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은혜로운 토양이 피워낸 처녀작 >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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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은혜로운 토양이 피워낸 처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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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22 14:5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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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1932년 6월 15일 서울에서 출생.

∙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당시) 입학.

∙ 1950년 조선인민군대에 입대.

∙ 1953년 무대예술공연 소개자로 활동.

∙ 1967년 량강도예술단 작가로 활동.

∙ 1987년 피바다가극단 작가로 활동.

∙ 1989년 조선문학창작사(당시) 작가로 활동.

∙ 2011년 3월 11일 사망.

김일성상계관인.

 

 

                         그리도 가슴가득 안고 산 축원

                         그리도 가슴가득 넘치던 감사

                         그리도 가슴가득 품었던 맹세

 

                        

                         어이하여 그날에 그이앞에서

                         한마디도 아뢰이지 못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죄송한 마음, 아쉬운 마음

                         이리도 이 가슴 파고드는것인가

 

                         …

                         그러나 사람들이여

                         나를 나무라지 마시라

 

                         그이의 사랑이 너무도 깊은것이여서

                         그이의 믿음이 너무도 높은것이여서

                         그이의 배려가 너무도 큰것이여서

                         참으로 이 세상 그 어떤 말도

                         찾을수 없었던것을

 

                         …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축원을 담아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감사를 담아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맹세를 담아

 

                         노래하고 또 노래하리라

                         목숨이 진할 때까지

                         온 세상에 소리높이 노래하리라

                         세월의 끝까지

(최로사의 시 《나무라지 마시라 사람들이여》중에서)

 

절세의 위인들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 은혜로운 그 품에 피줄을 잇고 사는 우리 인민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시이다.

떨어져서는 단 한시도 살수 없는 위대한 그 품속에 오늘의 삶과 보람, 래일의 행복이 있다는것을 뜨거운 심장으로 절감한 한 인간의 격정이고 분출이리라.

시인 최로사는 이 시에서 자기 인생의 어버이, 삶의 영원한 생명수를 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에 대한 고마움을 절절하게 토로하였다.

이 나라 수천수만의 생명들이 그러하듯 시인 최로사는 바로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속에서 김일성상계관인으로,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시인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은혜로운 토양이 피워낸 처녀작

 

인정만으로는 살수 없고 재능만으로는 성공할수 없는 불모의 땅에 떨어진 한알의 씨앗, 무한한 희망과 랑만을 가슴에 묻어둔채 한숨과 한탄속에 세상을 저주해야만 했던 최로사!

남조선에 있을 때 최로사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은적이 있었다.

《아버지, 내 이름을 왜 로사라고 지었나요?》

《왜, 네 이름이 어때서? … 누가 뭐라고 하더냐?》

최로사는 길게 한숨을 내그으며 탄식조로 말했다.

《로사란 한자로 <이슬 로>자와 <모래 사>자를 쓰지 않나요. 그러니 모래속의 이슬처럼 빛도 없이 사라진다는 소리가 아니예요?》

지지리 쪼들려만 가는 가정살림에서 상급학교에 갈수 없음을 뻔히 아는지라 제대로 피지 못하고 수그러질 자신의 생이 바로 이름에 담겨져있는것만 같았다.

그때 아버지는 어이없어하며 이렇게 말을 했다.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한거란다. 네 이름은 그런 뜻이 아니라 모래의 이슬처럼 귀하게 되라고 그렇게 지은것이란다.》

모래의 이슬! 아버지의 뜻은 알만 했지만 최로사는 자기의 현재생활로서는 도저히 그 뜻이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과연 무엇으로, 어떤 힘으로 그렇듯 귀한 사람으로 될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북의 현실은 정말 꿈만 같았다. 즙이 말라들어가는 남쪽사회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였다.

시름에 시들어가는 싹이란 단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오히려 약동하는 시대의 숨결속에 모두 호함진 꽃송이들만이 만발하였다.

매 인간들의 얼굴마다에서는 생의 활기가 흘러넘치고있었으며 사람마다 웃음과 랑만으로 삶을 즐기고있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지만 평양에서 자기들의 평생념원이였던 문학과 예술에 몸을 잠그고 새 조국건설에 뼈심을 바쳐가는 아버지와 고모의 모습은 무엇으로써도 꾸밀수도 엮을수도 없는것이였다. 무엇이라 이름할수 없는 감격과 흥분에 자신의 눈과 귀가 의심되였으며 피부로 닿는 혜택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었단 말인가!)

