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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노래속에 꽃피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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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08 15:50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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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1. 노래로 빛나는 삶

 

 

 

∙ 1932년 9월 21일 서울시 동대문구에서 출생.

∙ 1950년 의용군으로 입대.

∙ 1951년 평양음악대학(당시) 입학.

∙ 1957년 외국류학.

∙ 1960년 함경남도가무단(당시) 성악배우로 활동.

∙ 1966년 영화 및 방송음악단(당시) 성악배우로 활동.

∙ 1971년 피바다가극단 성악배우로 활동.

∙ 1982년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성악학부 교원, 학부장으로 사업.

∙ 2015년 11월 16일 사망.

∙ 인민배우.

 

 

가을도 저물어 찬바람 분다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 동포를

그 누가 광야에서 구원해주랴

일어나라 대장부야 목숨을 걸고

감옥도 죽음도 두렵지 않다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

 

이 가요는 위대한 정일장군님께서 몸소 지도하여주신 조선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의 주제가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이다.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의 군화에 짓밟힌 남녘동포들을 구원하고 분렬의 비극을 끝장내자면 피끓는 청년남아들이 철창도, 단두대도 두려움없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격조높이 토로한 노래, 조국통일의 열기를 북돋아주는데 이바지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인민배우 전우봉이다.

 

그뿐이 아니다.

 

조선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의 주제가 《장군님이 그리워》와 《남산의 푸른 소나무》, 《눈이 내린다》, 《아수령님품이여》 등 그가 형상한 가요는 무려 수백곡에 달한다.

 

그가운데는 제국주의자들의 가증되는 침략책동을 단호히 짓부시며 조국의 초소를 금성철벽으로 지키고있는 용감한 인민군초병들이 즐겨 부르는 가요 《초소에 수령님 오셨네》도 있다.

 

왕년의 시절 가사발음과 음악적표현의 정확성, 감정표현의 진실성과 섬세성으로 하여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전우봉도 이제는 우리곁에 없다.

 

그러나 조국력사에 금문자로 새겨진 천리마시대를 순결한 량심과 성실한 땀으로 빛내인 로세대들과 할아버지, 아버지들로부터 영광의 그 시대를 전설처럼 들으며 자라난 젊은 세대들은 지난 세기 1960년대와 1970년대, 1980년대에 수많은 명곡들을 불러 인민들을 기쁘게 해주던 그를 잊지 않고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18살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가 어떻게 온 나라가 다 아는 성악가수로, 인민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참된 인간으로 성장할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몹시 알고싶어한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따뜻한 품속에서 노래와 더불어 한생을 긍지높이 빛내여온 전쟁로병, 인민배우 전우봉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노래속에 꽃피는 생활

 

사랑은 인간을 아름다워보이게 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됨이 착하고 허영을 모르는 전우봉은 배우자 역시 자기에게 어울리는 대상을 택하였다.

함경남도 단천군(당시)태생인 김송월은 몸매가 날씬하고 마음씨도 비단결같은 처녀였는데 그때 함경남도가무단 무용배우로 있었다.

어느날 처녀는 한 청년이 동료들의 끈질긴 청에 못이겨 무대에 오르는것을 보았다.

얼굴이 깨끗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한 청년은 손동작은 거의 없고 오직 발끝과 발뒤축으로 장단을 맞추면서 경쾌하게 춤추기 시작하였다.

난생처음 보는 춤이였는데 락천적인 해병들이 근무의 여가에 갑판에서 추면 좋을것 같았다. (후에 알고보니 그것은 타프춤이였다.)

박자에 맞추어 두다리를 률동적으로 움직이는 그 청년의 모습은 호기심많은 처녀무용배우들의 눈길을 모았다.

송월의 옆에 앉은 두 처녀가 소곤거렸다.

《저 동문 고향이 남쪽이래.》

《그럼 독신이겠구나.》

《응, 어머니랑 형제들은 모두 남쪽에 있다나봐.》

퇴근길에 오른 송월의 귀전에는 동료들의 이야기가 쟁쟁히 울렸다.

