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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1. 영화배우 김세영-2)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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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03-30 12:02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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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1. 영화배우 김세영-2) 환생

 

편집국

 

해방이후  남쪽이나 북쪽이나 많은 사람들이 정국의 혼란을 맞이하였다. 친일파로 잘 나가던 인간들은 숨을 곳을 찾아갔고 해방의 주역들은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였다. 그것도 잠시 분단의 비극이 시작되면서 개개인의 삶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었고 각자 자신의 삶을 개척해야만 했다. 이러한 때에 자의반 타의반 누구는 남으로 누구는 북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힘들게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재조명하고 소개하고자 한다. 북행을 택한 사람들의 관하여 남쪽의 여러가지 자료에도 소개되었지만 내용이 대부분 짧아 전후 내막을 알기가 어려웠다. 마침 북에서 운영하는 <우리민족끼리>사이트에 당시 북행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북에서 어떻게 정착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그나마 자세하게 소개 되었다. 북을 택하고 어렵게 올라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 알고자 하는 독자들에 매우 유용한 자료라 생각하며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1. 영화배우 김세영 -2) 환생 원문을 그대로 소개한다. 


 

7. 설음을 불사른 웃음의 한생 

 

  

김 세 영(영화배우)

 

• 1923년 9월 17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출생.

•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서울예술극장 배우.

• 1950년 10월부터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배우.

• 1989년 10월 23일 사망.

• 인민배우.

                                                           

 

 

18세기말 프랑스의 희곡작가 보마르쇄의 유명한 희곡 《쎄빌랴의 리발사》에서 주인공 피가로의 대사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그 불운한 운명속에서도

어떻게 그렇게 웃으며 사는가고 묻는 물음에

 

나는 입만 떼면 눈물이 나오기때문에

먼저 웃군 한답니다

 

인간의 운명에는 눈물과 웃음이 동반되는 법이다. 그러나 눈물과 웃음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고… 말그대로 천층만층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우리 인민에게 밝은 웃음을 보여준 인민배우 김세영의 운명길에는 어떤 눈물, 어떤 웃음이 비꼈던가. 피가로처럼 울지 않기 위한 웃음이였던가? 아니면…

 

2) 환생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나자 적들은 서대문형무소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끌어내여 어디론가 양떼 몰듯 몰아가고있었다.

 

김세영도 이들속에 섞이여 끌려가게 되였는데 놈들이 허둥대며 서두르는것을 보아 분명 어떤 사변이 터진것 같았다.

 

두루 알아보니 인민군대가 남쪽으로 쏜살같이 진격해 나오고있는데 오늘래일 서울에 들어서게 되리라는것, 그래서 혼비백산한 놈들이 수감자들을 대전형무소로 이감시키려고 끌어냈는데 미국놈들의 지시에 따라 도중에서 모조리 죽여버린다는것이였다.

 

김세영은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당장 죽게 된다는 공포감은 사라지고 인민군대에 의하여 남녘땅이 해방된다는 격동된 심정으로 하여 온몸에서는 힘이 솟구치였다.

 

벌판을 지나 수림이 우거진 산옆에 이르렀을 때에 김세영은 주먹을 부르쥐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뛰자! 우릴 몽땅 죽이려고 한다!》

 

이렇게 웨치며 그는 나는듯이 산속으로 뛰여들었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울리였고 귀뿌리를 스치며 총알이 날아갔다.

 

산중턱에 거의 다달았을 때 뒤에서 《매부! 매부!》하고 부르는 소리에 얼핏 돌아보니 어디 있다가 알아보고 좇아왔는지 처남이 손짓을 하며 찾는것이였다.

 

그들은 인사도 나누지 못한채 끌어당겨주면서 정신없이 냅다 뛰였다.

 

총소리가 없어지고 놈들의 마수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자 그들은 숲속에 맥없이 벌렁 나가누워 가쁜숨을 몰아쉬였다.

 

《매부! 빨리 집으로 가자요. 누이가 얼마나 기다리는지 몰라요.》

 

김세영은 그제야 처남이 자기를 좇아온 사연을 알게 되였다.

