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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성장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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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국 작성일16-12-25 13:43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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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1. 노래로 빛나는 삶

 

 

 

∙ 1932년 9월 21일 서울시 동대문구에서 출생.

∙ 1950년 의용군으로 입대.

∙ 1951년 평양음악대학(당시) 입학.

∙ 1957년 외국류학.

∙ 1960년 함경남도가무단(당시) 성악배우로 활동.

∙ 1966년 영화 및 방송음악단(당시) 성악배우로 활동.

∙ 1971년 피바다가극단 성악배우로 활동.

∙ 1982년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성악학부 교원, 학부장으로 사업.

∙ 2015년 11월 16일 사망.

∙ 인민배우.

 

 

가을도 저물어 찬바람 분다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 동포를

그 누가 광야에서 구원해주랴

일어나라 대장부야 목숨을 걸고

감옥도 죽음도 두렵지 않다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

 

이 가요는 위대한 정일장군님께서 몸소 지도하여주신 조선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의 주제가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이다.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의 군화에 짓밟힌 남녘동포들을 구원하고 분렬의 비극을 끝장내자면 피끓는 청년남아들이 철창도, 단두대도 두려움없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격조높이 토로한 노래, 조국통일의 열기를 북돋아주는데 이바지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인민배우 전우봉이다.

 

그뿐이 아니다.

 

조선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의 주제가 《장군님이 그리워》와 《남산의 푸른 소나무》, 《눈이 내린다》, 《아수령님품이여》 등 그가 형상한 가요는 무려 수백곡에 달한다.

 

그가운데는 제국주의자들의 가증되는 침략책동을 단호히 짓부시며 조국의 초소를 금성철벽으로 지키고있는 용감한 인민군초병들이 즐겨 부르는 가요 《초소에 수령님 오셨네》도 있다.

 

왕년의 시절 가사발음과 음악적표현의 정확성, 감정표현의 진실성과 섬세성으로 하여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전우봉도 이제는 우리곁에 없다.

 

그러나 조국력사에 금문자로 새겨진 천리마시대를 순결한 량심과 성실한 땀으로 빛내인 로세대들과 할아버지, 아버지들로부터 영광의 그 시대를 전설처럼 들으며 자라난 젊은 세대들은 지난 세기 1960년대와 1970년대, 1980년대에 수많은 명곡들을 불러 인민들을 기쁘게 해주던 그를 잊지 않고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18살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가 어떻게 온 나라가 다 아는 성악가수로, 인민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참된 인간으로 성장할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몹시 알고싶어한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따뜻한 품속에서 노래와 더불어 한생을 긍지높이 빛내여온 전쟁로병, 인민배우 전우봉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성장의 나날

 

서울의 곳곳에서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힘차게 울려퍼지고있던 7월의 어느날이였다.

그날 전우봉은 악극단성원들가운데서 제일선참으로 의용군에 탄원하였다.

밤에 전투를 벌리면 시민들의 생명재산이 큰 피해를 입을수 있고 귀중한 문화유물들이 파괴될수 있다고 하시며 서울해방을 위한 공격개시시간을 아침으로 정해주시였다는 김일성장군님, 바로 그런 위대한분이 이끄는 인민군대야말로 민족을 지키는 참된 군대이며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이 아니겠는가.

그때 한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음악기초와 타프춤을 배워준, 음악의 별이 되라고 이름까지 고쳐준 전만경이였다.

《자네 어쩌자고 그러나?》

그는 조롱속에 갇혀있던 수리개가 금시 하늘을 박차고 날아오를가봐 불안해하고있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전우봉은 확신에 넘쳐 대답하였다.

《선생님, 지금 서울시민들은 <눈물젖은 두만강>과 같은 비가가 아니라 삶의 희열을 안겨주는 힘있고 격동적인 노래들을 요구하고있습니다. 그 노래를 안고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인민군대입니다. 전 이 영용한 대오에 들어서는 길이 곧 그처럼 갈망하던 참된 노래를 찾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만경은 할수 없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더 막지 않겠네. 몸조심하라구.》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것으로써 전우봉은 불미스러운 지난날과 결별하였다.

그의 뒤를 따라 수십여명의 성악가, 연출가, 무용가, 연주가들이 의용군에 탄원하였다.

그들은 파괴된 교량복구전투에 진입한 인민군 독립련대의 선전대에 입대하였다.

한강에서는 적들이 퇴각하면서 끊어놓은 다리를 복구하는 전투가 밤낮없이 벌어지고있었다.

겨우 다리를 복구해놓으면 어느새 냄새를 맡았는지 얄미운 미군비행기가 날아들어 마구 폭탄을 퍼부었다.

한강다리는 또다시 끊어졌다.

그러면 교량부대가 뛰여들고 시민들도 떨쳐나 다리를 복구하군 하였다.

현장으로 달려온 군부대선전대원들은 용약 일판에 뛰여들었고 쉴참마다 서둘러 얼굴의 땀을 훔치고나서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다. 특히 전우봉의 《조국보위의 노래》가 작업장에 울려퍼질 때면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그 과정에 그는 인민군대야말로 진정으로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군대임을 다시금 깨달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세우자면 리승만《정권》을 때려부시고 북에 세워진것과 같은 참다운 인민정권을 세워야 한다는것을 심장으로 체험하였다.

