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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위인의 손길에 이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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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7-01-01 20:56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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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1. 노래로 빛나는 삶

 

 

 

∙ 1932년 9월 21일 서울시 동대문구에서 출생.

∙ 1950년 의용군으로 입대.

∙ 1951년 평양음악대학(당시) 입학.

∙ 1957년 외국류학.

∙ 1960년 함경남도가무단(당시) 성악배우로 활동.

∙ 1966년 영화 및 방송음악단(당시) 성악배우로 활동.

∙ 1971년 피바다가극단 성악배우로 활동.

∙ 1982년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성악학부 교원, 학부장으로 사업.

∙ 2015년 11월 16일 사망.

∙ 인민배우.

 

 

가을도 저물어 찬바람 분다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 동포를

그 누가 광야에서 구원해주랴

일어나라 대장부야 목숨을 걸고

감옥도 죽음도 두렵지 않다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

 

이 가요는 위대한 정일장군님께서 몸소 지도하여주신 조선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의 주제가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이다.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의 군화에 짓밟힌 남녘동포들을 구원하고 분렬의 비극을 끝장내자면 피끓는 청년남아들이 철창도, 단두대도 두려움없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격조높이 토로한 노래, 조국통일의 열기를 북돋아주는데 이바지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인민배우 전우봉이다.

 

그뿐이 아니다.

 

조선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의 주제가 《장군님이 그리워》와 《남산의 푸른 소나무》, 《눈이 내린다》, 《아수령님품이여》 등 그가 형상한 가요는 무려 수백곡에 달한다.

 

그가운데는 제국주의자들의 가증되는 침략책동을 단호히 짓부시며 조국의 초소를 금성철벽으로 지키고있는 용감한 인민군초병들이 즐겨 부르는 가요 《초소에 수령님 오셨네》도 있다.

 

왕년의 시절 가사발음과 음악적표현의 정확성, 감정표현의 진실성과 섬세성으로 하여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전우봉도 이제는 우리곁에 없다.

 

그러나 조국력사에 금문자로 새겨진 천리마시대를 순결한 량심과 성실한 땀으로 빛내인 로세대들과 할아버지, 아버지들로부터 영광의 그 시대를 전설처럼 들으며 자라난 젊은 세대들은 지난 세기 1960년대와 1970년대, 1980년대에 수많은 명곡들을 불러 인민들을 기쁘게 해주던 그를 잊지 않고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18살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가 어떻게 온 나라가 다 아는 성악가수로, 인민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참된 인간으로 성장할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몹시 알고싶어한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따뜻한 품속에서 노래와 더불어 한생을 긍지높이 빛내여온 전쟁로병, 인민배우 전우봉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위인의 손길에 이끌려

 

태양은 어제도 오늘도 지구를 비친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우봉에게 돌려주신 어버이수령님의 뜨거운 사랑은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에 의하여 변함없이 이어졌다.

1971년 7월 3일이였다.

그날 영화 및 방송음악단 성악배우 전우봉은 한 일군으로부터 위대한 장군님께서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를 혁명가극으로 옮기는 창조집단의 한 성원으로 자기를 불러주시였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그의 가슴은 바람을 안은 돛폭처럼 세차게 부풀어올랐다.

인류가극예술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놓을 혁명가극 《피바다》창조소식을 들을 때마다 (언제면 나도 혁명가극무대에 서볼수 있을가?) 하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런데 뜻밖에 장군님께서 혁명가극 《피바다》창조집단의 한 성원으로 불러주신것이다.

얼마후 평양대극장에 이른 전우봉은 다시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당과 국가의 전반사업을 돌보시는 그 바쁘신 가운데서도 하루에 몇차례씩 가극창조현장에 나오시여 창조과정을 지도하여주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 혁명가극 《피바다》의 정치공작원역을 다름아닌 자기에게 맡겨주시였다는것이 아닌가.

전우봉은 눈굽이 확 달아올랐다.

