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삶의 빛줄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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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14 18:34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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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3. 작가 최로사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2. 명곡과 더불어 영생하는 삶
∙ 1932년 6월 15일 서울에서 출생.
∙ 1949년 김일성종합대학 외국어문학부(당시) 입학.
∙ 1950년 조선인민군대에 입대.
∙ 1953년 무대예술공연 소개자로 활동.
∙ 1967년 량강도예술단 작가로 활동.
∙ 1987년 피바다가극단 작가로 활동.
∙ 1989년 조선문학창작사(당시) 작가로 활동.
∙ 2011년 3월 11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그리도 가슴가득 안고 산 축원
그리도 가슴가득 넘치던 감사
그리도 가슴가득 품었던 맹세
어이하여 그날에 그이앞에서
한마디도 아뢰이지 못하여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죄송한 마음, 아쉬운 마음
이리도 이 가슴 파고드는것인가
…
그러나 사람들이여
나를 나무라지 마시라
그이의 사랑이 너무도 깊은것이여서
그이의 믿음이 너무도 높은것이여서
그이의 배려가 너무도 큰것이여서
참으로 이 세상 그 어떤 말도
찾을수 없었던것을
…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축원을 담아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감사를 담아
그날에 못올린
그 모든 맹세를 담아
노래하고 또 노래하리라
목숨이 진할 때까지
온 세상에 소리높이 노래하리라
세월의 끝까지
(최로사의 시 《나무라지 마시라 사람들이여》중에서)
절세의 위인들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 은혜로운 그 품에 피줄을 잇고 사는 우리 인민의 절절한 마음을 담은 시이다.
떨어져서는 단 한시도 살수 없는 위대한 그 품속에 오늘의 삶과 보람, 래일의 행복이 있다는것을 뜨거운 심장으로 절감한 한 인간의 격정이고 분출이리라.
시인 최로사는 이 시에서 자기 인생의 어버이, 삶의 영원한 생명수를 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에 대한 고마움을 절절하게 토로하였다.
이 나라 수천수만의 생명들이 그러하듯 시인 최로사는 바로 위대한 수령님들의 품속에서 김일성상계관인으로,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시인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삶의 빛줄기를 찾아서
세상만물은 태양이 있어 존재한다. 이것은 결코 자연의 리치만이 아니다.
인간생활에서도 바로 이 법칙이 존재한다.
아무리 총명한 두뇌와 재능을 가지고 태여났다 해도 그것을 중히 여기고 내세워주는 품, 봄빛처럼 따사롭고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이 없다면 그것은 사막에 떨어진 씨앗에 불과하며 망망대해우에 떨어진 하나의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은 자기 삶을 아껴주고 빛내여주는 품, 뜨거운 사랑과 인덕으로 만사람을 따뜻이 안아주는 품을 갈망하는것이다.
작가 최로사가 걸어온 인생길은 바로 이를 여실히 증명해주고있다.
1932년 6월 서울 창덕궁의 긴 돌담을 에돌아 현제동(당시)의 막바지에 있는 오막살이 세집에서 맏딸로 태여난 최로사, 유년시절과 소녀시절이 흘러간 고향의 이 골목 저 골목마다에는 그의 피눈물이 비물처럼 고여있었다.
최로사는 어렸을 때부터 말이 없는 소녀였다. 오죽하면 그의 집에서는 그를 두고 《뚝보》라고 부르기까지 했겠는가. 그것은 천성이라기보다 가정과 주위환경에 많이 기인된것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의 아버지 최승일은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의 발기인중의 한사람으로서 1925년 8월 조명희, 송영, 리기영, 한설야, 류완희, 박세영, 박팔양을 비롯한 진보적인 문학예술인들과 함께 카프를 결성하였다. 그는 1926년 10월 카프의 림시총회에서 김복진, 김기진, 리량, 박영희, 안석주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거되였다.
그들은 1927년에 전국대회를 열고 조직을 재정비하였으며 계급적립장을 뚜렷이 밝힌 새 강령을 채택하였다. 동맹안에 문학부, 연극부, 영화부, 미술부, 음악부 등을 두고 기관지의 이름을 《예술운동》으로 고쳤으며 지방도시들과 일본 도꾜 등에 10여개의 지부를 두었다.