독신, 남쪽에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

처녀의 가슴속에 동정의 초불이 반짝 켜졌다.

(독신이라니 빨래도 다림질도 다 그 동무가 하겠지, 아마 명절날에 찾아오는 사람도 없을거야. 그러니 얼마나 외로울가!)

생각 같아서는 빨래도 해주고 별식도 가져다주고싶었다.

하지만 남들이 자기의 성의를 오해할가봐 두려웠다. 게다가 7년이라는 나이차이도 그의 앞에 놓인 차단봉이였다.

그런데 그 총각은 어느새 처녀의 가슴속에 슬그머니 들어앉고있었다.

그가 알고있는바에 의하면 전우봉은 가무단에 배치받자마자 가극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주인공역을 훌륭히 수행하여 관중들의 호평을 받은 전망성있는 성악배우였다. 또한 인정미도 많아 동무들의 사랑을 받고있었다. 그런 총각을 마다할 처녀는 없을것이다. 과연 어떤 처녀가 그의 배우자로 될가?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저도모르게 얼굴을 붉히였다.

마침 어두운 밤이여서 누가 보지 않은게 천만다행이였다.

몇달후 김송월은 가무단 총장이 찾는다는 련락을 받았다.

총장방에 들어가니 뜻밖에 전우봉이 먼저 와있었다.

그에게 눈인사를 보내는데 상대방은 당황해하더니 인츰 방을 나서는것이였다.

(저 동무가 왜 저럴가?)

총장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이자 그 동무가 어떻소?》

《네?》

그제야 처녀는 자기를 부른것이 전우봉을 소개해주기 위해서였다는것을 알았다.

부끄러워서 어쩔줄 몰라하는데 총장이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동무도 알겠지만 전우봉동무는 어버이수령님의 품을 찾아 공화국으로 들어온 훌륭한 청년이요. 난 혹시 동무가 전우봉동무와 일생을 같이하면 어떤가 해서 불렀소. 물론 강요하는건 아니요.》

김송월은 생각해보겠다고 겨우 대답하고 방을 나섰다.

집에 돌아온 그는 잠들지 못하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한창나이인데 벌써 무대를 떠나고싶지 않았다. 만약 가정을 이루면 아이가 생겨날것이고 그러면 싫든좋든 무용을 그만두어야 한다. 보다 중요한것은 전우봉이라는 청년에 대한 파악이 없다는 사실이였다.

했으나 이상하게도 총장의 말이 귀전을 맴돌았다.

그 절절한 이야기를 되새길수록 가슴속에 쌓아올렸던 상대방에 대한 경계심이 봄날의 눈석이마냥 무너지고있었다.

처녀는 호 하고 긴숨을 내그었다. 끝내 전우봉의 제일 가까운 사람으로, 일생의 반려자가 되기로 결심한것이다.

그렇다. 그는 다름아닌 천리마시대의 청춘이였다!

한달후 그들은 만사람의 축복속에 결혼하였다.

사랑과 정으로 한껏 충만된 젊은 부부였지만 아쉽게도 갈라져 생활한적이 더 많았다.

그무렵 안해는 어느 한 무용극의 주인공역을 하였는데 오늘은 그가 공연을 떠나고 또 며칠후에는 남편이 순회공연을 가군 하였다.

이렇게 서로 엇바뀌다보니 한달에 두세번이나 겨우 만나는 정도였으나 부부간의 금슬은 한쌍의 원앙새마냥 좋았다.

하루는 지방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김송월이 방문을 열다말고 깜짝 놀라 굳어졌다. 방안이 온통 벌레투성이였던것이다.

비자루를 들고 방바닥을 쓸면서 보니 침대밑에 썩은 대추가 한벌 깔려있었다.

벌레들은 바로 거기에서 엉금엉금 기여나오고있었다.

알고본즉 대추는 남편이 안해에게 주려고 사놓았는데 순회공연날자가 연기되여 자기가 늦게 오는 바람에 몽땅 썩고만것이였다.

