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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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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1-16 19:27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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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2. 성악배우 전우봉 - 1) 노래로 빛나는 삶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1. 노래로 빛나는 삶

 

 

 

∙ 1932년 9월 21일 서울시 동대문구에서 출생.

∙ 1950년 의용군으로 입대.

∙ 1951년 평양음악대학(당시) 입학.

∙ 1957년 외국류학.

∙ 1960년 함경남도가무단(당시) 성악배우로 활동.

∙ 1966년 영화 및 방송음악단(당시) 성악배우로 활동.

∙ 1971년 피바다가극단 성악배우로 활동.

∙ 1982년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 성악학부 교원, 학부장으로 사업.

∙ 2015년 11월 16일 사망.

∙ 인민배우.

 

 

가을도 저물어 찬바람 분다

굶주리고 헐벗은 우리 동포를

그 누가 광야에서 구원해주랴

일어나라 대장부야 목숨을 걸고

감옥도 죽음도 두렵지 않다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

 

이 가요는 위대한 정일장군님께서 몸소 지도하여주신 조선예술영화 《성장의 길에서》의 주제가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리라》이다.

 

남조선을 강점한 미군의 군화에 짓밟힌 남녘동포들을 구원하고 분렬의 비극을 끝장내자면 피끓는 청년남아들이 철창도, 단두대도 두려움없이 떨쳐나서야 한다고 격조높이 토로한 노래, 조국통일의 열기를 북돋아주는데 이바지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인민배우 전우봉이다.

 

그뿐이 아니다.

 

조선예술영화 《유격대의 오형제》의 주제가 《장군님이 그리워》와 《남산의 푸른 소나무》, 《눈이 내린다》, 《아수령님품이여》 등 그가 형상한 가요는 무려 수백곡에 달한다.

 

그가운데는 제국주의자들의 가증되는 침략책동을 단호히 짓부시며 조국의 초소를 금성철벽으로 지키고있는 용감한 인민군초병들이 즐겨 부르는 가요 《초소에 수령님 오셨네》도 있다.

 

왕년의 시절 가사발음과 음악적표현의 정확성, 감정표현의 진실성과 섬세성으로 하여 인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전우봉도 이제는 우리곁에 없다.

 

그러나 조국력사에 금문자로 새겨진 천리마시대를 순결한 량심과 성실한 땀으로 빛내인 로세대들과 할아버지, 아버지들로부터 영광의 그 시대를 전설처럼 들으며 자라난 젊은 세대들은 지난 세기 1960년대와 1970년대, 1980년대에 수많은 명곡들을 불러 인민들을 기쁘게 해주던 그를 잊지 않고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18살의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으로 공화국의 품에 안긴 그가 어떻게 온 나라가 다 아는 성악가수로, 인민의 추억속에 영생하는 참된 인간으로 성장할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몹시 알고싶어한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따뜻한 품속에서 노래와 더불어 한생을 긍지높이 빛내여온 전쟁로병, 인민배우 전우봉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한다.

 

 

 

 

인생의 노래를 찾아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인 1932년 9월 서울시 동대문구의 어느 한 집에서 늙수그레한 산파가 뚱기적뚱기적 걸어나왔다.

 

울타리곁에 모여섰던 이웃들이 뭘 낳았는가고 물어보았다.

 

《고토리웨다.》

 

해산방조를 위일능사로 여기는 산파의 시뚝한 대답이였다.

 

그때 누군가 갓난아이치고는 목청이 좋더라고 하자 그의 둥그런 얼굴에 한줄기 웃음발이 떠올랐다.

 

《하긴 숱한 아기들을 받아냈지만 이번처럼 목청좋은 녀석은 처음이지요. 아마 크면 이름난 가수가 될거웨다.》

 

산파의 말을 따르면 갓난애기는 세상밖으로 나올 때부터 천부의 음악적재능을 타고난듯싶다.

 

막벌이군인 아버지는 세 아들중 막내로 태여난 자식의 이름을 한용범이라고 지었다.

 

당시 그의 가정은 며칠 굶은 도적도 가엾게 여길만큼 빈곤하였다. 그나마 제 집도 없어 남의 집 세방살이를 하는 형편이였다.

 

자식들에게 멀건 죽을 다 덜어주고 맹물을 소리없이 마시군 하는 어머니의 여윈 젖은 갓난애기의 작은 배를 채워주지 못하였다.

 

아기는 진땀을 흘리며 어머니의 젖꼭지를 그냥그냥 빨다가 밸이 나면 한바탕 울군 하였는데 그때조차 울음소리만은 류달리 챙챙하였다.

 

어느덧 한용범은 노력에 비하여 소득이 적은 어머니의 젖가슴과 리별하고 아장아장 걸어다니기 시작하였다.