최로사는 평양에 있는 어느 한 고급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면서부터 두눈을 크게 뜨게 되였으며 모든것을 새삼스럽게 지켜보고 리성적으로 분석해보는데 습관되였다. 인간불모지로 전락된 남조선에서는 지겹게만 여겨지던 세상살이였지만 이곳에서는 점차 삶에 대한 애정과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하였다. 울밑에서 시들어가던 여린 꽃송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차츰 하늘을 향해 머리를 쳐들게 되였다. 맑고 푸른 창공아래 티없이 정결하고 깨끗한 공기의 흐름새는 드디여 최로사로 하여금 가슴속에 고이 숨겨두었던 희망과 래일에 대한 꿈을 되살리게 해주었다.

참으로 꿈같은 일이였다. 남조선에서는 수업료요 뭐요 하면서 인간의 뼈를 깎던 설음이 공화국의 품에서는 가뭇없이 가셔지고 마음껏 배움의 나래를 펼치게 되였다.

동생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누나에게 매달리며 이것저것 캐묻군 하였다.

《누나, 돈을 내지 않고도 계속 학교에 다닐수 있나?》

최로사는 그때마다 동생을 품에 꼭 껴안고 말해주었다.

《그래, 여기는 우리가 살던 남조선이 아니란다.》

북에서 최로사의 생활은 격동적이였다. 보고 듣는것마다 새롭고 환희로웠다.

사람들은 누구라 할것없이 자그마한 구김살도 없이 삶의 희열과 랑만에 넘쳐있어 현실은 말그대로 약동하는 모습이였다. 너도나도 새 조국건설의 벅찬 생활속에서 생의 보람을 찾고있었으며 날에 날마다 변모되는 공장과 농촌은 그대로 비약하는 조선의 모습이였다.

최로사는 자기의 새 생활을 창조하고싶었다. 산속에 흐르는 맑은 물처럼 여울이 되고 폭포가 되고싶었다. 사품치는 물결이 되여 대해로 흘러들고싶었다.

그는 마치 해면이 물을 빨아들이듯 자기 주위에서 벌어지는 새라새로운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열심히 듣고 보고 배웠다.

남조선에서 짓밟혔던 재능의 싹은 드디여 머리를 쳐들고 밝은 태양의 뜨거운 열기속에 배움의 나래를 마음껏 펴며 씩씩하게 자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곧은 줄기를 형성하였고 무성한 아지마다에 아름다운 푸른 잎새를 활짝 펼치게 하였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 최로사는 드디여 고급중학교를 높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처럼 소원하고 갈망하던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당시)에 입학하게 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

최로사의 마음은 창공을 날으는것만 같았고 끝없이 펼쳐진 배움의 대통로앞에 가슴은 뿌듯했다.

모든 학과목들은 그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더욱 촉진시켜주었다.

더우기 방과후에 진행하는 예술소조활동은 남조선에서 굳게 닫아놓았던 최로사의 마음속 대문을 서서히 두드리고있었다.

해방된 민족의 드높은 열의와 열정을 새 조국건설을 위한 투쟁에로 힘차게 불러일으키는 예술의 거대한 힘과 견인력은 그에게 새로운 세계를 안겨주었다.

진정한 문학예술! 그것은 결코 식민지압제의 칼부림밑에서 몸부림치던 울분과 원한의 웨침이 아니였다.

돈많은자들의 롱락물로, 유흥거리에 지나지 않던 예술이 아니였다.

위대한 어버이의 품,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긴 최로사가 부르는 노래의 선률은 기쁨과 랑만에 넘친 인민의 행복상이였으며 그가 읊는 시는 민주의 새 조국을 이 땅우에 건설해가는 우리 인민의 투쟁과 열정, 승리의 신심에 대한 열렬한 토로였다.

드디여 최로사는 뚝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자기의 본태, 밝고 씩씩한 모습을 드러내보였다.

예술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가진 그는 대학무대에서 자기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였다. 노래와 화술 특히 창작에 특이한 소질이 있어 선배들과 교원들의 각별한 인기를 모았다.

그는 동무들과 교원들의 사랑과 도움속에 자기의 예술적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해나갔다.

솔숲푸른 룡남산언덕에 자리잡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울리는 글소리와 학생들의 랑만에 넘친 웃음소리는 그대로 그의 노래로 이어져갔다.