그 나날 그는 의용군출신 전사들중 제일먼저 민청에 가맹하였고 어디 가나 전우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날이 가고 달이 저물던 9월 중순이였다.

그무렵 새 삶이 약동하던 서울의 거리에 난데없이 포탄이 날아들더니 한창 달리던 궤도전차가 뒤집어지고 여기저기서 건물들이 무너졌다.

하루는 인민군군관이 선전대에 찾아왔다. 오늘 저녁 야간행군을 하니 배낭에 간단한 짐을 넣고 대기하라는것이였다.

그날 밤 대오는 출발하였다.

그런데 행군하는 방향을 보니 남쪽이 아니라 그 반대쪽이 아닌가.

전우봉은 의아해났다.

(어째서 북으로 행군하는가?)

대렬속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아갔다.

《우리가 후퇴한대.》

《인천에 미국놈들이 들어왔다더군.》

믿어지지 않았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인민군대가 전라남도 완도를 해방하였다고, 한주일후이면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난다고 환성을 터치지 않았던가.

전우봉은 대렬책임자에게 달려갔다.

《군관동지, 우리가 후퇴한다는게 사실입니까?》

대렬책임자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였다.

《그렇소.》

당시 전선형편은 급변하고있었다.

인민군대의 노도와 같은 진격으로 옴짝 못하고 남쪽의 좁은 지역에 몰려든 미군은 그 지역을 고수하려고 최후발악을 하였다.

한편 수많은 병력과 군함, 비행기를 동원하여 인천에 상륙한 후 방대한 무력과 화력의 협공으로 락동강계선에 진출한 인민군주력부대들을 《포위소멸》하려고 꾀하고있었다.

하여 인민군대는 전략적인 일시적후퇴를 하게 되였던것이다.

전우봉은 태평스레 잠을 자다가 갑자기 날아든 홍두깨에 얻어맞은듯 한 기분이였다. 단숨에 서울을 해방하고 대전을 무찌르며 락동강을 건너 질풍같이 진격하던 인민군대가 이제 와서 후퇴한다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였다.

불현듯 어머니생각이 났다.

(지금쯤 뭘하고계실가? 혹시 내가 오는가 해서 길가에 나와계시지 않을가?)

그의 집은 선전대에서 한시간쯤 걸어가면 당도할수 있는 곳에 있었는데 그동안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며칠 있으면 전쟁이 끝날터인데 그때 어머니앞에 떳떳이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던것이다.

막상 후퇴의 길에 오르자니 집에 한번 가보았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대렬책임자는 아쉬워하는 전우봉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걱정마오. 우린 인차 돌아올거요.》

그 이야기를 듣자 온몸에 새 힘이 우쩍 솟구쳐올랐다.

전우봉은 잊지 못할 고향집, 비록 세방일망정 유년시절의 추억과 음악에 대한 꿈이 소중히 간직되여있고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는쪽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어머니, 인차 돌아오겠으니 기다려주십시오. )

발길을 돌려 기운차게 걸어가는 전우봉은 그 당부가 실현될수 없는 약속이라는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

인민군대의 재진격이 개시될무렵 그는 내무성협주단(당시) 배우로 편입되였다.

협주단은 노도와 같이 진격하는 인민군대와 함께 행군하며 공연을 진행하였다.

파괴된 도시와 마을들에서 화려한 무대를 생각한다는것은 꿈에서나 그려보는 호사였다.

멈춰서는 곳에 공병삽으로 깎고 평평하게 다진 둔덕이 곧 무대였다.

가렬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친근하던 전우들의 희생을 목격한 군인들은 겉보기에 감때사납고 무뚝뚝해보였다.

그러나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울려퍼지자 그들은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고 이어 《조국보위의 노래》, 《진군 또 진군》, 《전호속의 나의 노래》 등이 연방 흘러나오자 박수를 치며 따라불렀다.

락천적인 군인들은 《우리 님 영웅되셨네》가 나오자 벌떡벌떡 일어나 영웅남편의 소식을 듣고 어쩔줄 몰라하는 안해의 흉내를 내며 곧잘 춤을 추었다.

전우봉은 그 모습들에서 공화국의 존엄과 영예를 피로써 지켜가는 강의한 인간들의 군상을 보았으며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한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이 더욱 굳어졌다.

어느날 내무성협주단 책임일군이 그를 찾았다. 음악대학에 추천받았으니 준비하고 떠나라는것이였다.

전우봉은 자기 귀를 의심하였다.

당시 인민군군인들은 조국의 촌토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서슴없이 바치며 싸우고있었다. 그런 판에 대학에 가다니…

그는 못 가겠다고, 협주단 전우들은 폭탄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노래를 부르는데 어떻게 대학에 가겠는가고 버티였다.

책임일군은 동무만이 아니라 전선에서 싸우던 대학생들과 교원들도 대학으로 소환되고있다고 알려주었다.