 

어느날 옆집에 갔다가 돌아온 그의 어머니는 집안이 별스레 조용하자 덜컥 겁이 나서 방문을 열었다.

 

순간 그는 그 자리에 굳어지고말았다.

 

세살짜리 아들애가 그린듯이 앉아 두귀를 강구고있지 않는가.

 

가만 들어보니 어느 집 축음기에서 민요 《아리랑》이 흘러나오고있었다.

 

어이없었다. 코물건사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 자식이 제법 어른처럼 진지하게 노래를 듣고있다니…

 

불현듯 산파의 말이 생각났다.

 

(정말 우리 용범이가 이름난 가수가 될수 있을가?)

 

세상에 자식의 앞날을 생각지 않는 모성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서발막대기를 휘둘러도 거칠것 없는 방안을 둘러본 녀인은 저도 모르게 호-  하고 한숨을 내긋고말았다. …

 

어린시절 가난과 노래는 한용범의 변함없는 친구였다.

 

그는 만성적인 굶주림속에서 단비맞은 대순처럼 자랐는데 행여 땅바닥에 알사탕이라도 떨어지지 않았는가 해서 두리번거리는 동네아이들과 휩쓸리지 않고 노래소리가 울려나오는 곳을 찾아 타박타박 가군 하였다.

 

그가 다섯살 나던 해였다.

 

어느날 약 한첩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앓던 아버지는 연약한 안해에게 올망졸망한 자식들과 언제 가도 헤여날길 없는 가난을 물려준채 그만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한용범은 어머니와 형들이 아버지의 가슴우에 어푸러져 통곡하는것을 보자 덩달아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공사장에서 죽도록 일하고 돌아와서도 자기를 둥개둥개 추어올리며 《여보, 두고보오. 이애가 큰 인물이 되지 않나.》하고 대견해하던 아버지가 두눈을 감고있는것이 무서웠던것이다.

 

가장의 죽음은 가정을 짓누르는 무거운 돌이였다.

 

애당초 책보를 메고 학교에 가는것을 그림의 떡처럼 여겨온 맏형과 둘째형은 용약 생활전선에 뛰여들었다.

 

한용범도 더는 노래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찾아다니지 않고 이것저것 어머니를 도왔다.

 

그속에서도 실낱같은 즐거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등잔불도 켜지 못한 캄캄한 방에 온 가족이 모여앉아 한용범의 노래를 듣는 일이였다.

 

교교한 달빛이 고삭은 창호지를 꿰뚫고 비쳐드는 좁은 방구석은 《배우》의 무대였고 온종일 철공소에서 시달린 몸을 벽에 기대인 형들과 자식들 몰래 눈굽을 훔치는 어머니가 줄지도 늘지도 않는 관객이였다.

 

고요한 밤공기를 타고 울리는 한용범의 노래소리는 마치 가정을 짓누르는 가난과 설음을 쫓아내듯 맑고 챙챙하였다.

 

길손들은 당장 두억시니가 뛰쳐나올것만 같은 시꺼먼 방에서 그런 노래소리가 울려나오는것이 믿어지지 않는듯 혀를 끌끌 차며 가버리군 하였다.

 

그렇지만 한용범의 재능은 어머니가 끼니를 끓이려고 아궁이에 쓸어넣고 태우는 삭정이마냥 암담한 절망속에서 속절없이 타버리고있었다.

 

어느날 굴속처럼 어둡던 그의 집에 한줄기 밝은 빛이 비쳐들었다.

 

꽃망울도 피우지 못한 동생의 재능을 두고 안타까와하던 맏형과 둘째형이 이를 사려물고 한푼두푼 모은 돈으로 그를 사립학교인 동대문국민학교에 입학시켰던것이다.

 

아직은 8살밖에 안되였지만 자기가 침을 발라가며 또박또박 글자를 적어가는 연필과 학습장이 어떻게 마련되였는가를 잘 알고있는 한용범은 이악하게 노력하여 학교적으로 실력이 제일 뛰여난 학생으로 되였다.

 

특히 창가시간이면 아이들은 물론 교원도 넋을 잃고 그의 노래를 감상하군 하였다.

 

그러나 가난은 모질게도 한용범을 괴롭혔으니 타고난 목청과 소질로 하여 학교적으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군데군데 기운 자리가 누덕누덕한 옷을 입은것으로 하여 무대우에 올라설수 없었던것이다.

 

그대신 무대우에 거들먹거리며 나타난것은 노래가사를 제대로 모르거나 음치인 주제에 좋은 옷을 입고 고운 신을 신은 부자집아이들이였다.

 

한용범은 너무 분하여 주먹을 꽉 쥐군 하였다.

 

그가 학교졸업을 앞두었을 때 또 하나의 재난이 세방문을 거칠게 잡아흔들었다. 둘째형이 궤도전차에 치워죽은것이다.