봄날의 꽃봉오리가 피여나기도 전에 악착한 벌레에 의해 좀먹던 남조선사회와는 전혀 달랐다.

따사로운 빛발은 지칠줄 몰랐고 피여나는 꽃송이를 보호해주고 아껴주며 뜨거운 사랑의 열기로 품어안아주고있었다.

자그마한 불편이 있을세라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보살펴주는 은혜로운 품속에서 그는 학문의 길에 자기의 열정을 남김없이 바쳐가게 되였다.

최로사는 이때를 회고하여 자기의 글에 이렇게 썼다.

《… 꿈같이만 생각되는 공화국의 품, 어느날 밤엔가는 이런 인민의 세상을 위하여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열네살 어리신 나이에 나라를 찾는 길에 나서시여 험난한 가시덤불길을 헤쳐오셨다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베개잇을 적시기도 하였다. 반드시 보답하여야 한다는 자각을 스스로 가다듬게 하는 공화국의 품속에서 흘러가는 학창시절은 정말이지 꿈같은 나날들이였다. …》

남조선에 있을적엔 두렵게 여기며 경계하던 이웃들의 사랑과 인정세계에도 최로사는 자기의 마음을 서서히 열게 되였다.

그것은 바로 가식과 허위가 없는 인간들의 애틋한 진정이였다.

대학시절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처녀의 가슴속에 지울수 없는 자욱을 남긴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후날 일생의 반려자로 된 김준도였다.

당시 대학 예술소조에서 지휘자로 있으면서 작곡, 편곡의 다재로 이름을 날렸던 김준도는 다방면적이고 활달하면서도 정열적인 최로사에게 문학과 음악을 보다 깊이있게 리해할줄 아는 안목을 키워주는데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최로사에게 새 조국건설에서 가요가 노는 역할을 깨우쳐주면서 《로사는 가사를 쓰고 나는 작곡을 하면 얼마나 좋을가.》라고 친근하게 말하군 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아버지가 쓰는 소설만이 진짜 문학인듯이 생각하던 최로사에게 있어서 가요는 그닥 마음이 당기는 분야가 아니였다.

하여 최로사는 상급생인 김준도의 권고를 항상 흘려보내기만 했다.

바로 이러한 때 그의 앞길에는 새로운 시련의 시기가 도래하였다.

아니, 한 처녀만이 아니라 조국의 운명에 검은구름이 드리우게 되였다.

창건된지 겨우 2년밖에 안되는 우리 공화국을 요람기에 압살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던 미제는 드디여 1950년 6월 25일 리승만역적을 내세워 우리 인민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던것이다.

《모든것을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어버이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이 구호를 피끓는 가슴에 새겨안은 전체 인민은 조국을 수호할 불타는 일념을 안고 떨쳐일어섰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은 너도나도 앞을 다투어 손에 총을 잡고 조국수호의 성전으로 떠나갔다.

시련의 시기에 최로사는 도저히 흥분된 마음을 진정할수 없었다.

전선으로 떠나가는 남학생들과 함께 자기도 군대에 내보내줄것을 선참으로 대학에 제기하였다. 남진하는 인민군대오와 함께 서울을 해방하고 미국놈들을 조국땅에서 내쫓고싶었다. 남쪽에 계시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만나고 미군의 학정밑에서 배움의 꿈을 잃고 헤매이는 그리운 학우들을 구원하는 길에 피끓는 청춘을 바치고싶었다.

어느날 최로사는 교실의 창가에서 멀리 남쪽하늘을 바라보고있었다. 이제는 인민군대에 의해 해방된 서울의 거리들과 고향마을들을 그려보고있었다. 만세의 함성을 높이 부르며 남진하는 인민군대오속에서 딸애의 모습을 찾고계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

저도모르게 흘러나오는 부름과 함께 그의 쌍까풀진 두눈가에서는 뜨거운것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루빨리 입대가 승인되여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고향으로 달려가고싶었다. 정의와 진리를 말살하고 인간의 문명을 짓밟는 침략자 미제에게 복수의 총탄을 날리고싶었다.

《로사동무!》

갑자기 한학급의 녀동무가 황황히 교실에 뛰여들며 그를 불렀다.

《? …》

웬일이냐는듯 의문이 그득하니 실린 최로사의 두눈을 바라보며 처녀는 책망어린 어조로 말했다.

