한 수령님들께서는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의 운명의 보호자가 되시여 육친의 정보다 더 뜨겁고 자애깊은 사랑으로 그를 안아 키워주시고 영생의 언덕에 내세워주시였다.

참으로 최로사에게 돌려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사랑은 천만부모의 사랑을 다 합쳐도 따를수 없는 가장 뜨겁고 열렬한 어버이사랑이였다.

하기에 최로사는 생전에 《우리 당은 내 운명의 보호자, 우리 당의 사랑은 내 삶의 생명수! 그것이 아니였다면 나는 일찌기 기갈이 들어 풀끝의 이슬로 사라지고말았을것입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자기의 운명을 품어주고 내세워주는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이 있어 최로사는 처녀작 《샘물터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명가사들과 명시들을 창작할수 있게 되였으며 우리 나라 주체적문학예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할수 있었다.

인생은 끝이 있어도 영원한 사랑과 믿음으로 영생의 절정에 내세워주시는 절세위인들의 숭고한 품속에서 그는 오늘도 자기가 창작한 명곡들과 더불어 인민들의 가슴속에 길이 살아있는것이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1-29 16:32:13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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