또한 카프는 1930년에 이르러 다시 조직을 정비하면서 부를 동맹으로 확대개편하고 기관지로서 《문학창조》, 《연극운동》, 《집단》 등을 발행하였다.
카프작가들은 작품에서 당대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우리 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해방을 주장하였으며 무산계급의 선각자를 전형으로 내세우고 사회주의적리상을 표현하였다.
최승일도 진보적인 작가로서 주로 소설과 연극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러나 이름있는 재사로 손꼽히던 그의 재능과 념원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히우고말았다.
일제는 1931년과 1934년에 두차례에 걸쳐 모략사건을 조작하고 카프성원들을 대량적으로 검거투옥하였으며 1935년에는 강제로 카프를 해산시켰다.
최승일은 침략자들의 갖은 탄압과 박해속에서도 자기의 량심을 꺾지 않고 진보적문인으로서의 지조를 변함없이 지켜갔다.
그는 자기의 작품에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겪는 무산대중의 비참한 생활을 그리면서 그 원인을 계급적견지에서 밝혔으며 착취자, 억압자들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항거정신을 형상하였다.
연극, 영화연출도 하고 신문기자생활도 하면서 그는 노상 집을 나가 떠돌이생활을 하였다.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은 어린 최로사의 눈가에 비극적인 운명을 걸머지고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불행한 인간으로 처량하게 비껴들었다.
어머니 석금성 역시 뛰여난 미모와 재능으로 연극계에서 파문을 일으킨 녀배우였다.
그는 1920년대 후반기부터 연극단체인 토월회, 취성좌, 연극사의 배우로 활동하면서 연극의 주제가들을 불렀다.
그는 1930년경 김안서가 쓰고 전기현이 작곡한 노래 《옛 생각》을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하였다. 그후 무성영화 《젊은이들의 노래》의 주제가 《젊은이들의 노래》를 《리갈》레코드에 취입하였다.
그는 연극배우로 1929년에 남편인 최승일이 쓴 《고향을 떠나는 사람》에 녀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연극배우로서 인기를 끌었다.
이외에 그는 《시들은 방초》, 라운규가 쓰고 연출을 한 《망향가》, 림선규의 작품인 《페허우에 우는 충혼》, 김소량이 쓴 《사주팔자》, 《남편의 결심》을 비롯하여《개화전야》, 《동학당》, 《급수부》, 《눈오는 밤》, 《바람부는 계절》, 《심청전》,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 《한낮에 꿈을 꾸는 사람들》, 《아리랑고개》, 《동백꽃아가씨》, 《약혼》, 《종소리》 등 수많은 연극들에 출연하여 전도양양한 배우로서의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식민지예술인들의 처지가 그러하듯이 최로사의 가정형편도 말이 아니였다.
시부모들과 어린 자식들을 맡아 안고 무대생활을 하던 석금성은 가정적부담과 고달픔으로 하여 가정에 들어앉아버렸다. 그처럼 화려한 성공이 약속된 무대를 버리고 집안에 들어앉은 그의 마음은 괴로웠다.
한편 아버지는 리상향을 찾아 뜨내기풍각쟁이처럼 여기저기 헤매였으나 그 생활 역시 랑만적인것은 못되였다. 그는 그때 가정은 안중에 없이 돈푼이라도 생기면 자신이 운영하는 토월회라는 예술단체에 통채로 내여맡기군 했다.
그러니 근심과 걱정만이 덧쌓이는 생활앞에 어머니의 불만만 높아갔다.
자연스레 집안은 침침한 정적속에 묻히게 되였으며 풀이 죽어 여윈 어머니의 모습은 딸의 가슴에 아픈 상처로 깊숙이 파고들어 앉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도와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에 파묻혀버린 최로사의 침울한 얼굴에는 노상 시름이 실려있었다. 다정다감하고 민감한 소녀의 성정은 끝없이 속생각을 이어가고 그것을 끊임없이 적어나가는데 습관을 붙이게 했다. 이것이 아마도 후날에 최로사로 하여금 문학에 뜻을 두게 한 직접적인 계기로 되였던것 같다.