 

아침까지만 해도 싱글벙글하며 집을 나섰던 아들이 시체가 되여 나타난것을 본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라쳤다.

 

맏형과 함께 얼음처럼 차거운 어머니의 손발을 정신없이 주무르던 한용범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였다. 어린 마음에도 가정에 덮쳐든 불행이 몸서리칠만큼 지겨웠던것이다. 언제면…

집안의 명줄은 철공로동자인 맏형에게 달리게 되였다.

 

말수적고 인정많은 그는 어떻게 하나 동생만은 공부시키려고 닥치는대로 일하였다.

 

어머니도 앓는 몸으로 삯빨래, 삯바느질을 극성스레 하였다.

 

그 덕에 한용범은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하였지만 더는 가정에 부담을 줄수 없어 중학교진학의 꿈을 부채접듯 하고 소년로동자가 되였다.

 

그가 처음 입직한 곳은 서울제약주식회사였다.

 

그 회사에서는 다문 몇푼이라도 벌겠다고 땀을 빨빨 흘리며 뛰여다니는 13살의 당돌한 소년을 동정하지 않았고 월급마저 제대로 주지 않았다.

 

드디여 해방의 날이 왔다.

 

《조선해방 만세!》

 

우렁찬 고성과 허공을 내지르는 억센 주먹들은 산도 옮기고 바다도 메울 기상이였다.

 

해방은 역시 해방이였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돼지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쩍하면 칼을 휘둘러대는 일본순사들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사람들이 가슴을 쭉 펴고 거리로 뛰쳐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소년의 가슴은 세차게 들먹이였다.

 

그렇다. 더는 이 땅에서 왜놈들의 돼지멱따는 고함소리와 왜놈기생들의 간지러운 샤미센소리가 울리지 못할것이다.

 

아, 해방… 해방!

 

그는 해방이라는 그 성스러운 말에 가정의 행복과 자신의 희망이 모두 담겨있는듯싶어 울고웃으며 《조선해방 만세!》를 불렀다.

 

하지만 목쉬도록 웨친 그 만세소리는 늙은이의 장죽에서 피여오르는 담배연기인양 맥없이 사라졌을뿐 그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하였다.

 

어머니가 빈 쌀자루를 앞에 놓고 한숨을 내쉬고있는것을 본 한용범은 또다시 일터로, 맏형이 소개해준 철공소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가 철공소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쇠붙이에 찢겨 피가 흐르는 자식의 손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군 하였다. 그것은 뼈도 굳지 못한 아들의 어깨에 가정의 짐을 메워준 안타까움과 설음의 분출이였다.

 

한용범은 형제중에 몸이 제일 약했지만 가슴속에는 흰 수염을 드리운 령감이 들어앉은 소년이였다.

 

어머니 손에 몇푼 쥐여줄수만 있다면 철근에 찔려 퉁퉁 부어오른 손을 슬며시 감추고 태연스레 코를 고는척 할줄도 알았다.

 

하루는 철공소에 나갔는데 말라꽹이주인이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넌 이젠 나오지 않아도 돼.》

 

주인은 비주름히 웃으며 웬 남자를 내세웠다.

 

한용범은 자기보다 키가 훨씬 크고 몸집도 좋은 청년을 보자 말없이 돌아섰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의 가슴속에 좌절의 홍수가 밀려들었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열다섯살이나 먹은 소년이 집에 들어앉아 맏형과 어머니의 얼굴을 쳐다볼수는 없었다.

 

한용범은 저금관리소 급사로 들어갔다.

 

급사의 일이란 자질구레하고 분주하지만 꾹 참고 열심히 뛰여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웬 사람이 세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해방이 되자 일본에서 귀국한 전만경이라는 음악가였는데 한용범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아주머니, 댁의 아들을 나한테 맡기지 않겠소?》

 

《예?》

 

그 사람은 아들이 천성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자기네 악극단에 가면 노래도 배우고 밥도 먹을수 있다고 설복하였다.

 

어머니는 망설이였다. 낯도 코도 모르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식을 선뜻 내놓기가 서슴었던것이다.

 

그때 아들이 방안에서 뛰쳐나왔다.

 

《어머니, 나 이 아저씨 따라갈래요.》

 

《아서라.》

 

어머니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용범의 고집도 이만저만 아니였다.

 

그는 나름대로 타산이 있었다.

 

악극단에 들어가면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을 하지 않으니 좋고 그처럼 소원하던 음악공부도 할수 있으니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는 격이 아닌가.

 

아들이 기를 쓰고 뻗치자 어머니는 끝내 승낙하고말았다.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생각이 있었다.

 

하루하루 늘어나는 걱정이 원쑤같은데 속수무책으로 자식을 끼고있을바에는 차라리 악극단이든 어디에든 보내여 밥이라도 배불리 먹일수 있다면 좋을것 같았다.