남편은 영화 및 방송음악단으로 소환된 다음에도, 피바다가극단에 들어갔을 때에도 아침에는 남들보다 먼저 출근하고 밤에는 제일 늦게 퇴근하군 하였다.

혁명가극 《피바다》 형상창조를 할 때에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김송월은 언제 한번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밤늦게 들어와 잠자는 아이들의 머리를 쓸어주는것이 고작인 남편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 장군님의 믿음에 보답하려는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전우봉은 가정생활뿐아니라 사업에서도 책임성이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였다.

혁명가극들인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를 창조하던 나날 그와 함께 배우생활을 한 동료들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 김기원(혁명가극 《피바다》의 어머니역)

《전우봉동무는 책임성이 강한 배우였습니다.

그는 혁명가극 <피바다> 공연출연을 모든 사업과 생활의 첫자리에 놓고 진행하군 하였답니다. 공연이 없을 때에는 주단역조 조장으로서 배우들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아글타글 노력하군 했지요.

지금도 신인배우들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 애쓰던 전우봉동무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 류영옥(혁명가극 《피바다》의 갑순역)

《그는 원칙이 강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주단역조 조장으로서 위대한 장군님께서 세워주신 공연기준을 어기는 현상에 대해서는 크든작든 타협할줄 몰랐습니다. 한마디로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받들어 예술부문에 한생을 바친 충직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 조경임(혁명가극 《피바다》의 원남역)

《전우봉동지는 고지식한분이였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례증하는 한가지 일화가 오늘도 전해지고있다.

만수대예술단이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공연차로 이웃나라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젊었을 때부터 위병으로 고생하던 전우봉은 몸이 약하여 공연에 출연할 때면 의상안에 두꺼운 조끼를 입군 하였다. (그 조끼는 후날 인민배우 황민우에게 넘어갔다.)

그는 배우의 몸이 튼튼해야 혁명가극의 품위를 높이고 나아가서 조국의 명예도 떨칠수 있다고 하면서 위가 좋지 못하였지만 의식적으로 하루식사를 꼭꼭 하군 하였다.

결국 전우봉은 맡은 역형상을 훌륭히 수행할수 있었다.

한편 전우봉은 본의아니게 동료들을 즐겁게 해준 희극배우이기도 하였다.

언제인가 피바다가극단이 어느 한 공연장소로 가는 길에 있은 일이다.

주단역조 조장인 전우봉은 달리는 뻐스안에서 성원들의 출석을 불렀다.

다들 제꺽제꺽 대답했는데 한사람만은 두번세번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전우봉동무! … 전우봉동무! …》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왜들 웃소?》

류영옥이 보다못해 《아, 전우봉이야 바로 조장동무이름이 안예요.》 하고 튕겨주었다.

그제야 전우봉은 손으로 이마를 툭 치며 《아, 이 사람은 나지.》 하고 멋적게 웃었다.

한번은 비가 억수로 내리는데 우산을 옆구리에 낀것도 모르고 손수건으로 머리우를 가리우고 뛰여가는통에 동료들을 한바탕 웃기였다.

그의 유명한 건망증에 대하여 말하자면 끝이 없다.

그렇지만 전우봉은 공연도중 가사나 연기형상을 틀리게 부르거나 빼놓은적이 한번도 없었다.

너그럽게 봐준다면 그의 건망증은 위대한 장군님의 믿음에 보답하기 위하여 시간을 아껴 노래가사를 외우고 연기형상을 무르익히느라고 고심하던 나머지 빚어낸 즐거운 실수인것 같다.

전우봉은 모든 면에서 솔직하고 허영을 모르는 가장이기도 하였다.

영화 및 방송음악단에서 소해금연주가로 있던 그의 맏딸 전화심은 악기도 잘 탔지만 노래도 수준있게 불렀다.

하루는 동료들이 그더러 아버지처럼 성악을 하라고, 그러면 성공할것이라고 권고하였다.

딸의 이야기를 들은 전우봉은 도리머리를 저었다.