《아직도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하니?》

최로사는 전후사연이 없이 무턱대고 자기를 질책하는듯 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물었다.

처녀는 그제서야 숨을 고르며 말했다.

《얘, 지금 <작곡가선생>이 해방지구에 정치공작대로 떠난대.》

대학의 예술소조성원들은 김준도를 두고 《작곡가선생》이라고 불렀다.

《준도동무가?!》

최로사는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래, 방금 막 떠나려고 차에 오르는것을 봤어. 목을 게사니처럼 쭉 빼들고 우리들을 둘러보는게 꼭 너를 찾는것 같더라.》

녀동무는 동그스름한 얼굴에 방실 미소를 띠우며 최로사의 등을 떠밀었다.

《자, 어서 가봐. 》

《그런데 왜 하필이면 내가 바래워줘야 하니?》

《애두 참, 딴전을 부리지 마. 준도동무가 너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해주었니, 자! 어서…》

처녀는 최로사의 등을 막무가내로 떠밀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김준도는 언제나 최로사의 학업은 물론 노래련습, 희망에 대해서까지 깊은 관심을 돌려주었다. 선배이기 전에 또 다른 스승이기도 하였다.

최로사는 자기가 어떻게 교사밖으로 뛰여나왔는지 알수 없었다. 그는 룡남산언덕에 핀 갖가지 들꽃들을 꺾어 꽃다발을 엮었다.

《준도동무, 잘 싸워주세요!》

두볼을 홍조로 물들이며 최로사는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채 속삭이듯 말했다.

김준도는 처녀의 두손을 꼭 잡았다.

《로사동무, 정말 고맙소. 우리 기어이 승리하고 사랑하는 이 모교에서 꼭 다시 만나기요.》

진심이 어린 그의 목소리는 최로사의 가슴에 야릇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주었다.

그들은 이렇게 헤여졌다. 서로의 가슴속에 그 어떤 아름다운것이 새롭게 움트고있는가 하는것을 느껴볼 사이도 없었다. 다만 승리! 이 두 글자만이 그들의 심장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고있었다.

최로사는 그로부터 며칠후 소원대로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손에 총을 잡고 전선으로 떠났다.

정의의 총창을 억세게 틀어잡고 사랑하는 조국의 촌토를 목숨으로 사수하기 위해 싸우는 인민군전사들과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인 투쟁모습은 그에게 커다란 감흥과 충동을 안겨주었다.

불과 불, 철과 철이 마주치는 고지마다에서 한치의 땅을 위해 후더운 피를 뿌려가는 영웅전사들의 희생성은 최로사로 하여금 조국이란 무엇이며 자기의 생명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페부로, 심장으로 절감하게 했다. 적의 총탄이 비발치는 속을 뚫고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적비행기의 폭격속에서 중환자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의 한몸을 희생적으로 내대는 순간에조차 그는 사랑하는 조국, 통일될 조국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가렬한 전투속에서 그는 노래가 어떻게 전사들을 돌격전에로 불러일으키며 어떻게 그들의 심장속에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승리의 신심을 심어주는가를 직접 체험하게 되였다.

바로 이러한 그였기에 단발머리간호원으로 위생가방을 메고 전선길을 드나들던 그 어려운 시련의 시기, 쪽잠마저 그리운 간고한 전투와 행군의 여가에 짬짬이 가사를 습작하는 버릇을 붙였다.

한치의 조국땅을 위해 청춘도 생명도 깡그리 바쳐싸우는 무비의 용감성을 지닌 우리 인민의 드높은 애국충정은 최로사에게 커다란 시적충동을 불러일으켜주었다. 위대한 인민의 영웅적인 희생정신과 투쟁모습은 그대로 격동적인 시를 탄생시켰다.

최로사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미제가 일으킨 전쟁으로 나는 교정을 떠나 손에 총을 잡았다. 헤여진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 그리움을 풀고 행복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 고마운 제도를 수호해야 한다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미제침략자들을 쳐물리쳐야 한다는 병사의 의무를 나는 스스로 지니였던것이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엄혹한 시련속에서 나는 어느 전쟁사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던 위대한 현실에 또다시 감복하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여 미제침략자들과 싸워 반드시 이긴다는 필승의 신념으로 가득찬 우리 인민, 장군님을 높이 받들고 우리의 행복을 수호하려는 불타는 그 마음들은 전쟁이라는 범주로써는 상상도 할수 없는 삶의 화폭을 펼쳐놓았다.