여기에 도움을 준것은 숙명녀고의 문학교원이였다. 그는 소녀의 일기장과 잡다한 기록들에서 무엇인가 천부적인 재능을 보았으며 그것을 키워주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 과정에 최로사는 자기의 취미에 맞는 흥미있는 세계를 발견하게 되였으며 책읽기와 글쓰기를 비롯한 문학적인 수련을 쌓기 시작하였다.
어느결엔가 우울하던 그의 성격도 밖에만 나오면 깔깔거리며 웃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는 명랑한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궁냥이 넓다며 재능있는 소녀의 재능에 탄복하던 동네사람들은 물론 문학교원도 그의 앞길을 축복해주지 못했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된 땅에서는 아무리 타고난 재능도 무참히 짓밟혀야 했으니 최로사의 운명에 밝은 빛이 흘러들리 만무했다.
언제면 자기도 행복이라는 단어의 꿈같은 현실에 묻힐수 있을가 공상하며 생활의 세파속에 주눅이 들어 살아온 그였다.
하지만 결코 검은구름만이 그의 머리우에 떠있는것은 아니였다.
그가 13살 나던 해 먹장구름은 가셔지고 맑고 창창한 하늘이 펼쳐졌다.
그날은 바로 1945년 8월 15일이였다.
한낮이 되여 오막살이들이 비좁게 들어앉은 골목이 소란스러워 최로사는 방문을 열었다.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모두들 벅적거릴가?)
두려움과 의문이 엇갈린 마음으로 쪽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던 그의 두눈은 휘둥그래졌다. 해빛조차도 얼굴을 들이밀기 저어하는 숨막히는 골안에 크나큰 열광의 화폭이 펼쳐졌던것이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뛰쳐나온 동네사람들이 두손을 높이 쳐들고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한데 모여 거리쪽으로 달려나가는것이 아닌가. 얼마나 목청껏 웨치는지 그들의 웨침소리에 집이 무너질것만 같았다.
(조선독립! …)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언제면 이 나라가 일제의 마수로부터 해방될가 하는 막연한 기대속에 살아온 그였기에 눈앞의 현실은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학교에 나가서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누런 일본군의 군복에 단추를 다는 작업을 하고 돌아온 그였다.
《무슨 일이냐?》
영문을 몰라 묻는 할머니의 물음에 대답할새없이 최로사는 교복을 입고 자기가 다니는 숙명녀고로 달려갔다. 학교에 가면 무슨 소식이라도 귀동냥할수 있을것만 같았던것이다.
교문은 전에없이 활짝 열려져있었다. 꼭 무슨 일이 일어난것만 같았다.
속으로는 제발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독립되였으면 하고 빌었다.
교사에 들어서던 그의 긴장된 낯색은 다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바라던 소원, 기원하던 현실이 눈앞에 다가오는것을 감득할수 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매일 아침 학교에 등교하자마자 제일먼저 허리를 무릎까지 굽히고 경례를 해야 했던 그 저주롭고 히살스럽던 《봉안전》(왜왕의 사진을 넣어두는 집)이 다 마사져있었다. 그리고 그안에 말그대로 《모셔져있던》 왜왕의 칙서 두루마리가 갈기갈기 찢어져 불타고있었다.
먼저 나온 학생들은 그앞에서 《와-아!》 하고 환성을 지르며 춤을 추고있었다. 모두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샘줄기처럼 흘러내리고있었다.
그것은 이전에 볼수 없었던 눈물이였다. 자신들의 운명을 두고 한탄과 한숨속에 지어내던 눈물이 아니라 기쁨과 랑만, 환희에 젖은 눈물이였다.
이윽고 그들은 일본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가슴에 달고 다니던 명찰을 뜯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두발로 마구 짓밟고있었다.
왜놈교원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조선사람인 몇명의 교원들이 학생들과 어울려 눈물을 흘리고있었다. 그중 어느 교원이 학생들에게 웨쳤다.
《너희들의 본래 이름을 대달라. 이제부터 출석부를 고쳐 기록하겠다!》
그러자 저저마다 자기의 본명, 부모들이 지어준 조선이름을 출석부에 올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새롭게 들려오는 이름들이였다.
최로사도 모든것이 꿈같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현실세계에 스스럼없이 말려들어갔다.
그는 앞가슴의 명찰을 뜯었다. 손에 잡힌 그 저주로운 이름을 쏘아보았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대신 일본이름으로 불리우며 살아온 인생, 일본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으로 살며 제 이름과 제 글을 빼앗기고 왜왕에게 매일 절을 하며 조선민족의 넋마저 잃고 살아온 자신이였다.