전우봉은 가슴이 뜨거워났다.

지금은 조국의 운명을 판가리하는 준엄한 시기이다. 한사람의 군인이라도 전선에 필요한 때이다. 그런데 오히려 가렬처절한 전투마당에서 금싸래기같은 군인들을 뽑아 대학으로 보내고있지 않는가.

그렇다. 강철의 령장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벌써 승리할 래일을 내다보시고 사랑의 명령을 내리신것이다. 아, 우리는 승리한 전쟁을 하고있구나!

며칠후 그는 신심에 넘쳐 평양음악대학(당시)으로 떠나갔다.

평양음악대학은 어버이수령님의 은정속에서 1949년 3월 1일에 창립된 음악예술인후비양성기지이다.

창립 첫 시기부터 대학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 대학을 안전한 곳에 옮기도록 하여주시고 전선에서 싸우던 학생들을 대학으로 불러주시였으며 유능한 예술인들을 대학교원으로 파견하여주시였다.

그리하여 평양음악대학은 다른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의 포성이 울부짖던 시기에 문을 활짝 열고 대학생들을 받아들이고있었다.

전우봉은 성악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전선에서 온 대학생들이 모두 그러한것처럼 그도 비상한 각오를 품고 학습에 열중하였다.

자정이 훨씬 넘도록 음악의 세계를 파고들다가 첫닭이 울면 쪽잠에 들었고 얼마 못 자고 뛰쳐일어나 소금물로 양치질을 하고 발성훈련에 들어가군 하였다.

1953년 7월 27일 조국의 밤하늘에 전승의 축포가 터져올랐다.

전우봉은 승리한 조선의 아들답게, 대학생답게 음악공부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몇해후 그는 대학을 졸업하였다.

기쁨에 넘쳐 대학정문을 나설 때의 그는 이미 전망성있는 가수였다.

작고 연약하던 날개를 크고 든든히 자래우고 성악이라는 창공을 향하여 자신만만하게 깃을 치는 수리개였다.

그러나 조국의 사랑은 끝이 없었다.

나라에서는 그가 더 높은 견문을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외국의 유명한 음악대학에 류학을 보내기로 하였던것이다.

전우봉은 목이 꽉 메였다.

지난날 남조선에서 뜨내기배우생활을 하던 자기를 대학의 밝은 창가로 불러준 그 품, 그 품이 오늘은 더 높은 지식의 탑을 쌓으라고 떠밀어주고있는것이 아닌가.

류학기간 전우봉은 조국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의 학급에는 각국에서 모여온 류학생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틈만 나면 열정적인 조선청년의 주위에 몰려와 노래를 청하군 하였다.

전우봉은 사양하지 않고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불렀다.

장중하면서도 힘있는 그의 노래를 듣고난 류학생들은 백수십년간의 전쟁에서 한번도 패한적 없다고 떠벌이던 미국의 사등뼈를 꺾어놓은 영웅조선의 기상을 보는것 같다고 감탄하였다.

류학을 마친 전우봉은 함경남도가무단(현재 함경남도예술단) 성악배우가 되였다.

다음해인 1961년 그는 가극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주인공역을 맡았다.

병원의 의사, 간호원들이 화상당한 한 평범한 소년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저마다 자기의 피와 살을 서슴없이 바치는 감동적인 내용을 담은 가극은 만사람의 절찬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가무단성원들은 놀라운 소식에 접하였다.

2. 8비날론공장(당시)조업식에 나오시였던 어버이수령님께서 가극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친히 보아주신다는것이였다.

전우봉은 언제 공연이 시작되고 어떻게 노래를 불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환한 미소를 지으신 수령님의 자애로운 영상이 안겨올뿐이였다.

영광의 시각은 더 큰 영광의 시각으로 이어졌다.

그날 저녁 어버이수령님께서 2. 8비날론공장 조업식을 경축하는 연회에 가극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에 출연한 배우들을 불러주시였던것이다.

수령님께서는 전우봉의 술잔을 찧어주시며 오늘 가극공연을 아주 잘하였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그것은 성악배우 전우봉에게 안겨주신 최대의 평가였고 고무였다.

그는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다졌다.

(어버이수령님!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수령님의 송가를 부르겠습니다. )

그후 전우봉은 가극 《이것은 전설이 아니다》 등 여러 가극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소극성과 보수주의, 기술신비주의를 불사르며 계속혁신, 계속전진해나가는 천리마시대의 근로자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전우봉은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배려에 의하여 1962년 3월 공훈배우칭호를 수여받았다.

몇해후 그는 국가의 조치에 의하여 영화 및 방송음악단에 소환되였다.

오늘도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예술영화들인 《성장의 길에서》의 주제가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와 《유격대의 오형제》의 주제가 《장군님이 그리워》, 《따사로운 그 품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가요 《눈이 내린다》, 《초소에 수령님 오셨네》, 《아 수령님품이여》 등은 그가 이 시기에 형상한 노래들이다.

 

[이 게시물은 편집국님에 의해 2016-12-25 13:45:05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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