 

하지만 김세영은 처남의 말대로 집으로 갈수가 없었다.

 

그는 처남의 손을 잡으며 도리질을 하였다.

 

《난 갈수가 없어. 우선 조직을 찾아야 하구 또 미국놈들이 통치하는 이 남쪽땅에서는 살아있어도 죽은 몸이고 밖에 있어도 감옥에 갇힌 몸이나 같다는걸 처남도 알겠지? 누이한테 잘 이야기해달라구. 일이 원만히 풀리면 내 꼭 데리러 갈게!》

 

처남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이렇게 처남과도, 안해와도 갈라졌다. 후날 처남은 개성으로 들어와 예술단 연출가로 일하였지만 안해는 끝내 들어오지 못하였다.

 

처남과 헤여진 김세영은 다시 충청북도 청주로 들어가 조직을 찾았으며 공개적으로 전시에 맞게 이동예술대를 조직하고 그 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중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그는 대오를 이끌고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는 공화국북반부를 향하여 험하고 시련에 찬 길을 헤치였다.

 

추위와 굶주림이 그들의 생명을 위협했으나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찾아간다는 기쁨이 이 모든 난관을 이겨내게 하였다.

 

아슬아슬한 죽음의 고비를 몇번씩 넘기며 김세영이네가 자강도 만포땅에 이른것은 충주를 떠난지 꼭 30일만이였다.

 

그때 만포에서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일군들이 후퇴하여 들어오는 문학예술인들을 맞이하여 대오에 집결시키고있었다.

 

김세영은 여기서 작가, 예술인들과 감격적인 상봉을 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들이 추워할세라 두툼한 솜동복과 솜신발을 보내주시며 각별한 사랑으로 보살펴주시는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김세영은 자기가 얼마나 위대하고 자애로운 삶의 품에 안기였는가를 절감하였다.

 

공화국북반부에서 김세영의 배우생활은 1951년 예술영화 《소년빨찌산》에서 박기훈역을 맡아 수행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근 20년가까이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 《비행기사냥군조》, 《백두산이 보인다》, 《어랑천》, 《흥부전》, 《명랑한 무대》 등 수십편의 영화들에 출연하면서 주로 정극적인 역인물을 담당하였다.

 

이 기간 그의 연기는 원만하고 크게 흠잡을데는 없었으나 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독특한 형상을 창조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그의 이러한 약점에 대하여 본인에게 말한적이 없었지만 그자신은 자기의 연기가 가지고있는 약점을 스스로 느끼고 오랜 기간 고민하였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큰 심리적타격이라고 할 때 그것은 두가지였습니다.

 

첫번째 타격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때였고 두번째 타격은 희극배우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예술가로서의 나의 재능에 대한 불만족이였습니다.

 

다른 동무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1960년대 말 나는 배우생활을 그만두려고 결심했댔습니다.》

 

김세영은 이렇듯 자기스스로 예술가로서의 소질과 능력이 없는 둔재라고 실망하게 되였다. 어린시절부터 애초에 예술에 대한 지향과 욕망을 꿈꾸지 말았어야 했을것이라고 후회하기까지 하였다.

 

20대나 30대의 젊은 나이에 깨달았다면 방향전환을 하기도 쉬웠으련만 40대 후반기에 와서야 예술에 대한 자기의 무능을 깨달았으니 그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그는 늦게나마 로동생활에 뛰여들어 로동의 땀으로 조국에 이바지하는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고도 생각하였다.

 

그가 말한것처럼 김세영은 정말 자기 생의 근본문제를 두고 낭떠러지에 선것처럼 눈앞이 아뜩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바로 이러한 김세영의 고민을 풀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김세영자신도 알지 못하는 창작적개성을 꿰뚫어보시고 그에게 풍자극 《보충병》의 주역을 맡겨주시였으며 그 성과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걸음걸음 이끌어 세계적인 희극배우로 이름떨치게 하여주시였던것이다.