걸음걸음 피가 고이는 시련속에서도 서로 돕고 위해주는 군민간의 뜨거운 정, 목숨을 내대야 하는 아슬한 고비도 저마다 제가 맡겠다고 가슴을 내대는 사람들… 이 감동스러운 현실에 이끌려 나는 단풍이 붉게 타는 마가을의 바위틈에 기대여 병사수첩을 펼쳐들고 눈물로 이 아름답고 숭고한 우리 인민의 신념을 형상해보았다. 바로 이 습작시가 가요 <샘물터에서>의 가사였다.》

가요 《샘물터에서》는 자연의 모든 만물이 무참히 파괴되는 포화속에서도 언제나 시들줄 모르고 마를줄 모르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뜨거운 혈연의 정, 전쟁의 승리에 대한 락관을 그대로 담은 노래이다.

1950년 가을 어느날 최로사는 부상병들을 후송하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에 올랐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최고사령부를 찾아 북행길에 오른 그는 어느 한 농촌마을가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환자들에게 아침식사를 보장하려고 그는 이른새벽 안개발을 헤치며 마을의 샘물터로 내려갔다.

그런데 어디선가 샘물터로 다가가는 처녀병사의 발걸음을 멈춰세우는 노래소리가 울려왔다.

(누가 이른새벽부터 노래를 부를가?)

음악에 남다른 감각을 가진 최로사는 저도모르게 노래의 세계에 끌려들어가게 되였다.

샘물터를 눈앞에 두고 소리나는쪽으로 발길을 옮겨가던 그는 우뚝 그 자리에서 굳어진채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아직도 꿈자리에서 헤매이고있을줄로만 알았던 군인들이 남먼저 일어나 여러명의 마을처녀들과 오손도손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고받는가 하면 상쾌한 기분에 사로잡혀 노래를 부르며 빨래하고있었던것이다.

샘물터에 나란히 놓여있는 물동이를 보고 그는 모든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물을 길러 나왔던 처녀들이 군인들이 빨래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수 없어 한명, 두명 모여 그들을 도와주고있는것이 분명하였다.

최로사는 군인들과 처녀들에게 다가가 《새벽부터 모두들 수고합니다!》라고 한마디 하고는 더 다른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떤 강한 충격이 그의 뇌리를 쿵하니 울려주었던것이다.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여 우리 인민은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

조국이 준엄한 시련의 길을 헤치는 엄혹한 시련속에서도 비관과 동요, 주저를 모르고 울리는 그들의 티없이 맑고 깨끗한 웃음소리, 서로 오가는 군민의 정은 최로사의 마음을 끌어당겼으며 시적충동과 감흥으로 가슴을 불태우게 하였다. 그는 당장 그들의 생활을 그대로 시상에 담아보고싶었다.

최로사는 바위에 기대여 병사수첩에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옮겨갔다.

이것이 바로 당시 전문작가도 시인도 아닌 열여덟살의 애젊은 처녀병사가 생활체험에 기초하여 쓴 가사 《샘물터에서》였다.

 

샘물터에 물을 길러 동이 이고 나갔더니

빨래하던 군인동무 슬금슬금 돌아앉네

살그머니 바라보니 그 솜씨가 서투르지

부끄러워도 말했지요 제가 빨아드릴가요

제가 빨아드릴가요 제가 빨아드릴가요

 

그러나 그때까지만 하여도 최로사는 자기의 병사수첩에 씌여진 이 습작시가 우리 인민들이 그토록 사랑하며 즐겨부르는 명곡으로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로사는 전화의 나날 전선에서 싸우는 학생들을 대학으로 불러주신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은정을 심장속에 깊이 새겨안고 모교인 김일성종합대학으로 떠나오게 되였다.

전우들의 바래움속에 평양에 도착한 그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이 자리잡고있는 백송리로 가기 전에 먼저 모란봉으로 올랐다. 미제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무참히 파괴되였지만 승리의 신심으로 약동하는 수도의 전경을 깊이 새겨두고싶은 심정에서였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감격적인 상봉이 자기를 기다릴줄은 꿈에도 몰랐다.

산언덕길을 따라 모란봉극장쪽으로 내려오는데 웬 사람들이 자동차에 싣고 온 악기들을 부리우고있었다.