(이제부터 나는 최로사이다. 일본사람이 아닌 조선사람 최로사로 살아갈테야!)
최로사는 명찰을 바닥에 던지고 발로 짓밟았다.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들은 물론 자신과 동생들에게 인간이하의 생활을 강요한 일제에 대한 울분의 폭발이였다.
《선생님! 제 이름도 써넣어주십시오.》
그는 물기어린 눈을 들어 교원을 바라보았다.
애젊은 교원은 제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의 이름은 최로사입니다. 최- 로- 사-》
《최로사! … 그러니 우리 문학소녀 <종달새>의 이름이 로사였구나!》
동무들도 최로사의 주위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보며 새기고있었다.
최로사!
난생처음 공개적인 석상에서 불리워지고 학교의 출석부에 새롭게 새겨진 세 글자를 내려다보는 소녀의 눈가에서는 참고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인제야 진짜 제모습을 찾은 그였다.
이어 강당에서는 경축모임이 있었다. 모임에서는 학교의 교무주임으로 있던 최씨성을 가진 선생이 연설하였다. 그는 눈물절반 웃음절반이 되여 격조높이 웨치다보니 목이 꽉 쉬여서 나중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는 연설의 마지막에는 목에서 피줄이 튀여나올 정도로 《만세! 만세!》를 웨치기만 했다.
새로 적은 출석부로 이름을 부르는데 누구나 다 《예!》라는 대답대신 습관이 되여 몸에 배인 그대로 《하이!》라고 대답해 모두 폭소를 터쳤고 다시 《예!》 하고 대답하고는 또다시 왕왕 울어대는것이였다.
다시 울음판으로 변한 장내가 진정되자 교무주임선생은 학생자치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 5명을 선출했다. 그리고 각 학급들에서 2명의 간사를 선발하였는데 최로사의 학급에서는 그와 다른 녀동무가 추천되였다.
학생자치위원회모임에 참가하니 이제부터 당면과업은 학생들모두가 일본말을 의식적으로 잊어버리고 조선말로 말하고 책도 읽는 운동부터 벌려야 하므로 위원들과 간사들이 그 앞장에서 동무들을 이끌고나가야 한다는것이였다. 그리고 학교보위사업은 당번을 짜서 교문과 현관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자기 주위에서 너무도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에 최로사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꼭 무슨 반일시위나 동맹휴학 같은 운동이 일어나는것처럼 여겨졌다.
한참후에 교무주임은 우리 나라가 해방된데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제는 일본이 완전히 패망했다는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부터 일본말을 쓰지 않아도 되며 일본이름을 안써도 된다고, 이제부터는 마음껏 우리 나라 말로 공부하고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두들 너무도 희한한 소식이고 또 지금까지 왜놈들에게 짓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지라 눈이 퀭해서 그의 말이 잘 믿어지지 않아 그저 《야!》, 《야!》 하고 감탄만 련발했다.
학생들의 모습을 이윽토록 지켜보던 교무주임은 지금 거리에서는 왜놈군대들이 무장해제당하고있다는데 모두 나가보자고 하였다.
천마디의 말보다 단 한번 보는것이 낫다는 말이 있듯이 최로사는 제눈으로 직접 모든 현실을 보고싶었다. 그래서 그는 동무들과 함께 거리로 달려나갔다.
모든것은 사실이였다. 그 광경은 참으로 가관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조선사람들을 짐승처럼 대하던 왜놈들이 자라처럼 목을 잔뜩 움츠린채 주눅이 들어 비실비실 밀려가고있었다. 그자들은 총들을 한데 모아놓고는 마치 뒤에 무엇이 따라오기라도 한듯 뛰다싶이 걸어갔다.
누구의 선동인지는 모르나 《저 쪽발이놈들을 죽여라!》하는 소리와 함께 돌들이 그놈들에게로 날아갔다. 그것을 기화로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너도나도 돌을 왜놈들에게로 던졌다. 수십년동안 쌓이고쌓인 한을 풀어보려는것이였다. 비발치는 돌을 피하느라 두손으로 대가리를 감싸고 달아나는 놈들의 꼴이 정말 가관이였다.