《화심아, 넌 성악을 하면 성공하지 못한다. 난 네가 그냥 소해금을 연주하는것이 좋을것 같구나.》

하지만 전우봉은 자식들가운데 자기의 뒤를 이을 성악가가 없는것을 두고 몹시 아쉬워하였다.

그는 일루의 희망을 외아들인 전철우에게 걸었는데 아버지의 마음을 알리없는 철부지는 그림에 정신이 팔려서 돌아갔다.

언제 보나 방안에는 온통 그림을 그린 종이장들과 연필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녔다.

전우봉은 강심을 먹고 아들에게 발성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볼에 밤알을 잔뜩 물고 마지못해 발성훈련을 하였고 나중에는 동무네 집에 숨어있다가 밤늦게 들어오군 하였다.

아무리 닥달질해도 소용없었다.

마침내 전우봉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물러났다.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달후 지방에 출장갔던 전우봉은 그림그리는데 필요한 고급연필들을 한줌이나 가지고 왔다.

그런데 아들애는 벌써 그림을 줴던지고 다른 놀음에 열중하고있었다.

평시에 성을 내본적 없는 전우봉이였지만 그날만은 마지막 한자루가 남을 때까지 연필을 뚝뚝 꺾어버렸다.

겁에 질려 그 모습을 바라본 아들은 다음날부터 그림그리기에 전심하였으며 오늘은 만수대창작사에서 미술가로 일하고있다.

맏딸은 세상떠난 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하였다.

《언제인가 저의 배우자문제가 제기되였을 때였습니다.

대상자는 상업대학(당시) 교원이였는데 전 아버지에게 사람을 파악해봐야 하지 않겠는가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대학교원이라면 알아볼 필요도 없다. 사업과 생활이 건전하지 못하면 대학교원을 못한다. 그 사람이 교원이라니 난 찬성이다. 봐라, 나도 대학교원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습니다.》

무대와 가정에서 그렇듯 책임성있고 솔직하며 검소한 전우봉이였지만 가슴속에는 언제나 민족분렬의 아픔으로 끓어번지고있었다.

전우봉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우리 집에는 가족사진이 한장 있다.

이 사진이 바로 내가 1985년 예술단 및 고향방문단 성원으로 서울에 나갈 때 어머니와 형님을 만나서 주려고 했으나 도로 가지고 돌아온것이다. 이 사진을 볼 때면 둘로 갈라진 조국의 아픔이 가슴을 친다. …》

1985년 9월 전우봉은 예술단 및 고향방문단 성원으로 남쪽에 나갔었다.

평양을 떠나기 전날 그는 어머니가 살아계시는지 몰랐지만 무작정 가족사진과 어머니 생일 60돐과 70돐, 80돐에 마련해놓고 보내지 못한 옷감들을 꺼내 가방속에 정히 넣었다.

미군이 거만하게 두다리를 뻗치고 서있는 원한의 군사분계선을 넘어설 때 전우봉은 조상대대로 한지맥을 이어오는 유구한 삼천리강토를 둘로 가른 침략자들에 대한 증오가 화산처럼 끓어올랐다.

한편 공화국의 동포애적인 조치로 마련된 이번 고향길에 어머니와 맏형, 조카들을 만날 기쁨으로 가슴이 들먹이였다.

그러나 그 희망은 깨여지고말았으니 고향방문단이 서울에 도착하자 남측에서는 전우봉을 비롯한 여러 상봉자들의 가족, 친척이 없다고 통지하였던것이다.

우리측은 남측의 무성의한 태도에 항의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방문일정을 마치고 돌아오기 전날이였다.

송별연회가 끝난 뒤 전우봉은 방문단성원들과 함께 호텔승강기쪽으로 향하였다.

그때 호텔복도에 몰켜서있던 남조선사람들속에서 누군가 《혹시 한용범씨가 안예요?》라고 다급히 소리치는것이였다.

전우봉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쉰살이 훨씬 넘었을 녀인과 젊은 청년이 안타깝게 바라보고있었다.