그 감격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눈굽을 훔치며 하늘같은 그 믿음에 꼭 보답하리라 결심하였다.

형상창조로 언제 날이 저물고 해가 밝아오는지 알지 못하던 어느날이였다.

한 일군이 급히 들어오더니 위대한 장군님께서 혁명가극 《피바다》의 어머니와 정치공작원의 노래를 들어보시겠다고 하신다고 알려주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의 무아경속에 잠기면 주위세계를 감감 잊군 한다.

전우봉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였다.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위대한 장군님을 몸가까이 뵈옵고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고싶은것은 그의 간절한 소원이였다. 하지만 막상 영광의 시각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그는 마음을 끝내 진정하지 못한채 장군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향하였다.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서니 수수한 회색옷을 입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 일군들과 창작가들에게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고계시였다.

이윽고 전우봉을 알아보신 장군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전우봉동무입니까? 록음을 통해서는 많이 들었는데 만나보기는 처음입니다. 》라고 겸허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전우봉은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아주시고나서 그럼 공작원의 노래를 한번 들어보자고 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이 어찌나 소탈하였는지 전우봉은 힘껏 잡아당긴 바이올린줄처럼 팽팽하던 긴장감이 스르르 풀리는것을 느꼈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새로 작곡한 정치공작원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주의깊이 들으신 장군님께서는 일군들과 창작가들에게 노래에 대한 의견을 물으시더니 전우봉에게 노래가 어떤가, 부르는 사람의 마음에 드는가고 물으시였다.

전우봉은 당황해하며 미처 대답을 올리지 못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자애에 넘친 음성으로 노래는 부르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고 하시며 노래가 부르기에 어떤가고 거듭 물으시였다.

그때에야 전우봉은 부르기 쉽고 편안한것 같다고 겨우 대답을 올렸다.

그러자 장군님께서는 마음이 놓이신듯 수고했다고 하시며 무대에서 다시 들어보자고 이르시였다.

얼마후 무대에 오른 전우봉은 혁명가극 《피바다》 제2장의 정치공작원역을 형상하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노래가 끝나자 저 동무가 노래를 잘한다고, 가사도 똑똑히 전달되고 연기도 섬세하게 잘한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를 주시였다.

전우봉은 눈물을 머금고 변변치 못한 자기의 노래를 들어주시고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주시는 장군님의 존안을 오래도록 우러러보았다. …

그해가 저물어가던 12월의 어느날이였다. 자정도 훨씬 넘은 깊은 밤, 한대의 승용차가 어둠에 잠긴 평양의 거리를 미끄러지듯 달리고있었다.

뒤좌석에 앉아 손수건을 연방 눈가로 가져가는 전우봉의 눈앞에는 그날 저녁에 있었던 일이 영화필림처럼 스쳐지나갔다.

저녁무렵 혁명가극 《피바다》창조집단의 지휘성원들과 주단역조 성원들은 뜻밖에 위대한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장군님께서는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며 동무들이 수고한 보람이 있어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렸다고, 수령님께 기쁨을 드리는것보다 더 큰 영광이 또 어디 있는가고 하시며 몹시 만족해하시였다.

이어 그이께서는 노래를 한곡 들어보자고 하시며 전우봉에게 어서 불러보라고 하시였다.

전우봉은 솟구치는 격정을 눅잦히며 어느 노래를 불러드려야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겠는가 생각하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다정하신 음성으로 《초소에 수령님 오셨네》를 부르라고, 《눈이 내린다》도 잘된 노래이니 어서 부르라고 말씀하시였다.

전우봉은 가슴이 뜨거워올랐다.

사실 《초소에 수령님 오셨네》와 《눈이 내린다》는 장군님께서 높은 사상예술적수준에서 형상하도록 지도하여주신 노래들이였다.

뿐만아니라 그이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진행하는 예술공연무대에서 전우봉이 그 노래들을 부르도록 해주시였으며 밤늦게 방송으로 내보내도록 해주시였다. 그런데 오늘은 자식의 성장을 대견하게 여기는 친어버이심정으로 고무해주시는것이 아닌가.