그들의 곁을 지나던 최로사는 자기를 지켜보는듯 한 시선을 감촉하며 무심결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상대방도 뜻밖의 현실앞에 반가움을 선뜻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의 눈을 의심하듯 멍하니 서있었다.

《아니… 이게 최로사동무가 아니요?》

《어마나! … 준도동무!》

대학의 교정에서 전승의 그날에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하며 헤여졌던 《작곡가선생》이였다.

최로사는 너무 기뻐 그의 손을 부여잡고 철부지소녀인양 콩당콩당 뛰였다. 정치공작대로 해방지구에 나가 활동하던 김준도는 그후 여기 모란봉극장으로 소환되여 작곡가로 창작생활을 하고있었던것이다.

뜨겁게 회포를 나누던 그는 최로사에게 그동안 작품들을 습작한것이 있는가고 물었다.

처녀는 어줍게 웃으며 전선에서 싸우면서 짬시간마다 적어두었던 시들이 들어있는 병사수첩을 내놓았다.

수첩을 거의 꽉 채우다싶이 한 습작작품들을 보며 김준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설가를 지향하던 최로사에게 이렇듯 놀라운 시적발견과 재능이 있는줄을 정말 몰랐던것이다. 더우기 그의 시선을 끌어당긴것은 가사 《샘물터에서》였다. 자그마한 샘물터에서 벌어진 생활상을 시적계기로 잡고 랑만적이며 통속적인 시어로 군민의 혈연적뉴대와 래일의 승리를 락관적으로 보여준것이 그의 마음을 틀어잡았다.

《로사동무, 이 시는 정말 훌륭하오. 여기에 곡을 붙이면…》

수첩을 손에 든 김준도의 낯빛은 벌써 곡상이 떠오르는지 흥분으로 상기되여있었다.

최로사는 그게 뭐 그렇게까지 훌륭한 작품이겠는가고 속으로 생각하며 대학으로 향했다.

다음해 어느 봄날, 대학동무들과 함께 농촌을 도와 어느 마을 논벌에서 모내기를 하던 최로사는 귀에 익은 노래구절에 허리를 폈다.

논뚝길로 걸어가는 대여섯명의 군인들이 노래 《샘물터에서》를 부르는것이였다.

자기의 귀를 의심하며 다시금 노래가사를 새겨보던 그는 마치 자석에 끌리우듯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저-어, 그 노래가사를 누가 썼는지 모르세요?》

자기들의 걸음을 멈춰세운 미모의 녀대학생을 군인들은 웃음으로 맞이했다.

《이 노래는 전선용사 최로사란 처녀간호원의 명작이지요. 동무는 그 유명한 시인을 아직 모르고있었소? 온 전선이 다 아는 처녀인데…》

순간 최로사는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너무도 보잘것없고 어설픈 자기의 습작품이 이렇게 노래로 되여 태여났으니 그때의 그 심정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수 있으랴.

그는 그때 자기의 수첩을 받아든 김준도가 곡을 붙여 이렇게 노래로 형상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날에야 가사의 작곡가는 그가 아닌 윤승진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날 김준도는 자기 동료들에게 그 수첩을 꺼내들고 자기의 애인이 창작한 작품이라고 자랑하며 시 《샘물터에서》를 보여주었다.

이때 그의 어깨너머로 시줄을 읽어가던 윤승진이 날쌔게 김준도의 손에서 수첩을 나꿔채고 달아났다.

《준도동무, 시가 참 좋구만. 곡은 내가 붙이겠소.》

며칠후에 윤승진은 최로사의 시에 곡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예술단의 중창으로 형상해보았다. 노래는 첫 공연에서부터 만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다.

이렇게 되여 가요 《샘물터에서》는 온 나라에 보급되였으며 합창, 중창, 독창으로 불리워지게 되였다.

가사는 가요로 형상되자마자 인민군군인들과 인민들의 각별한 사랑속에 불리워졌을뿐만아니라 오늘도 전시가요들중의 우수한 대표작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있다.

최로사는 그때의 심정을 자기의 자서전에 이렇게 남겼다.

《가사 <샘물터에서>는 처녀작으로서 내가 시인이 된 동기로 되였다.

준엄한 1950년 10월의 그 가을날에 병사수첩에 써놓은 습작품이였다.

가렬처절한 전쟁시기, 그것도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어려운 시기였으나 최고사령부를 찾아가는 우리의 마음은 기어이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하여 다시금 펼쳐질 아름다운 래일에로 날고있었다.