 

결국 눈물겨운 가난이 어머니와 아들을 타협시킨셈이였다.

 

이렇게 되여 한용범은 1948년 3월 김해송악극단에 들어갔다.

 

그는 악극단에서 체계적인 발성법을 배웠고 그때로서는 희귀한 타프춤도 배웠다.

 

하루는 전만경이 그더러 이름을 고치자고 하였다.

 

《넌 앞으로 음악계의 스타가 될게다. 그런데 한용범이라는 이름은 네 장래와 어울리지 않아. … 자, 이렇게 하자. 넌 내 양아들이니 성은 내것을 따고 이름은 <으뜸 우>자에 <봉우리 봉>으로… 전우봉! 그래, 어떻냐?》

 

한용범은 우물쭈물했다.

 

《저, 어머니가…》

 

전만경은 씩 웃었다.

 

《걱정말아. 내 너희 어머니를 만났댔다.》

 

그리하여 한용범은 이름을 전우봉으로 고쳤다.

 

후날 전우봉은 그 이름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1960년대 중엽 그가 영화 및 방송음악단 성악배우로 있을 때였다.

 

하루는 한 일군이 전우봉을 찾았다.

 

《본래 이름이 한용범이요?》

 

예술영화 주제가들과 가요들을 불러 공로가 큰 그에게 국가표창을 내신하려고 문건을 료해하던중 한용범이라는 본명이 밝혀진것이다.

 

전우봉은 솔직히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 이름은 어떻게 된거요?》

 

전우봉은 이름을 고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나서 이렇게 제기하였다.

 

《제 이름을 그냥 전우봉으로 해주십시오.》

 

일군은 영문을 몰라하였다.

 

《모두 나를 전우봉으로 알고있는데 이제 와서 이름을 고치겠습니까?》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전우봉으로 고착되였고 후날 태여난 자식들의 성도 전가로 되고말았다. …

 

어느날 악극단이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하고있을 때였다.

 

갑자기 술취한 미군병사들이 무대에 뛰여오르더니 한창 노래를 부르고있는 전우봉을 밀어버리고 혀꼬부라진 소리를 내질렀다.

 

나중에는 쟈즈춤을 미친듯이 추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말초신경과 관능을 자극하는 기형적인 리듬, 무질서한 불협화음, 변태적인 동작…

 

전우봉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때까지 그는 미국을 《해방자》로 간주하고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사람의 공연을 중단시키고 제 흥에 겨워 엉덩이를 징그럽게 흔들고있는 미국인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해방자》에 대한 실망을 자아내는 일은 그후에도 계속 일어났다.

 

미군병사들은 백주에 찦차로 무고한 조선사람들을 마구 깔아눕히고 달아났고 지나가는 녀성에게 무리로 달려들어 추잡한짓을 하였다. 또한 해방만세소리에 움츠러들었다가 《Hellow!(여보시오!)》를 노래가락처럼 외우며 나타난 친일파들을 내세우고 그들에게 특전을 주었다.

 

(이 땅이 해방조선이 옳긴 옳은가? 과연 이 땅에서 민족을 위한 노래를 부를수 있단 말인가?)

 

피끓는 심장은 새 조선을 위한 참다운 노래를 갈망하고있었다.

 

마침내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날이 왔다.

 

1950년 6월 25일 미제에 의하여 강요된 전쟁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3일후인 6월 28일 서울거리에 람홍색공화국기를 꽂은 땅크와 모터찌클들이 나타났다.

 

그 량옆으로 군복을 입은 인민군대가 보무당당히 행군해갔다.

 

땀에 젖은 그들의 군모우로 영생불멸의 혁명송가《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우렁차게 터져올랐다.

 

전우봉은 방송을 통하여 이미 알고있던 그 노래를 따라부르며 새 조선의 주인들, 해방자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해방된 서울은 천지개벽하였다.

 

중앙청을 비롯한 건물의 지붕들에 람홍색공화국기가 펄펄 휘날리고 인민위원회들이 복구되여 사업을 시작하였다.

 

극장들에는 산뜻한 군복을 입은 인민군협주단의 배우들이 나타났다.

 

김일성장군님의 은덕으로 난생처음 제땅에서 밭갈이하는 농민들의 기쁨을 노래한 《밭갈이노래》와 첫 인민경제계획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떨쳐나선 북조선로동계급의 높은 열의와 기백을 담은 《승리의 5월》은 서울시민들의 대절찬을 받았다.

 

날이 갈수록 극장으로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지난날과 몰라보게 달라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전우봉은 인민군군인들이 부르는 노래야말로 그토록 찾고찾던 새 조선의 노래라는것을 깨달았으며 그와 더불어 자신의 눈앞에 인생의 새로운 장이 펼쳐지고있음을 똑똑히 느꼈다.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6-11-16 19:27:29 새 소식에서 복사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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