사람들은 그 무리들을 보면서 생전처음으로 《와하하!》하고 크게 웃었다.
후더운 열기와 뜨거운 열광속에 새봄을 맞은듯 한 환희로 들끓는 해방된 서울거리를 돌아보고난 최로사는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방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그는 저녁식사도 잊고 집식구들에게 자기가 보고 듣고 느낀것을 그대로 터놓았다.
기쁨과 희열에 흥분되여 손세까지 써가며 이야기를 하는 손녀를 할머니는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항상 말이 없던 뚝보가 어쩌면 저리도 구수하게 말을 잘할가!
3. 1인민봉기때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섰다가 일본놈들이 휘두르는 칼에 맞은 상처때문에 고생한 일이 있는 할머니는 손녀를 꼭 그러안았다.
《이제는 우리가 기를 펴고 살게 되였구나!》
8월 15일! 그날 밤은 온 집안, 온 조선민족이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이였다. 마당가에 노전을 깔고 여느때없이 맑게 개인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들은 한숨과 탄식속에 살아온 지난날들을 돌이켜보았다. 모두들 앞으로 자기들의 앞길에 펼쳐질 광휘로운 앞날에 대한 환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며칠후에는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일본에 건너가있던 아버지와 고모 최승희가 집으로 돌아왔다.
최승희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왜색왜풍의 탁류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수하고 민족적인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모대김이 문학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오르던 때에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하는데 성공한 녀성이였다.
그는 민간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기생무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현대조선민족무용발전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그의 무용은 국내에서뿐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프랑스, 도이췰란드 등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고있었다.
이젠 온 가정이 다 모였다. 일제의 압제속에 짓눌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던 집안에는 해방의 기쁨과 더불어 웃음꽃이 사라질줄 몰랐다.
게다가 아버지의 출현으로 가난에 찌들려 기울어진 집안을 버텨줄 기둥을 맞은셈이였다. 최로사에게 있어서 암흑속에 보이지 않던 집안의 앞날을 비쳐줄 한줄기의 빛이였다. 억대우같은 아버지가 있어 등록금은 물론 집세 같은것은 걱정없을것만 같았고 동생들의 입학료도 문제될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봄날의 안개와도 같은것이였다. 미군의 남조선강점은 최로사와 그의 가정에 또다시 먹구름을 들씌웠다.
해방후 남조선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모인 하나의 소굴로 전락되고말았다. 인민들은 조국의 운명을 자기의 손으로 자유롭게 해결할수 있는 해방된 민족으로서의 권리를 미군에게 강탈당하고 오히려 민족반역자, 친일분자들이 모든 정권기관들과 경제, 문화기관들을 장악하고있었다. 하여 남조선은 무법천지로 전락되고 반동과 백색테로가 서울장안에서 횡행하고있었다.
일제통치시기에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투쟁을 하였거나 수년동안 감옥에 투옥되여있던 애국지사들이 또다시 민족반역자, 친일분자들의 독수에 의하여 투옥, 학살되고있었다. 소위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남조선에서는 8. 15기념행사까지도 자유롭게 거행할수 없었다. 이것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미명하에 벌어지고있는 남조선의 현실이였다. 미군정의 비호하에 일제시기의 경찰, 행정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고있었으며 정치, 경제, 문화기관들에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숙청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여 극악한 친일분자들이 친미분자로 둔갑하여 《정권》의 주인으로, 지도자로 자처하여나섰다.
진정한 조선의 문학, 진정한 삶의 품을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갈망하던 아버지와 고모는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진정한 인민의 나라, 인민의 세상으로 나날이 변모되여가고있는 북의 현실이 그들의 마음을 끌게 했던것이다.
더우기 힘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있는 사람은 돈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며 민주를 사랑하는 전민족이 굳게 단결하여 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개선연설을 끓어오르는 격동과 흥분속에 받아안은 그들은 민족의 전설적영웅에 대한 흠모심으로 가슴을 끓였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고모는 후에 집안식구들을 데려가기로 약속하고 북행길에 올랐다.
흉변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땅에서 최로사와 같은 평백성들의 운명은 삶과 죽음의 계선에 선 등불과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월북자가정》이라는 딱지가 붙어 해방후 흥행극단에 적을 두었던 어머니마저 무대에서 쫓겨났으니 그들의 가정에 드리운 구름이란 그대로 악몽이였다.