그 신념은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였다.

수령님만 계시면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는 억척불변의 의지가 마음의 기둥으로 되였기에 나어린 처녀병사였던 내가 군민일치를 주제로 하여 아름답고 락천적인 생활정서를 형상한 랑만성이 짙은 이 가사를 쓸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지난 3년간의 조국해방전쟁은 최로사로 하여금 조국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체험하게 한 귀중한 나날들이였다.

하기에 그는 1989년에 창작한 노래 《조국이 귀중함을 깨달은것은》(설명순 작곡)에서 자기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던것이다.

 

조국이 귀중함을 내 진정 깨달은것은

정다운 고향집을 떠날 때였네

밀보리 불타는 언덕넘어

전선길 달려갈 때

아 사무쳐왔네

귀중한 어머니 내 조국

 

조국이 귀중함을 내 진정 깨달은것은

시련의 길을 걷던 그날이였네

별빛이 내리는 적후의 밤

장군님 그리울 때

아 사무쳐왔네

귀중한 어머니 내 조국

 

전화의 그 나날에 내 진정 깨달았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귀중해

언제나 내 마음 그날에 살며

조국을 받들어가리

아 받들어가리

귀중한 어머니 내 조국

 

참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고 인민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치는 고마운 혜택이 방방곡곡에 펼쳐지는 공화국의 현실은 그가 수많은 명가사들과 명시들을 창작할수 있게 한 비옥한 토양이였다.

처녀작 《샘물터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가 자기의 인생에 남긴 수백편의 작품들은 거의나 인민의 세상에서 참된 복락을 누리며 주인으로서의 삶을 빛내여나가는 우리 인민들의 행복한 생활을 밝고 랑만적인 시형상에 담은것이였다.

최로사는 이러한 생활적인 바탕과 환경속에서 자기의 시적소재를 선택하였으며 그것을 풍만한 시어로 펼쳐보였다.

그는 1956년 봄, 모내기를 끝낸 기쁨을 안고 즐거운 휴식일을 보내고있는 청산벌농민들의 모습에 심취되여 가사 《그네뛰는 처녀》를 창작하였다.

최로사는 가사에서 민속놀이를 취급한 소재의 특성에 맞게 민족적인 색채가 짙은 생활세부와 시어들을 잘 탐구하였을뿐만아니라 조흥구 《에헤야》와 반복구 《즐거워라》, 《구름밖을 날아보자》 등을 효과적으로 리용하여 전통적인 4, 4조의 운률조성수법을 잘 살려씀으로써 밝고 락천적인 우리 인민들의 생활감정을 원만하게 표현하였다.

가사에 곡을 붙인 작곡가는 다름아닌 그의 남편인 김준도였다.

이 노래는 우리 인민의 민족적인 생활모습을 새로운 시대적미감에 맞게 훌륭하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창작되자마자 인민들의 각별한 사랑속에 널리 불리워졌다.

금강산에서 휴양생활을 즐기는 근로자들속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부르던 그 기쁨을 노래한 《내 나라는 좋아라》를 비롯하여 인민의 념원이 그대로 꽃피고있는 우리 제도를 형상한 《우리가 제일일세》, 《축배를 들자》 등의 모든 노래들에서 그는 한결같이 내 조국의 현실에 대한 열렬한 공감과 인민의 진정한 행복이 넘쳐나는 생활에 대한 한없는 찬사의 메아리를 터쳤다.

이밖에도 그가 창작한 예술영화의 주제가들인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정다워라 나의 일터여》, 《사랑의 요람》 등은 모두 밝고 명랑한 양상을 가진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노래로 불리우고있다.

시 《나무라지 마시라 사람들이여》, 노래 《새별》, 《사령부의 불빛이 비쳐주는 길》, 《조선의 행운》 등에서도 온 나라에 그늘없이 해빛을 뿌려 천만자식들을 한품에 안아 키워주고 내세워주는 고마운 어머니조국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오직 그 품에 자기의 운명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사는 우리 인민들의 긍지와 행복을 노래하였다.

최로사가 창작한 모든 작품들은 시인의 그 어떤 허구나 환상에 의한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보고 듣고 느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것이였으며 우리 시대의 맥박과 숨결인 승리에 대한 락관성과 드높은 신심에서 발현된것이였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1-22 14:52:54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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