그는 자기를 태양을 노래하는 가수로 내세워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은덕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노래들을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장군님께서는 잘 불렀다고 거듭 말씀하시며 과분한 치하를 해주시였다.

끝없는 감격에 휩싸이는 순간 전우봉의 눈앞에는 남녘에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우렷이 떠올랐다.

(아, 어머니가 지금의 나를 보셨으면…)

조국해방전쟁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그는 어머니와 맏형, 조카들이 살고있는 집에 들리지 못하고 서울을 떠나왔었다. 그때는 인차 고향으로 돌아갈것이라고 여기고 내짚었던 그 걸음이 수십년세월을 에돌줄을 어찌 알았던가.

모름지기 어머니는 이밤도 북으로 간 셋째아들을 걱정하고계실것이다.

(어머니, 마음놓으십시오. 전 지금 위대한 태양의 품속에서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던 이름있는 성악가수로 자라났습니다!)

꿈같은 밤, 제발 지새지 말아달라고 빌고 또 빌고싶은 영광의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자정이 훨씬 넘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배우들이 돌아갈 때에는 친히 전우봉을 부르시여 자신의 승용차로 집에까지 보내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렇게 되여 그는 지금 사랑의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있었다. …

그후에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노래를 잘한다고 치하해주시였으며 전우봉이 속한 만수대예술단이 외국공연을 위해 조국을 떠날 때에는 친히 비행장에까지 나오시여 바래워주시였다.

우리는 이 기회에 인민배우 전우봉에게 돌려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중에서 한가지 사실만을 더 전하려고 한다.

1973년 7월 어느날이였다.

그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공연을 위하여 어느 한 나라에 가게 된 만수대예술단 성원들과 함께 전우봉도 친히 불러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예술단성원들의 이름을 한사람한사람 불러주시였다.

그러시다가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의 황로인역으로 전우봉의 이름을 친히 부르시는것이였다.

전우봉은 혹시 자기가 잘못 듣지 않았는가싶었다.

(내가 혁명가극 《피바다》의 창조성원으로 참가한것만도 영광스러운 일인데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의 주단역조 성원으로 불러주시다니…)

장군님께서는 웃으시며 그에게 《동무는 황로인역을 하시오.》라고 교시하시였다.

이윽고 예술단성원들의 이름을 다 부르신 장군님께서는 사업과 생활을 잘할데 대하여 세심히 가르쳐주시면서 예술단이 떠날 때까지 아직 시일이 좀 있는것만큼 작품의 형상수준을 높이기 위한 련습을 강화하여야 하겠다고, 특히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의 일부 배역들을 바꾼 조건에서 시간을 아껴가며 련습에 열중하도록 하여야 하겠다고 가르치시였다.

장군님의 교시를 한자한자 새겨들으며 전우봉은 그이께서 맡겨주신 영예로운 과업을 빛나게 수행할 불같은 결의를 다지였다.

보름후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공연이 진행되였다.

공연을 보신 장군님께서는 만족해하시며 이번에 주단역배우들을 많이 바꾸었지만 그들이 다 역형상을 잘한다고, 새로 역을 맡은 배우들이 출연하는 장면들을 토막토막 보았는데도 눈물이 나온다고, 가극에 나오는 노래는 그전과 같지만 배우들이 연기형상을 잘하기때문에 작품세계에 더 끌려들어가게 된다고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계속하여 혁명가극을 더욱 세련시킬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후 만수대예술단이 외국방문공연의 길에 올랐을 때에도 먼곳에 자식을 보내고 마음쓰는 친부모의 심정으로 앓는 동무들은 없는가, 불편한 점은 없는가고 자주 알아보군 하시였다.

그 사랑, 그 은정속에서 예술단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만사람의 절찬을 받았다.

장군님께서는 그들이 외국방문공연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돌아오자 예술단성원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며 못내 기뻐하시였다.