최로사는 출학처분을 받았고 동생인 최호섭은 나이가 찼어도 입학금이 없어 학교에 못가고있는 형편이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할아버지마저 뇌혈전이라는 중병으로 자리에 드러눕게 되였다.
그의 가정은 쥐면 부스러질 가랑잎같은 신세요, 잔파도만 일어도 뒤집힐 쪽배의 신세였다.
학교조차 다닐수 없게 된 최로사는 어머니를 도와 가정의 무거운 부담을 짊어질 결심을 내렸다.
하루 한끼나 겨우 차례지는 멀건 보리죽마저 집식구들에게 주고 부엌에 돌아앉아 치마폭으로 눈굽을 찍군 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의 가슴속에 큼직한 응어리로 들어앉기 시작했던것이다.
석금성이라는 이름만 불러도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연극계에서 늘 주역만을 담당해온 유명한 배우의 운명이 이렇듯 비참한 처지에 놓이고말았던것이다.
최로사는 어머니를 도와 집식구들이 세끼 보리죽이라도 번지지 않게 해보리라는 소박한 생각으로 어머니 몰래 서울 종로에 있는 극장으로 갔다.
원래 인물이 남달리 빼여난 최로사는 여러 극단들에서 눈독을 들이고있는 대상이였다. 사내들의 눈뿌리를 뽑아내는 미모와 그가 겸비한 성악가로서의 기질, 독특한 화술이면 얼마든지 예술계에서 인차 두각을 나타낼수 있었다.
최로사는 래일에 대한 공상을 불러일으키는 기대감을 안고 인물심사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곧 후회의 회오리가 그의 두뇌를 뒤흔들었다.
속옷까지 벗기우며 육체를 검열받아야 하였던것이다. 난생처음 당하는 수치라 그는 주춤거렸다. 그러나 눈앞에는 가정의 무거운 부담에 치워 고생하는 어머니와 돈이 없어 나이가 차도록 학교문전에 가지 못하는 동생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만은 참아야 한다.)
참기 어려운 시험에서 합격된 그는 선금 만원을 받아쥐게 되였다. 난생처음으로 이렇듯 엄청난 돈을 손에 쥐여본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피여올랐다.
그 돈이면 동생을 야간중학교에 넣을 입학금과 끼니거리도 마련할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유명한 배우가 되면 집살림이 허리를 펼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이 돈을 받으세요.》
발걸음도 가볍게 나는듯이 집에 돌아온 최로사는 어머니에게 돈을 내밀었다.
석금성은 돈과 딸의 얼굴을 의문짙은 눈길로 번갈아보았다.
《어데서 이렇게 많은 돈이 생겼느냐?》
최로사는 자랑스럽게 모든 사연을 터놓았다.
《나도 어머니처럼 배우가 될 결심이예요.》
얼굴에 천진한 웃음을 띠우며 말하는 딸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안면근육은 시꺼멓게 죽어갔다. 대뜸 손에 든 돈을 마당가에 집어던졌다.
《네년이 미쳤구나!》
어느결에 어머니의 거치른 손이 최로사의 뺨에서 철썩 소리를 울렸다.
《엄마! …》
얼얼한 볼을 감싸고 최로사는 눈물이 일렁이는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무엇때문에 자기가 매를 맞아야 하는지, 어째서 어머니가 저렇듯 노여워하는지 도저히 알수 없었다.
석금성은 두손으로 땅바닥을 내려치며 통곡했다.
《네가 어디에 발을 들여놓았어, 어디에?! … 이 세상에서 배우란 한갖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는것을 그래 네가 모른단 말이냐? …》
가슴을 두드리며 설분을 토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최로사는 그때에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어느해인가 석금성이 번역극 《동백꽃아가씨》의 주역을 맡았을 때였다.
삼복더위속에서 만삭이 된 배를 칭칭 동이고 무대에서 그 몸을 뒤틀며 기구한 운명을 마치는 녀주인공의 연기를 할 때면 객석에서 흐느낌소리가 터지군 하였다. 그런데 눈물의 분수가 터지는 그 순간 쾌락을 느끼던 객석의 미군들이 그에게 뽈같은 사과알을 던졌다.