 

김세영은 위대한 장군님의 빛나는 예지와 따뜻한 손길에 이끌리여 남모르게 잠재해있던 희극배우로서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였으며 훌륭한 역형상으로 관중들에게 시대와 생활을 뜨겁게 받아안게 하고 락천적으로 살며 일해나가도록 하는데서 적극적인 역할을 놀았다.

 

영화배우 40년 경력중에서 후반부에 속하는 희극배우 20년간에 김세영은 말그대로 인기의 절정에 올랐다.

 

김세영이 희극배우로서 첫걸음을 뗀 풍자극 《보충병》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1969년 1월 영화배우들의 무대공연을 위해 직접 선정해주신 작품이다.

 

그이께서는 그 작품의 주인공역을 뜻밖에도 김세영에게 맡겨주시였다.

 

사실상 그때까지만 하여도 그는 지난날 설음과 슬픔만을 당하며 살아온 자기의 처지와 경력으로 보아 예술영화 《흥부전》에서 흥부와 《다시는 그렇게 살수 없다》의 학수와 같이 착취사회에서 학대와 멸시를 받으며 괴로움과 슬픔속에 모대기는 역을 담당하는것이 적당한것이라고만 생각하고있었다.

 

더구나 거의 생면부지라고 할수 있는 풍자극의 주역을 수행해야 하는것은 김세영으로서는 정말 아름찬 과제였다.

 

하지만 자기의 연기에서 희극적형상의 싹을 발견하시고 과업을 주신 위대한 장군님의 신임과 기대에 기어이 보답할 일념으로 가슴을 불태우며 풍자극 《보충병》의 주인공인 면장의 역형상을 훌륭히 수행하기 위하여 모지름을 썼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세영이 련습하는것을 여러차례 분석적으로 보아주시면서 그에게 웃기려는 생각이 너무 앞서기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사건전체가 웃음을 낳아야 하며 배우들의 진실한 체험과 형상을 통하여 웃음을 낳아야 한다고 웃음의 본거지를 차근차근 밝혀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면장을 우리의 원쑤로 보았다면 웃기려고 생각하기 전에 면장의 반동적본질을 먼저 찾으려고 생각하였을것이라고 일깨워주심으로써 김세영으로 하여금 계급적원쑤의 본질을 파고들어 웃음을 낳게 하지 못하고 외형이나 가지고 값싼 웃음을 짜내려고 한 자신을 깊이 뉘우치게 하여주시였다.

 

특히 남조선인민무장유격대를 《토벌》하러 나갔다가 사병들을 다 죽여버린 면장의 아들이 구사일생으로 제 집에 돌아왔을 때 면장이 어떻게 행동할것인가를 가르쳐주신데 대하여 김세영은 두고두고 잊지 못해 하였다.

 

그이께서는 면장이 녀편네와 딸을 데리고 싸움에 나간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순간 절뚝거리며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지옥에서 오지 않았는가 하여 한순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장승처럼 굳어졌다가 와락 달려들고 아들은 아들대로 기겁하여 애비를 뿌리치는 행동을 만들어보라고 하시였다.

 

실로 생각만 하여도 원쑤들의 패망상이 그대로 그려져 웃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이께서는 차츰 몰라보게 발전하는 김세영의 희극적인 연기를 두고 그를 몹시 대견하게 여기시면서 이 작품의 마지막장면에서 면장과 녀편네, 그의 딸이 어떻게 울어야 한다는것까지 세세히 일깨워주시면서 그를 희극배우로 성장하도록 하나하나 이끌어주시였다.

 

희극배우로서의 김세영의 새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이것은 미제강점하의 남녘땅을 떠나 어버이수령님 품을 찾아왔고 앞날이 내다보이지 않던 배우생활의 새롭고 광명에 찬 길을 열어주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의 자애로운 사랑속에서 이루어진 전변이였고 운명의 환생이였다.

 

김세영의 생활과 성장은 그자체가 심각한 극성을 안고있는 하나의 큰 작품이였다.

 

관련기사

► [연재]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1. 영화배우 김세영-1) 족쇄를 찬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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