그들속에는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에서 황로인역을 훌륭히 형상한 전우봉도 있었다.

어제는 평범한 배우였던 이 몸을 혁명가극창조집단에 망라시켜주시고 오늘은 또 공연성과를 축하해주시는 위대한 장군님! 아, 언제면 그 사랑에 보답할수 있단 말인가.

전우봉은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을 쏟았다. …

이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최전성기였다.

전우봉은 그 특유의 맑고 성량이 풍부한 목청으로 《아 수령님품이여》를 비롯한 명곡들을 불러 이르는 곳마다에서 사람들의 절찬을 받았다.

그 당시 TV와 라지오를 통하여 전우봉의 노래를 즐겨들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뛰여난 음악적재능을 가졌던 남성독창가수의 이름을 잊지 않고있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전우봉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주시여 1978년에는 인민배우칭호를 안겨주도록 하시였으며 나라의 주요대회들에 대표로 불러주시였다.

뿐만아니라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손목시계를 거듭 수여받도록 하여주시고 매해 신년장과 선물을 안겨주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1982년 전우봉은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성악학부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다.

그는 교원, 강좌장, 학부장으로 사업하면서 재능있는 성악가후비들을 육성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 나날 그가 키워낸 국제콩클과 국내경연 입상자들중에는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 여러명의 인민배우, 공훈배우들이 있다.

어머니가 옆에 온줄도 모르고 남의 집 축음기에 심취되였던 그 시절부터 음악은 전우봉의 꿈이였고 생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가 평양음악무용대학 학부장으로 사업하던 때의 일이다.

어느날 강의를 하던 전우봉은 갑자기 귀가 들리지 않는것을 느꼈다.

공교롭게도 한 대학생이 일어나 질문을 하였는데 종시 알아들을수 없었다.

제 방으로 돌아온 그는 한숨을 푹 내쉬였다.

그 현상은 오늘 처음 나타난것이 아니였다. 몇달전부터 귀가 잘 들리지 않더니 그예 일을 친것이였다.

전후 그가 외국의 음악대학에 류학을 가기 전에 있은 일이였다.

전우봉은 그때 한동안 장고를 배웠는데 하루는 연습도중 실수하여 장고채에 오른쪽고막을 상하였었다.

그 시절에는 젊어서 몰랐는데 나이를 먹으며 그 증상이 나타난것이였다.

후회란 언제나 뒤늦게 오는 법이다.

교원들이 찾아와 그를 위로하였다.

《학부장선생님, 걱정마십시오. 강의를 못하면 뭘합니까?》

《이젠 년세도 있는데 강의는 우리한테 맡기고 학부사업이랑 슬슬 하면서 쉬십시오.》

전우봉은 자기를 위해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생각을 거듭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라에서 무엇때문에 나를 평양음악무용대학에 보냈는가, 그래 강의를 못하는 교원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말이지 20여년동안 몸을 담그어온 교정을 떠나고싶지 않았다. 아직 두눈은 어둡지 않고 팔다리도 성성하다. 다른 부문에도 팔십이 지난 후보원사, 박사, 교수,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 비하면 나는 젊었다고 할수 있다. 아직 교단에 설수 있지 않을가?

다음순간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우리 대학생들이 어떤 청년들인가, 그들은 장차 노래로 조국을 받들고 세계에 떨쳐가야 할 재사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보탬을 주지 못하면서 자리지킴만 한다면 그게 무슨 교육자인가.

그렇다! 그것은 나자신을 속이는것이고 나아가서 나라와 인민을 속이는 행위이다.

가슴이 못견디게 아프고 아쉬웠지만 종시 결심을 내리고말았다.

며칠후 교원들이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전우봉은 그들에게 진정을 담아 말하였다.

《동무들, 교단을 부탁하오.》

길지 않은 당부였지만 그 말속에는 참된 교육자, 참된 인간의 진심이 깃들어있었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7-01-01 20:57:28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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