자감에 빠져 연기에 열중하던 석금성은 강한 타격으로 인한 아픔으로 그만 무대우에 쓰러지고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객석에서 미군의 휘파람소리, 웃음소리, 악청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렸다.
주인공의 운명을 두고 눈물을 흘리던 관중들은 그자들의 만행에 증오의 눈길을 보냈지만 어쩌지 못했다.
바로 지금까지 수십년간의 배우생활에 이런 모욕과 천대를 수없이 당해온 어머니로서 그 진탕에 들어서려는 딸의 행동을 두고 어찌 분통을 터치지 않을수 있으랴.
《엄마! 내가… 내가 잘못했…》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잘못을 비는 딸을 부여안고 계속 오열을 터치였다.
《이 철없는것아, 악극단 녀배우의 생활이 어떤것인지 알기나 하느냐? 온갖 수모와 천대속에 청춘을 빼앗겨야 하는거다. 너를 그런데 보내고 이 에미가 살아 무엇하겠니. 차라리 죽고말겠다.》
어머니는 딸을 뿌리치며 일어났다.
최로사는 겁이 덜컥 나서 어머니의 다리를 꼭 부여잡았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으니 제발 용서해줘요. 예? 어머니!》
꼭 매달린 딸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어머니는 머리를 들어 비구름 밀려드는 하늘가를 넋없이 바라보았다. 사람으로 태여나 살기를 거절해야 하는 이 남조선에서 저 어린것들이 어떻게 살아갈가 하는 암담한 생각에 눈앞이 새까매졌다.
《내가 일제때부터 배우노릇을 해왔다만 그게 얼마나 큰 화근이였고 그로 하여 어떤 곡절많은 운명의 길을 걸어오게 되였는지 아느냐. 이 세상에서는 녀자에겐 재간이 화근덩이고 미인박명이란 소리를 못들었느냐, 로사야! 넌 절대로 문학이나 예술은 하지 말아라.》
파란만장의 한생에 대한 총화라고 할수 있는 그 당부앞에 최로사는 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자기의 꿈과 희망을 도저히 피워볼수 없는 불모의 땅에 대한 원망은 자연히 아버지와 고모가 간 북에 대한 호기심으로 뒤바뀌게 되였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란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찾아주신 전설적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북에서 인민을 위한 정치를 펴신다는 이야기뿐이였다. 그곳에서는 토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고 모든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 얼굴의 주름발을 펴고 살아간다는것이였다.
과연 세상에 그런 나라도 있을가?
밤을 새워가며 상상해보았지만 도저히 그 륜곽을 그려볼수 없는 땅이였다.
아버지가 하루빨리 집에 와서 모두를 데리고 갔으면 하는 생각뿐이였다.
며칠후 어머니는 딸 최로사와 아들 최호섭을 데리고 서울역에 나왔다. 북으로 자식들을 떠나보내려는것이였다.
《로사야, 길이 막혀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러 못오지만 어쩌겠니. 녀자가 인물있고 재간이 있을수록 더 짓밟히는 이 세상이니… 나도 늙으신 부모님과 네 동생들만 아니라면 너와 함께 평양으로 가고싶다만…》
최로사는 쏟아져나오는 눈물을 억제하며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어머니, 무사히 분계선을 넘게 될거예요. 내가 인츰 아버지와 함께 모두 데리러 올게요. 그동안 몸성히…》
말끝은 흐려들고 하늘도 우는지 찬비를 뿌리고있었다.
최로사는 후날 남쪽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때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 어머니! 그날이 1948년 3월 3일이였지요. 보슬비가 하염없이 내리던 스산한 서울역두에서 제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평양으로 떠나던 그날에도 어머니는 곧 뒤따라오시겠다며 저에게 문학예술의 길에 들어서면 절대로 안된다고 거듭 당부하셨지요.
차창가에서 멀어져가는 어머니모습이 아슴푸레한 점으로 사라질 때 그 순간이 이 딸에게 준 어머니의 사랑, 이 딸의 장래를 위해 줄수 있는 어머니마음의 종착점으로 새겨질줄은 나는 미처 몰랐어요. …》
이리하여 최로사는 동생 최호섭을 데리고 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바로 이것이 최로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운명의 선택이였다는것을 그로서는 그때까지 다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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