옆에 서있던 남측 안내원이 《전우봉선생, 빨리 승강기에 탑시다.》라고 재촉하였다.

전우봉은 듣지 못한듯 그 녀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녀인은 《맞구나, 용범삼촌! 내 형수요.》 하고 와락 울음을 터쳤다.

그가 바로 35년전 어머니와 함께 의용군으로 떠나는 시동생을 바래주었던 형수였다.

두사람은 너무 반가와 마구 얼싸안았다.

전우봉은 형수를 붙들고 어떻게 날 찾았는가고 물었다.

형수의 말이 야외TV로 북측 고향방문단 성원들을 보았는데 그중에 시동생 비슷한 사람이 있더라는것이였다. 그래서 북측성원들을 눈여겨보았는데 아무래도 분명한것 같아 찾아왔다고 한다.

전우봉은 억이 막혔다. 형수와 조카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남측은 그에게 친척들이 하나도 없다고 통지했던것이다.

그들의 상봉을 지켜보던 우리 기자들이 두사람을 둘러싸고 승강기에 올랐다.

승강기안에서 전우봉은 형수에게 어머니랑 맏형이랑 어떻게 되였는가고 물었다.

형수는 한숨을 꺼지게 내쉬며 어머니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고 아득바득 돈을 벌어서 동생을 학교에 보내주었던 맏형도 두해전에 심장병으로 눈을 감았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청년을 가리키며 《참, 이애가 조카예요.》라고 알려주고는 품속에서 가족사진을 꺼내려고 서둘렀다.

전우봉은 자기도 북에 있는 가족들의 사진과 기념품들을 가지고 왔는데 방에 가서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승강기문이 열리자 어느새 련락을 받았는지 남측성원들이 달려들어 전우봉과 우리 기자들을 끌어내려고 하였다.

한쪽으로는 형수와 조카를 승강기에 강제로 붙잡아두었다.

전우봉은 남조선당국의 반인륜적이며 비렬한 처사에 격분을 금치 못하면서 누가 진정으로 통일을 바라고 누가 통일을 악랄하게 반대하는가를 통절히 체험하였다.

다음날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자식들에게 조카들의 이름을 한명한명 알려주며 조국이 통일되면 꼭 찾으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아마도 전우봉이 노래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를 그중 사랑한것은 조국통일에 대한 열망이 남달리 강하였기때문일것이다. …

팔십을 넘긴 전우봉은 공훈국가합창단과 모란봉악단, 청봉악단에서 새롭게 형상한 노래들을 들을 때마다 새 세기 음악예술을 세계적수준에로 올려세워주신 또 한분의 위인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

특히 조선로동당창건 70돐을 맞으며 아름다운 대동강우에 펼쳐진 화려한 무대우에 나선 공로있는 로배우들을 본 그는 이제는 몸이 예전과 같지 않아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을 음악예술로 받들지 못하는것을 두고 몹시 안타까와하였다.

해솟는 아침이나 달뜨는 저녁이나 음악의 세계속에서 세차게 높뛰던 전우봉의 심장은 2015년 11월에 고동을 멈추었다.

경애하는 김정은원수님께서는 김원균명칭 음악종합대학 성악학부 전 교원인 인민배우 전우봉의 서거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시하여 고인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주시였다.

뿐만아니라 조국과 인민을 위한 헌신의 길을 걷고 또 걸으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고인의 유가족들이 삼가 올린 편지도 친히 보아주시였다.

유가족들과 고인의 친지들, 전쟁로병들은 떠나간 전사를 잊지 않으시고 육친적인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경애하는 원수님의 숭고한 의리의 세계에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영생하는 삶을 누리는 그의 한생을 감회깊이 추억하였다.

그렇다. 절세위인들의 품속에서 참다운 인생의 노래를 찾았고 어머니조국을 위하여 한생을 바쳐온 전쟁로병, 인민배우 전우봉은 그자신이 생전에 부른 수많은 노래들과 더불어 인민들의 추억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1-08 15:51:14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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